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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 이순신 - 기적의 승리, 명량
설민석 지음 / 휴먼큐브 / 2014년 8월
평점 :
전쟁의신 이순신
(영화 '명랑'을 책으로 만나다)
영화 '명랑'이 이순신이 왜군어선을 격침하듯이 파죽지세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최단기간 1,000만 관객돌파는 물론 이 추세라면, 한국영화 최다관객기록도 경신할 기세이다.
이런 영화 '명랑'의 흥행과 더불어 주목받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설민석 강사이다.
설민석 강사는 유명한 한국사강사로서 영화 '명랑'의 개봉에 맞춰서 영화 '명랑'의 배경이 되는 역사를 유투브에 특강형태로 올려서 유명세를 탄 강사이다.
명쾌한 해설과 입담 덕분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특강을 보고 '명랑'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나는 영화 '명랑'에 대한 특강 전에 영화 '광해'가 상영할 시기에 설민석강사의 특강을 들었었는데 영화와 같이 강의를 들으니 더 역사에 대해 관심이 갔다.
각설하고 이 책은 설민석 강사가 특강에서 못다한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자세하게 안내하기 위해서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구성이 좀 독특한데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내 아들 순신이_어머니 초계 변씨가 바라본 이순신
2. 사모하는 서방님_부인 상주 방씨가 바라본 이순신
3. 조선 장수에게 사로잡히다_여진족 장수 우을기내가 바라본 이순신
4. 피곤한 스타일이 납시었다_녹도 만호 정운이 바라본 이순신
5. 전쟁의 신_류성룡이 바라본 이순신
6. 건방진 장수로다_광해군이 바라본 이순신
7. 조선의 바다를 포기하라_권율이 바라본 이순신
8. 사이코 이순신_적장 구루시마가 바라본 이순신
9. 노량, 죽음의 바다_아들 이회가 바라본 이순신
10. 조선의 충신이여, 영원하라_정조가 바라본 이순신
구성이 독특하다.
스타 강사 답게 이순신의 지인들 10명을 선별하여 각 인물별로 장을 나누고
(이순신의 어린시절부터 사후까지 시간적인 순서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장에서는 그들이 보는 이순신에 대해 소설-역사-심화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1) 소설은 역사를 바탕으로 살을 덧붙인 팩션의 형식을 취하여 이순신에 대해 실제감 있게 구성하여 기억에 잘 남도록 스토리화 하고 있다.
2) 핵심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는 역사에 대한 부분은 기본과 심화로 나뉘어 역사적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마도 저자가 스타강사이기 때문에 이런 독특한 책의 구조가 생긴 것 같다.
취학전에는 위인전을 통해, 학생때는 교과서를 통해 수없이 접했던 이순신이지만, 이렇게 영화화되고, 그에 관련된 책을 오랜만에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아직 영화 '명랑'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휴일을 이용하여 가족들과 관람해야겠다.
본문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백의종군은 흔히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른다','벼슬없이 군대를 따라 전쟁에 참여한다','아무런 직책없이 일개 평민으로 일한다'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원래의 계급을 박탈당하고 일개 병졸로 근무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최하급의 병졸이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로는 원래의 직책만 정지될 뿐 어느 정도의 신분은 유지됩니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면 다시 복질될 수도 있는, 일종의 선의의 처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공로를 인정하고, 한 번의 잘못은 있었지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며 어서 복귀하기를 바라는 제도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원래 높은 관직에 있었다면 백의종군 기간에도 상황에 따라 군관 한두명의 보좌나 말 등을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195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습니다. 195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 1년 2개월 정도 전쟁을 대비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주어진 겁니다. 이때 이순신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는지 못했는지는 접어두고, 해이해진 군의 기강을 잡고 자신만의 철저한 원칙을 만들어 그것을 끊임없이 군사와 백성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전쟁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병력충원, 판옥선과 거북선 등 전선의 건조, 화포, 대포와 같은 총통류의 제작과 관리, 무기체계준비, 그리고 군사훈련등을 1년 이상 철저하게 시행했습니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조선군대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사는 그나마 이순히 휘하의 전라좌수영 병사들뿐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왜군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장계를 올립니다.
"임진년으로부터 오륙년간 적이 감히 전라, 충청도를 바로 들어오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바닷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항전하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만양 우리 수군을 전부 없애버리라고 명하신다면, 이는 적이 가장 다행으로 여길 이유가 될 것이며, 호남과 충청을 거쳐 바로 한양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싸울 배가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은 죽지 않았고,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명문의 장계와 함께 그 유명한 명량해전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이순신을 굉장히 흠모했던 왕입니다.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에서 <이충무공전서>를 만들었는데, 임금이 신하였던 사람의 전집을 만들라고 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정조가 이순신을 공경했다고 할 수 있겠죠. 실제로 이순신 장군 묘의 신도비 비문은 정조가 친히 쓴 것입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우리 장하신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공덕을 세우심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 한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