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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남재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9월
평점 :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자본가도 아니면서 자본가의 눈을 가진 외눈박이들을 위한 비평적 에세이'라는 책의 소개가 마음에 와 닿았다. 자본가가 많지 않지만, 자본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나도 윗글에서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저자가 쓴 에세이의 모음인데, 정치에 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노동과 문화 성에 대한 에세이까지 다양한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종의 시론모음이다.
이 책은 주옥 같다.
2000년대 중반에 쓰여진 글들도 많지만, 현재를 해석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통찰이다.
나는 보통 책을 읽으면, 왠만해서는 다시 읽어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았던 문구들을 리뷰할 수 있도록, 블로그에 기록해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에 다시 번거롭게 책을 펴보지 않아도 되고, 출퇴근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리뷰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중간에 기록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주옥같은 내용들이 너무나 많아서 기록을 하려면, 책의 상당부분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내용도 좋았지만 각 문장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책을 읽다보면 순간적으로 건너 뛰는 문장이나 단락이 생기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도 없었다.
1) 이는 글을 아주 많이 써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쓰는 것이 아주 단련되어 있거나,
2) 여러번 문장을 곱씹어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다듬은 것이다.
마치 김훈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기름기를 쏙 뺀 참치같이 담백하면서도 꽉차 있어 일부를 발췌 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나이를 먹을 수록 자신만의 생각의 틀이 생긴다. 혹자는 이것을 프레임이라고도 한다. 프레임은 시간과 경험을 통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바뀌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이가 있을 수록 완고한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은 배척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임이 바뀔 때가 있다.
1)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진실이 아님을 깨달았거나,
2)나의 사고의 범위에 미치지 못했던 내용을 알게 되어 사고가 확장될 때,
3)그리고 타인의 논리에 완전히 수긍하여 나의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을 때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실로 오랜만에 독서를 통해 내 생각의 프레임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주로 사고의 확장이었다).
덧붙임
1. 글을 쓴다면 이런 글을 쓰고 싶다.
2. 꼬리를 물고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나온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병철의 '피로사회'등
3. 제목의 사람의 거짓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말의 거짓말은 무엇일까? 잘못된 사회 시스템이나 거짓된 위정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대중을 잠깐 속이거나 몇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있지만, 대중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그러나 말의 거짓말은 대중을 오랫동안 속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본문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현대사회는 권력 작동의 패러다임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단언한다. 성과사회는 '온순한 신체' 대신 '욕망하는 신체', '복종적 추제' 대신 '자발적 추제'를 생산한다. '성과주체'는 자유롭다는 확신하에 끊임없이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이다. '성과주체'의 자기 착취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성과가 약속하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돈,권력,명성,건강,성적 매력 등의 소유 대상을 스펙터클하게 배치하는 것이 일차적 유혹이라면, 거기에 행복, 자유, 사랑, 사회적 인정, 배려, 봉사 같은 가치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것이 이차적 유혹이다. 이런 식으로 성과와 보상 체계를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정시켜, 정형화된 판타지를 생산하는 권력 작동 방식이 '유혹의 정치'이다.
성과주체는 분노하지 않고 짜증낸다. 분노는 적을 향하지만 짜증은 자신의 무능을 향한다. 적대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을 창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능력에 대한 강박과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 지친다. 이 상태가 우울이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 능력이 모자라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우울증이 찾아온다. 허무가 성취의 방법을 알지만 동기부여가 안 되는 상태라면, 우울은 동기부여가 과도해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허무가 규율사회의 소수 탈주자가 겪었던 마음 사태라면, 우울은 피로사회의 다수가 직명하는 심리적 현실이다.
눈물마저 믿지 못하는 인간관계는 의심과 적의로 가득해 진실을 드러내면 오히려 약점 잡히기 쉽다. 그래서 남의 결점을 들추며 자신의 진심은 꼭꼭 숨기는 행동 방식이 효율적인 처세술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억압은 생존에 도움이 될지언정 타인과 관계 맺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 자신을 깊은 내면적 고독으로 몰고 간다. 고독으로 인한 삶의 무의미와 공허가 미계점에 달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어 누군가와 관계 맺고 싶은 충동 또한 극한에 이른다. 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해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혹은 용기가 없다면? 돈을 주고 안전하게 그 역할을 잠시 임대해야 한다. 힐링 산업은 자신을 인정해줄 타자의 결여를 대체하는 위안의 서비스업니다. 관계맺기의 두려움을 상처로 여기는 소아병적 정서를 따뜻하게 상처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힐링 열풍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병적 증상인다. 병든 것은 사회적 관계이고 치유는 타자를 먼저 인정하고 보듬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가능한데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보편적인 윤리적 명령이 되려면 이웃의 특정한 경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이웃 사랑이 충돌해 원수로 만날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쩌라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윤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의 견해를 참조해보자. 지젝은 윤리의 관건을 이웃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이웃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 가장 가깝고 절실하게 관계맺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런 관계는 자본을 둘러싸고 투쟁하고 타협하고 협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진다. 즉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의 관계가 바로 이웃인 것이다. 주차 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 동기, 임금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이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가까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고, 바로 그 때문에 이웃 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결국 '이웃 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적 삶의 가장 큰 적을 선악과 행불행, 선악과 미추를 혼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악함보다 못남을 더 적대시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도덕적 감정은 표면에 나타나는 못남보다 기저에 흐르는 나쁨에 더 강한 분노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비록 그 나쁨이 유능한 자의 작은 나쁨이라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