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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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노동운동이고 사회 문제고 간에 어떤 개념이 형성되기도 전에 우연히 읽게 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어린 내게 3단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첫 째, 우리 나라에 이렇게 초현실적인 문체를 가진 소설이 있었다니,

둘 째, 이런 처참한 상황이 정.말.로. 존재했던걸까,

셋 째, 이런 초현실적인 문제로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다룰 수 있다니,

 

하는 충격이었다. 특히 두 번째의 충격은 그저 사진으로만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사실들이 머리 속에서 색을 입고 뛰어다니는 경험이었다. 살던 집은 정말로 허물렸고, 공장은 숨을 쉬기 힘들었고, 그들은 쉬지 못했다는 사.실.

 

도시화, 산업혁명. 사람들이 사는 곳을 조금 더 좋게 보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사는 곳에서 쫓겨났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일했다는 그 사실이 가시처럼 와 닿았다. 그리고 '공정의 문제'에 대해 깊이깊이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빵과 장미> 37p. 

 

 

값싼 노동력의 이민자인 로사의 가족은 교육받지 못한 채 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제대로 된 미국인이 될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며 자란 소녀 로사는 그야말로 천대받고 무시당하지 않는 우아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다. 어느 날 로사는 선생님이 나쁘다고 한 '파업'에  어머니가 동참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머니에게 큰 실망감을 느낀다. 그러나 로사가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느 때보다 즐거워보이고, 의욕이 넘쳐 흐르는 것 처럼 보인다. 어머니와 선생님의 말 사이에서 로사는 가치관의 혼돈을 느끼게 된다.

 

 

"우드 씨가 뭐라 했는지 너도 알잖니. 공장에서 54시간 일하는 사람들한테 56시간 임금을 줄 수는 없어."

로사의 가슴 속에서 뭔가가 딱딱해졌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집이 다섯 채나 있잖아요."

"그래, 집을 다섯 채 가졌지."

"네, 선생님. 그리고 자동차가 엄청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정도고요."

핀치 선생님은 고개를 홱 틀었다. 선생님의 뺨이 빨개졌다.

<빵과 장미>83p.

 

 

제이크는 미국인이지만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소년이다. 알콜중독 아버지에게 매일 맞으면서도 공장에 나가 아버지의 술값을 벌어야 하는 처지다. 이주자들의 파업은 그에게 돈을 벌지 못하는 날들일 뿐이다. 둘의 미묘하게 다른 입장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

 

 

그 영감한테 이 저주받은 파업의 와중에도 자기가 얼마나 잘 처신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데, 자기는 새 옷에 아버지한테 선물 사줄 돈까지 있노라고.

판잣집에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이번만은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사뭇 실망스러웠다. 제이크는 아버지가 못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간이침대 한복판에다 술병을 놔두고, 쓰레기 더미가 아닌 다른 잠자리를 찾으러 떠났다. 새 옷을 벌써부터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빵과 장미> 169p.

 

 

제이크는 어쩌다 생긴 돈으로 자신의 먹을 것보다 아버지가 좋아할 위스키를 사서 집으로 간다. 새 옷을 아버지에게 맞아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에 술만 놓고 나온 제이크는 다음 날, 술을 먹고 잠든 아버지가 추운 날씨에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불쌍한 소년은 이 모든 비극이 자신이 술을 사갔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고 과격해진 운동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보내진 소녀와 소년은 한 부부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서로를 이해하며 성숙해간다.

 

빵과 장미의 상징성은 구호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빵은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단순히 일을 하기 위해 먹고, 먹기위해 일을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그건 사람 사는 게 아니지'하고 혀를 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빵 뿐 아니라 '장미'도 원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을 마친 저녁 시간에는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권리, 산책을 하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이들이 갖고자 하는 '장미'이다. 자신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들을 요구하는 이들의 투쟁은 그래서 아름답고, 활기차보인다. 그리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자들의 몸짓은 더욱 우스꽝스럽고, 오히려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보이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이민 노동자들에게 공장의 노동 여건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들은 대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일을 했습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누구든 일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아이가 열네 살 아래면, 부모들은 종종 돈을 주고 아이의 출생증명서를 위조했습니다. 그래야 아이가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1년, 메사추세츠 주의회는 공장주들에게 1912년 1월 1일부로 여자와 어린이의 노동시간을 주 56시간에서 54시간으로 단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보통 성인 남자가 성인 여자보다 높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에 공장주들은 모두의 노동시간을 54시간으로 줄이고 기계 가동 속도를 높임으로써, 단축된 주당 노동 시간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이윤 손실을 임금 삭감을 통해 메우려 했습니다.

<빵과 장미> 작가의 말 中 

 

 

이런 시절도 있었단다. 라고 말하기에 아직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백인에 의해 제공된 마약에 중독되어 마약을 더 얻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모아야 하는 현대판 노예들.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며 겨우 목숨을 이어나갈 정도의 돈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불법체류 노동자들. 이러한 불편한 진실들에 당장 맞서 싸울 수도, 피할 수도 없지만 최소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라도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이 빵도, 장미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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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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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또한 일가견이 있다.
공화국 시절로 불렸던 독재체제. 금기된 책이 있고 말 한마디 함부로 못하던 시절. 그 터져나올듯 한 억압에 대해 헤르타 뮐러는 줄곧 써 온 것이다.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도 어릴 적에 초록 자두를 먹었다. 그들에

게는 자두와 관련된 어떤 풍경도 머릿속에 남아닜지 않았다. 그 누구

의 아버지도 자두 먹는 걸 말리지 않았으므로. 꼼짝없이 죽는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나를 놀렸다. 하얗게 열이 오르고 심장이

안에서부터 타버려.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죽음을 물 필요가 없

었어, 아버지가 안 볼 때 먹었으니까. 감시원들은 대놓고 먹어, 내가

말했다. 그래도 그들은 죽음을 물지 않아, 행인들도 자두 딸 때 나는

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가난의 시큼한 트림을 알고 있거든.

여기, '자살'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 용납하지 않는 데서 그치

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한다. 수치스러운 것이다. 당에게 자살로

인해 수치를 안기고, 당의 위신을 떨어트렸다. 이 뿐이다. 과도한 존

경심은 극단적인 방법들을 부른다.

강간과 독재의 피해자인 그녀들을 당은 수치스러워 하고, 그녀를 과도한 박수로 지우려 한다. 그녀들을 지우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한 박수는 멈추지 않는다. 누구 하나라도 멈추려 한다면 당에 대한 충성을 의심받을 것이 뻔한 상황인 것이다. 박수는 하루 종일 지속된다.

아이러니컬 한 상황들의 연속 속에서 삶의 모습은 단편적으로만 보여지고, 끔찍한 상황을 묘사하는 언어는 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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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안전성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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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일상 탈출!’ 이라는 말이 절실한 시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휴가를 떠나는 그 순간, 혹은 휴가를 못 가게 된 그 순간 떠오르는 말은 ‘집 떠나면 개고생’ 이라는 말이다. 매일 보던 풍경, 매일 하던 일에서 떠나고 싶지만 어느 순간 일상이 아닌 위치에 있게 되면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듯 불안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안정과 불안, 일상과 비일상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 소설집은, 그 미묘한 균열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보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임에도 그들이 직접 ‘당사자의 입장에서’보여주는 사건들은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참을 수 없이 민망하고, 부끄러운 순간의 불안상태와 안도하는 상태를 오간다.

 

따라서 이 책에서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사건은 사소하지만 본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이 거대한 비일상의 사건이다. 아이가 없는 휴가를 즐기기 위해 대마초를 피우려다 경찰을 맞닥뜨리고, 폭탄 위협을 피해 회사에 나가지 못한 날, 뒤뜰의 잡초를 뽑으려다 아내의 맨드라미를 뽑고 핀잔을 듣는다.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여자아이는 뒤뜰에서 성적 상상을 하며 옷을 벗어제낀다. 그러다 마트에서 돌아온 엄마를 맞닥뜨린 앞에서 앞섶을 가려버리는 민망한 순간, 우연히 동생의 바비 인형에 반해버린 남자아이 등 작가는 누구나 생에 한 번 쯤은 혼자 은밀히 갖고 있는 기억들을 불러내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누구나 갖고 있는 일상과 비일상 사이, 은밀한 균열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 <사물의 안전성>. 뫼비우스의 띠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 일상의 사물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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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주사위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4
마크 앨퍼트 지음, 이원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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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

그를 신으로 부르는 자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했기 때문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증거로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인슈타인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존재인것이 당연하다.

동시에 끊임없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사람에 대한 온갖 사실들은 다큐, 영화. 소설 등 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이 소설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비밀을 밝히거나, 혹은 지키려 하는 다빈치 코드 류의 소설들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어려워서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과학'을 그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생이야 끊임없이 소재로 삼아졌지만 아인슈타인 개인이 아닌 그이 이론이 소재가 되어 공상과학 소설도 아니고, 스릴러로 옮겨졌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류가 만들었지만 인류가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가진 이론, 과학계의 성배와도 같은 이론의 비밀은 복잡해보이지만 차근차근한 설명과 함께 스타일리쉬한 액션영화를 보는 듯한 쾌감을 안겨준다.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전개는 그야말로 글씨를 빨리 읽어내려가는 것 이외의 행동을 못하게 막아버리고,

책을 다 읽자 머리 속에 소용돌이가 한 차례 지나간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영화를 보러 가기엔 귀찮고,

차분히, 조용히 앉아 3시간이 10분 처럼 가버리는 액션 스릴러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을 받고 싶은 언제라도,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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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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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플렉스의 이름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가해자를 사랑하게까지 되는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제목 또한 이러한 컴플렉스와 관련있다.

독재에 눌리다 못해 적응되고, 어느 새 내면화시켜버리는 사람들.

그래서 여우는 이미 자신을 죽이는 사냥꾼과 동일시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은 어느새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독재를 옹호하고, 자유를 혐오해 버리게 된다.

 

우리나라의 군부독재시절을 그리워 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대통령이 그에게 카네이션 꽃다발을 바친다. 노동자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의 입술은 양손의 박자에 맞춰 열렸다 닫혔다 한다. 파벨은 자신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모든 공장엔 검은색 자동차가 있어. 그리고 클라라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당신은 공장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잖아요. 그는 팔을 뒤로 뻗어 텔레비전을 끈다.

 

 

어떤 현실적인 스릴러 못지 않은 비밀경찰의 소행도 눈에 띈다.

하루하루, 바닥에 깔린 여우 장판의 다리가 하나씩 사라진다.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표시. 그러나 다른 흔적은 없다.

이러한 상황들에서 미쳐버리지 않고 살아갈 방법이 있을까.

 

소설은 이러한 상황의 묘사를 위해 위태하고 단편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헤르타뮐러 작가의 말처럼, 끔찍하게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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