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입문 니체 아카이브
베르너 슈텍마이어 지음, 홍사현 옮김 / 책세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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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뭘까요? 사실 특별히 없습니다. 요즘 생각없이 살아서 그런가요? 이럴때 쓰는 방법은 떠오르는 키워드 모으기입니다. 철학자, 독일, 생철학, 신은 죽었다. 아. 짜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철학이 어려운데, 니체는 더 어렵다는 생각도 드네요. 분명한건 '저자는 매일 니체를 읽지만 그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바로 '니체'입니다. 밑에 저자의 약력을 약술해 두었지만 니체의 최고 전문가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니체'임을 인정하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번역자도 니체는 읽을수록 입문서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후기를 씁니다) 지적 허영심일지모르지만 니체를 잘알고 싶은 욕망은 항상 있기에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만 죽기전에 21권짜리 니체전집을 읽을 수있을지 의문입니다. 프로이드전집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니체 전집을 낸 곳이 <니체입문>을 낸 책세상출판사네요. 니체전집을 읽게 하고자 출판사의 고육지책아닐까하는 망상도 듭니다ㅎㅎ. 니체는 어렵기에 입문서가 필요하다는 거죠.^^ 니체라는 산과 맞서서 오르다보면 울렁증을 느끼면 <니체입문>으로 귀미테로 삼아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니체는 '누구나의 기준'을 인정안한,무시한 사람입니다. 사람마다의 목표로 철학을 소개합니다. 항시 삶에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을 개인마다의 관점과 지평, 방향설정을 하게 하라입니다. 니체에게 보편타당은 지나가는 '개'나 주라고 좀 과격하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저자는 베르너 슈텍마이어는 독일철학자입니다. 46년생이시고, 튀윙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북부 그라이프스발트대학 철학과교수를 지냈습니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니체연구>편집자이자 공동발행자입니다. 다양한 철학주제의 논문을 다수 써오셨고, 저자로 <방향설정의 철학what is orientation>가 제눈에 띄네요.

우선 니체( 1844~1900년)는 독일중부 뢰켄에서 목사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니체는 어릴때 집안과 연관된 수도원학교에 다닐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돔김나지움에 입학을 시킵니다. 11살때 <악의 근원에 대해서> 14살에 <나의 생애로 부터>라는 글을 씁니다. 그런데 니체가 어릴적, 뢰켄에서 태어나 나옴부르크, 봐인가르텐로 가깝지 않은 거리를 이사를 합니다. 니체는 졸업논문으로 그리스시인 테오그니스에 대해 썼고, 플라톤의 <향연>을 가장좋아하는 시문학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문학적인 체취가 바로 사춘기때 매달렸던 문학기질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본 대학에 와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합니다. 이로인해 '신은 죽었다'라고 말할 수있는 학문적 토대도 마련된 듯합니다. 신은 죽었다는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매우 문학적 사서로 들리는 측면이 공부의 토대에 있어보입니다. (feat 피아노연주).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된, 쇼팬하우어의 책도 니체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한동안 그의 삶과 함께하고 신도처럼 되어 교수에서 탈락하는 일도 생깁니다. 1869년 라이프니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스승의 배려로 부교수로도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해 프로이센국적도 포기하고 자신을이끌어준 리츨학파와도 결별을 하면서 고전문헌학에서 철학으로 짐을 싸서 큰 발걸음을 나섰니다. 1장에서 보여주는 니체연표는 니체가 겪은 치열한 삶을 그가 남긴 작품들의 단말마같은 심경과함께 흘러갑니다. 니체는 그가 죽기10년쯤부터 전국구 인물로 나서지만 그의 병은 깊어 지기만 합니다 그리고 병든 니체를 두고 어머니와 여동생간의 갈등은 또한 니체가 가진 삶의 일부일듯합니다. 니체에 대해 교회기록부는 그는 개신교인으로 태어났지만 그의 철학은 반기독교였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56세의 삶동안 엄청난량의 글을 썻고 가르치고 교우하는 삶을 산 니체, 쉽지않은 삶이라는걸 그의 연표만으로도 압박감이 심합니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그의 생애와 매우 밀착되어 있다고 하기에 매우중요한 탐구영역입니다. 위버멘쉬나 영혼회귀, 힘에의 의지 등 모두 반의지로 놓였다고 하지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ㅠㅠ 베품은 그냥 사람들에게 주어진것인데, 이런 요소은 상호성을 상정한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반작용으로 나눠버립니다. 제가 보기에 테스형이 했듯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품는다면 우리를 감싸는 모든 규범, 기준, 제도 등도 권력으로 강권되지만 흐물흐물 물같은 존재라는 것이겠죠.

니체에게 방향성은 매우 중요한 테마입니다. 이 방향성을 위해 다양한 논제를 던져줍니다. 자연성으로 자연에게 인간성을 불어넣기보다 인간을 자연화하는 방향을 설명한다던지, 형이상학적 이성을 합목적인 이성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다른 관점제시로 인해 논란이 생겨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중시합니다. 그는 기존의 철학에 큰 돌맹이를 던긴겁니다. 인문학이 움직이지않는 고정된 무언가를 찾는 것이라면 니체는 그것을 영웅에서 개인으로 송두리채 관점을 바꿘 사람입니다. 이런 니체에게 신이란 당연히 존재할 수없겠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분석하면서 니체의 중요키워드인 위버멘쉬와 영원회귀것 각각 표식 또는 기호임을 명확히라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쓰면서도 제가 저자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니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것은 철학자의 몫이고 니체의 글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합니다. 그게 즐거움이 아닐까하는거죠. 베품은 주는것(선물)이고 상호적이 아닌것인데, 동종성 상호성, 예측가능성을 사람들은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는 창조성과 반창조성의 논의를 보는 듯합니다. 나의 생각은 니체의 선물로 나의 길을 내 스스로 만들어가라, 신에게 의존하지 마라로 들립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모습이 느끼지며 전율도 함께 합니다.

'나를 따르지말고 너를 따르라'던 니체, 유럽에서는 마르크스만큼 유럽지성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을 겁니다. 그가 살다간 시대는 19세기 말로 산업혁명의 전성기로 공업화가 폭발하는 시점으로 정치적으로 프로이센의 비르마르크체제하에서 온갖 전투가 유럽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시대였습니다. 그의 어릴적 삶에는 피아노, 테오그니스, 쇼펜하우어 그리고 신체적 고통 등이 지속됩니다. 그의 글은 멋진 문학적 소양이 깊으면서도 철학적 분열같은 복잡함이 함께 합니다. 그런이유로 항상 논쟁이 그치지 않는 니체의 철학은 누구에게나 도전 그 자체입니다.

제 책꽂이에는 오래전에 산 고병권의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 20년가까이 그 자리에 서있습니다.한 20페이지남짓 읽고 멈쳐있습니다. 이제 그 책을 책장에서 뽑아서 먼지를 털고 천개의 눈이든 만개의 세상이든 열어 볼때인듯합니다. 니체는 겨우 백년전 사람이지만 참 과거인처럼 느껴지는건 우리삶도 아니 내 삶도 시간의 바퀴가 정신없이 튕겨 흘러가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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