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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 이어령의 첫 번째 영성문학 강의
이어령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0월
평점 :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이어령의 눈으로 바라본 고전순례)
크리스챤이라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사건들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
그것은 크리스챤들에게 필연적이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고, 사고의 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크리스챤이라면, 자신의 시각과 이어령교수의 해석을 비교해 가면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챤이 아니라면, 크리스챤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영성이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문학작품들중에 특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당시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유럽의 중세나 미국의 건국이념은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성경과 영적인 이야기을 배경지식으로 가지고 읽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실제로 영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표면적인 이해에 그치지 않는다. 크리스챤으로서 문학작품들을 통해 영성을 발견하는 것은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달콤할 일인 것이다.
실제 크리스챤인 이어령교수의 시각과 관점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카라마조프 형제들 _죄인들을 위한 잔치
2. 말테의 수기 _도시인의 내면 풍경과 생명 찾기
3. 탕자, 돌아오다 _집을 떠난 사람만이 돌아올 수 있다
4. 레미제라블 _혁명이냐 사랑이냐
5. 파이 이야기 _생명이란 이토록 기막힌 것
이 책은 다섯개의 소설을 소재로 영성에 대한 저자의 깨달음을 쓴 책이다.
소설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독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지 않고 이 책을 읽는 다고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어령교수의 스포일러와 친절한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레미제라블과 라이프오브 파이만 극장에서 영화로 봤을 뿐, 이 책에 나오는 다섯가지 소설들 중 한가지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책의 흐름을 쫓아가는데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고전문학의 위대함은 사람에 따라서 읽는 시기에 따라서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고, 그러한 다양한 해석이 그 문학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문학으로 불리는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령교수의 해석을 나의 해석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영화를 통해 스토리를 알고 있었던 '레미자라블'과 '파이이야기'가 그런 케이스가 되었다.
특히 파이이야기에 대한 이어령교수의 해석은 놀라웠다. 자연과 생명을 통한 영성의 확인에 대한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뱅골호랑이과 인도소년의 이름등을 통한 저자의 복선과 암시를 따라가는 방식을 설명해 주는 부분은 마치 책의 문자들이 공간을 넘나드는 듯 입체적이었다.
덧붙임
1.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에 사야할 책들이 많다. 그 중에서 첫번째는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될 것 같다. 중학교 때 죄와벌을 읽다가 포기한 이후로 처음 읽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이 될 것이다.
2. 탕자, 돌아오다는 단편소설로 책의 후미에 별책부록으로 붙어있기 때문에 먼저 읽어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그런데 저는 야생의 석류 맛을 보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뉴턴에게 묻고 싶었어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당신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우주를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높은 가지에 사과가 매달려 있게 한 생명의 힘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지성인, 과학자들은 자연을 물리법칙으로 설명합니다. 죽었든 살았든 상관없이 중력의 법칙을 따라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을 우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체 이 작은 싹들이 무엇이기에 허공을 향해 올라가서 저 높은 가지에 태양처럼 둥글고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를 맺는 것일까요? 뉴턴은, 아인슈타인은 설명해보라 이것입니다. 빅뱅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씨앗 하나가 떨어져 싹을 틔우고, 중력을 거슬로 하늘을 향해 자라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책을 읽으시는 것을 들으면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어머니 목소리가 참 감미롭게 들려요. 제가 <어머니를 위한 여섯가지 은유>에서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단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은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했는데, 그게 거짓말이 아니에요. 책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가 구분이 잘 안 됩니다. 그러나까 오늘 제가 책을 읽고 쓰는 문학가가 된 것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책을 읽어주신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때로는 감기에 걸려 열이 나고, 졸려서 현실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기도 하고, 소설 이야기와 나의 꿈이 뒤엉클어지기도 합니다. 거기에 어머니 품의 냄새와 책에서 풍기는 종이 냄새, 이 모든 감각이 내 의식이 되었고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은 문학의 세계가 깊이 각인되어, 그 때문에 제가 문학을 계속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유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 자본주의가 되고, 평등은 소련으로 가서 볼셰비키 혁명이 되고, 형제애는 독일의 국수주의로 왜곡되어 히틀러가 되었습니다. 원래 한 덩어리여야 할 자유, 평등, 박애가 전부 쪼개진 것이지요. 우리가 역사에서 보듯이 자유 세력과 평등 세력의 힘겨루기가 냉전이었고, 박애라는 것도 '형제애'로 국한되었던 것이 인종 문제였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의 사랑과 같은 '박애'가 실현되었으면,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융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없는 자유, 사랑없는 평등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한국에는 이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산업화는 자유를, 민주화는 평등을 추구한 결과 입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이 도처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나 지식인 사회만이 아닙니다. 가족들 간에도 세대 간에도, 자유파와 평등파, 산업파와 민주파가 나뉩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인공들이다.","우리는 민주화 투사들이다"하고 말이지요. 이것을 통합할 수 잇는 힘이 아까 이야기한 사랑입니다. 자유와 평등 중 한쪽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완성시키는 힘을 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레미제라블>을 읽고 따문하게 여겻던 것은 이 메시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젋었을 때는 이 소설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를 몰랐는데 미리엘 주교 이야기를 다시 읽고 그 입장에서 보니 빅토르 위고의 위대함은 한 예술가로서의 위대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고는 그저 예술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큰 영혼, 지구 전체를 에워싸는 사랑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지요. 몇 백년 지난 오늘의 한국에서 <레미제라블>이 수많은 사람을 눈물짓게 하는 까닭은 바로 그가 전하는 이 같은 메시지 때문입니다.
파나마 국적의 일본 화물선, 글로벌한 근대문명의 배가 폭풍 속에서 깨지고 침몰합니다. 그 배 안에 있었던 인간도 짐승도, 미생물까지도 모두 종말을 맞고 해체됩니다. 그런데 그 세계가 침몰해도 딱 하나, 파이와 호랑이는 살아남습니다. 식민지 인도를 줄이면 폰디체리이고, 폰디체리를 줄이면 동물원, 이것을 다시 줄이면 파이 가족이 탄 화물선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줄인 것이 구명보트입니다. 인도가 겨우 몇 평방미터로 줄어든 것이지요. 좀 더 크게 말하면 구명보트는 우주와 지구, 문명, 동서남붕긔 모든 것들을 포함한 응축된 세계예요. 동물원에서는 뱅골 호랑이가, 파이 가족 중에서는 파이가 대표 선수로 남습니다. 호랑이와 소년 사이에 전개되는 모든 일들이 바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대표하는 설정인 것입니다. 먹고 먹히는 가열한 생존조건 속, 한시도 두려움과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긴장 속에서 파이는 오히려 서로를 살리고 격려하고 끝내는 사랑과 믿음으로 교감하는 영성을 발견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작은 구명정으로 축소되고, 그 생명이 한 명의 소년과 한 마리 호랑이라는 결정체로 발견될 때, 우리는 비로소 불신하고 버렸던 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