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
조안 앤더슨 지음, 박은희 옮김 / 따님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의 두 번째 인생
 

엄마에게 선물을 보냈다. 웹서핑을 하다가 발견한 책이었다. 미국의 한 여성 에세이스트의 책이었는데 평생을 남편과 아이를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다가 문득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별거를 선택해 바닷가 오두막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자그마하고 깔끔한 책 디자인에도 끌렸지만 오십대라는 제목의 단어에 끌렸다. 엄마에게 선물 해드리고 싶은 책이었지만 나도 읽어 보고 싶은 책이기도 했다.

인터넷 서점에 주문을 하고 선물과 함께 “엄마, 선물이에요!”라는 애교(?)섞인 메시지도 함께 써서 보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결제가 끝나자 나는 스스로 효녀라는 생각에 뿌듯함과 선물을 받고 즐거워할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며 괜히 오후 내내 피식거렸다. 며칠 후 엄마에게 책을 받았다는 전화가 왔고 책을 간만에 읽어보겠다는 다짐도 받아냈다.

부평 집에 갈 때마다 마루에는 내가 선물한 책과 엄마의 돋보기안경이 눈에 띄었다. 언제부터 엄마가 돋보기를 쓰셨을까. 아직도 나의 기억에 있는 엄마는 화려한 정장차림에 와인색 립스틱을 세련되게 바른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여자에게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다른 아이의 엄마들은 항상 아줌마 퍼머에 펑퍼짐한 옷을 입고 집에서 집안일을 했지만 우리 엄마는 달랐다. 오랜 외국생활로 일본어를 본지인처럼 능숙하게 구사했고, 세련된 옷차림은 기본이고 센스 있는 살림솜씨까지 완벽한 슈퍼우먼(?)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는 엄마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오히려 펑퍼짐한 엄마를 가진 아이들은 애정어린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그것이 부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보단 세련되고 멋진 엄마가 더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한 번도 나를 챙겨주지 않아서 서운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나도 그렇게 멋있어지고 싶었다.


나는 돋보기안경을 장난삼아 써보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이 책 재밌어?” 그랬더니 엄마, 역시 솔직하시다. “아니, 별로더라.” 나는 사실 엄마의 취향을 모른다. 내가 보고 싶은 엄마의 모습만을 보고 내가 바라는 모습의 엄마가 되어주기만을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 어설픈 책 선물 사건으로 나는 역시 나에게 이기적인 딸의 모습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된다.

일본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오신 지금의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다를 바가 없다. 펑퍼짐하진 않지만 배가 다른 아줌마들처럼 나왔고, 화장을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물론 이제는 화려한 옷을 입지도 않으신다. 어떤 날은 함께 시장을 가려는데 엄마의 옷이 너무 후줄근해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시장용 코디를 해준 적도 있다.

요즘엔 하루 종일 식구들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고, 한시라도 가만히 있으시질 못하고 걸레질이라도 하고, 식구들에게 한 마디 한 마디 애정을 담아 걱정을 내비치신다.

지금의 엄마는 우리 식구들에게 너무나 큰 존재다. 아버지는 엄마가 온 이후로 얼굴이 참 좋아지셨고, 언니들은 엄마에게 조카를 맡기거나 반찬을 싸달라거나 맛있는 것을 해달라고 조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보지 못한 ‘엄마 서비스’를 몰아서 받고 있는 셈이다. 받던 서비스를 못 받는다면 불만이 생기겠지만, 못 받던 서비스를 한꺼번에 받으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엄마가 38페이지까지밖에 읽지 않은 책을 내가 읽으려고 가져왔다. 이미 그 책은 책장에 버림받아 꽂혀 있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읽어보니 (그럼 그렇지) 이건 바로 딱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이었다. 여성의 자아와 자연에 대한 눈뜸, 그동안 답답하게 살았던 인생에 대한 후회 등이 주된 이야기였고 살짝 지루했다. 게다가 주인공 아줌마는 전형적인 겁쟁이 와프스 공주스타일이었다. 엄마는 공주스타일이 결코 아니니 더 지루했을 수밖에. 중간 중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묘사와 성찰은 역시 나의 취향이었다. 책을 즐겁게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뇌까린다. 우리 엄마는 답답하게 살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책이 시시했을 것이 분명했다. 선물미션 완전 실패였다.

 

-.-;;

 

p.s.

더군다나 엄마에게 <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라는 책을 선물해드리며 더 알찬 노후를 준비하라는 어린 딸의 오만이 부끄러워졌다. 엄마는 이미 집으로 돌아와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나 잘하자.’      




역시 엄마는 내 인생의 최고 오래된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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