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가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잔잔하게 이는 물결을 바라보노라면 마음 한 편이 평화로워짐을 느낀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러한 감정은 내가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찾아온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내면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 그녀만의 섬세한 시각에 어느새 나의 마음마저 흡수되고 만다.




일본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인 그녀, 그간 그녀가 내놓은 작품들은 분명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지나간 시간 또는 추억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채 어느 것도 쉽게 놓아버리지 못하는 삶을 그저 담담히 살아가는 이들, 소위 평범하다고 자부하는 삶의 관계를 넘어 자기가 가진 소신대로 사랑을 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비주류의 인물상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쉬워 보이지 않았던 그네들의 일상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 애잔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서로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이들은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게 적정선을 유지하며 서로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다. 가호와 시즈에, 이 둘은 오랜 시간 많은 것을 함께 나눠온 만큼 서로에게 마음 안에 남아있는 상처와 아픔까지도 이해하고 보듬어 줄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5년 전 이별의 아픔을 겪음으로 인해 그 시간 속의 끈을 놓지 못하는 가호와 남들이 보기엔 불륜이라 말할 수 있는 유부남과의 원거리 사랑을 하고 있는 시즈에, 우리는 이들의 사랑을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다만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정을 나눠온 둘도 없는 친구기에 매일의 일상에서 함께 하며 독이 되었든, 약이 되었든 거리낌 없이 조언을 주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있을까. 현실의 나 역시 그렇다. 정말 위로받고 싶은 날엔 이를 겉으로 드러내기보다 한걸음 더 멈칫하게 된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지켜줘야 할 부분과 그 틈 안에서 느끼게 되는 미묘한 감정 선을 작가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가호를 바라봐주고 지켜주는 한 사람, 나카노가 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 또 하나의 의미로 찾아오는 사랑.




『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을 좋아해. 내가 모르는 고장에서 태어나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살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세리자와를 좋아해, 난. 지금의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없고, 지금의 내가 아닌 나를 상상할 수 없으니까. 연애라는 거, 뭐랄까 유일무이한 우연, 천문학적인 우연으로 성립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뭐가 하나라도 어긋나면, 예를 들어 좀 더 일찍 만났다든가 세리자와가 독신이라든가, 그랬으면 모든 게 달라졌을 거 아냐? -p 267』




이별 후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내 보일 수 없었던 가호를 오랜 시간 지켜봐온 나카노, 자기의 사랑을 지키고자 끊임없이 상대에게 맞추며 현실의 사랑을 추구하는 시즈에. 과거와 현재, 그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다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는 누구이고 정말 진실한 사랑의 방향은 어디인지 이에 대한 선택은 오로지 각자 자신에게 달린 것이리라. 이 두 친구의 평범한 일상 속 테두리 안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감정과 주변 인물들과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여지없이 솔직담백하게 그려 보여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그 누구보다 가호에게 많이 동화되어 갔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미련,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여타의 것이든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난 후 받게 되는 상처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 그 깨달음 때문이리라. 과거의 추억 속에서 현실의 나로 되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그 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혹은 예상치 못했던 그 이상의 것을 선물로 주기에 우리는 오늘을 또 살아가는 것일 게다. 잔잔하고도 깊이 있는 여운을 남겨주는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이야기에 또 한 번 내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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