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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라틴어 원전 완역본) -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하여 ㅣ 현대지성 클래식 33
토머스 모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1월
평점 :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을 만큼 흥미롭게 읽었다. 고전을 원전 그대로 읽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고 즐거운지를 느끼게 해 준 책이다. 어떤 면에서는 <유토피아>의 북 세미나에 참여하고 온 느낌도 든다.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모두가 행복한 이상국가의 모습을 제시한 이상향 소설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라틴어 원전 완역본을 읽고 나니 그 구체적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1. 번역과 주석
먼저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멋진 번역과 주석이다. 박문재 번역가의 실력이 좋다는 것은 다른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를 몇 권 접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토머스 모어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답게, 그리스 로마 시대,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 시대에서 배울 점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적용하고자 했고, 이 작품에도 대부분의 인명과 지명, 관직명 등이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나와 있다. 박문재 번역가는 엄청난 내공으로 이런 이름 하나하나마다 그 뜻을 주석으로 달아주는데, 명료해서 알아듣기 쉽고 의역은 설명도 해주어서 주석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오랜시간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그 내공이 얼마일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주석도 좋았다. 토머스 모어는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영국과 유럽의 모습을 비판하며 유토피아의 모습을 제시했는데, 작품에서 비판하는 시대상이 어떤 것들인지도 주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유토피아 사람들의 종교와 철학에 관한 부분에서는 주석을 통해 이것이 어떤 철학 학파들을 결합한 것인지 알려주어서 그 점도 유익했다.
2. 책의 구성
번역가가 라틴어 원전을 기반으로 여러 영역본을 참고했다고 하는데, 현재와 과거의 영어까지 달하는 그 엄청난 실력도 놀랍지만 이 책에서 시와 서신들의 순서를 정렬한 것도 좋았다고 느꼈다.
판본마다 실린 시와 서신들도 다르고 순서도 달랐다고 하는데, 지금 정렬된 순서로는 1권이 본격적인 이야기 전에 소개하는 구조이고, 2권이 본문, 그 뒤의 시와 서신들은 작품을 칭찬하는 추천사나 리뷰 같은 느낌이어서 읽기 좋았다. 용어정리, 번역가의 해제가 실린 것도 정성스러웠다.
책의 디자인적 면에서는 본문 옆의 보조란 같은 날개 부분에 간단한 키워드 요약이 되어 있는 것도 보기 편했다. 비록 이 책이 '소책자'라고 명명되었을 정도로 긴 분량은 아니지만, 내용을 찾아 읽을 때는 색인이 있는 것도 편리할 것이다.
3. 내용과 감상
유토피아라는 이상 국가에 대해 읽고 난 후 전반적인 감상은, 유일신 종교에 기반한 거대한 수도원 같다는 느낌이었다. 초반에 사유재산을 갖지 않는 무욕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읽으면서는 대단하기도 하고 다들 도인인가 싶기도 했는데, 읽어내려가며 그것이 종교적인 사고방식-영혼불멸과 내세의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조금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번역자도 해제에서 말했듯 '유토피아는 수도원을 확대해 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을 중시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유토피아 사람들의 삶은 당시 유럽과 영국의 귀족들이 아무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 전체주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통제적이고 금욕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 토머스 모어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추구한 수도원적인 금욕주의를 기초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인문주의 사상이 결합되면서, 이성을 토대로 한 정신적 자유와 자기계발의 추구라는 측면이 더해진다.'(p283)
유토피아는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지만, 우주와 만물을 창조해 다스리는 최고 유일신인 '미트라스' 이외의 존재를 신으로 부르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미트라스에 대한 신앙을 기반으로 이름이나 약간의 교리만 다른 종교들을 허용한다고 말하지만 모두가 같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점도 이들의 신앙은 일신교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종교적 기반을 탄탄하게 두고 투명성과 신뢰, 성실성을 도구로 사회를 만들어간 유토피아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꿈만 같다. 모든 면에서 이상적이고 완벽한 모습을 보였지만, 특히 여행을 가더라도 하루 이상 머물게 되면 그곳에서 일을 해야 식사를 할 수 있고, 일손이 늘어나니 여행지의 사람들도 여행객들을 환영한다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금은보화를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든 유토피아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여기에는 종교적 사고방식보다는 인간의 심리를 활용한 기술이 활용된 것 같아 흥미로웠다. 유토피아에서는 2년 이상의 잉여 생산물을 백업으로 남겨두고 남은 것들은 주변 국가와의 교역을 통해 철, 금과 은 등으로 교환을 하는데, 이들에게 금과 은은 전쟁 상황에 피해를 줄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유토피아 사람들은 금과 은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잘 쓰지 않는 도구나 죄수들에게 다는 족쇄를 금으로 만드는 식으로 금에 대한 사회적 동경을 줄이고, 반짝이는 보석도 철없는 어린 아이 때나 갖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식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금은보화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사람을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게 만든다. 그럼에도 전쟁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금은을 영리하고 교묘하게 사용한다는 점도 대단하다.
노동 시간에 대한 점도 좋았다. 모두가 쓸모 있는 일에 종사하기 때문에 장시간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넘치는 생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 식사 후 두 시간 쉬다가 오후에 세 시간 일한 후에는 자유시간이라는 점은 정말 파격적이고 멋졌다. 유토피아를 읽다 보면 내가 이 사회에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가장 기분좋은 부분이었다.
반면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모두가 관청에 모여 잘 준비된 식사를 하는데, 연령대와 성별 등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는 데다가, 젊은 사람들은 안쪽에 앉아서 연장자들이 둘러싸 앉는 방식인데 이는 방자한 언행 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점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사회에 기여하는 고귀한 행동과 정신적 쾌락을 최고의 미덕으로 꼽고 모두가 이것을 추구한다는 점도 조금 답답하고 일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유재산이 없고 자연히 개인 공간도 없는 곳이라는 점도 답답하게 느껴졌고, 범죄자들도 노예로 전락하여 '수치'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는 사형이 낫다고 여기는 곳이라는 점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남의 시선에 민감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21세기의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장단점이 공존하는 유토피아 사회지만, 그럼에도 유토피아는 아직까지 전세계 모든 사회에 시사하는 점들이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번역자가 해제에서 말했듯 이 <유토피아>와 함께, 이 작품의 기반이 된 플라톤의 <국가>,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함께 놓고 앞으로의 자본주의가 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 리뷰는 네이버 이북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