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야화
아사쿠라 다쿠야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매일의 일상에서 꾸는 꿈처럼 아득하지만 그 장면마다 선명한 화질이 되어 나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일부러 기억해내려 하지 않아도 우리 주변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많은 영향을 주는 일들. 누구에게 단 몇 마디의 말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경험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눈의 야화라는 책을 통해 펼쳐집니다. 야화라고 하는 것은 문학에서는 설화 형식을 표현하는 말이고 사전적인 의미로는 밤에 모여 앉아 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열일곱살의 평범한 고등학생인 가즈키의 이야기 궁금하지요?


고등학생인 가즈키는 눈 내리는 한밤중의 어느 날 공원에서 열다섯 살의 유키코를 만납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나에게만 보이는 소녀.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어린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그녀는 존재에 대한 어떤 규정도 내리지 않은 채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죽음의 끝도 아닌 또 다른 의미로 탄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편,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소외됨으로 외로움을 줄곧 느껴왔던 그녀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가즈키를 반기며 속마음을 터놓을 존재 그 자체에 크게 기뻐합니다.


『줄곧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어.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굉장히 무섭고 또 쓸쓸해지거든. 하지만 어린 아이들 밖에 내 상대가 되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단념하고 있었어. 누군가에게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 마음이 놓여. 정말이야』- p31


그 소녀와의 만남을 뒤로 한 후 가즈키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학교를 졸업 한 후 디자이너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영업부장 미즈하라씨의 신임아래 성실하게 일을 해오지만 그가 회사 창립자의 서자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다른 이들의 견제를 받게 되고 사회 안의 또 다른 조직체 안에서 겪은 인간관계의 유기적인 틈에서 많은 혼란과 갈등을 느끼던 그는 회사를 그만 두게 되고 자신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무언가 탈 것을 제때 타지 못해 홀로 남겨진 나, 똑같은 장소에 있는 건 나뿐이다.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고, 모든 곳에서 잘려서 어디와도 통하지 않는 장소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p127


내가 서 있어야 할 곳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괴리감을 느끼는지요? 갈 곳을 알고 적절한 때 떠나고 찾아올 줄 아는 철새들이 아닌 이상 우리는 오로 의지와 선택의 순간아래서 살아가게 되고 많은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변화 속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정답이지만 가끔은 과거에 얽매이기도 하고 주변의 홀대와 무관심에 더욱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합니다. 가즈키 또한 그런 경우지요.


가즈키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눈 내리는 날이면 공원을 찾아가 소녀와 조우를 합니다.서로 마음을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우리는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씁쓸한 일인지요.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사라지면서 가족 간의 소통은 더없이 힘들었지만 그 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일들을 통해 자신의 닫힌 마음의 문을 점차 열어가게 됩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 지금의 내가 과거의 누군가일 수도 있고 나의 죽음이 훗날 다른 이로 재탄생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은 오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결국 타인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거야. 누구든지 결국은 어딘가에서 그 밸런스를 맞춰나가지 않으면 안돼. 지금의 너도 아마 발버둥치고 있겠지. 나는 내 방식으로 그 결산을 맞추려 하고 있고 너한테는 너만의 방식이 있을거야.』- p305


알고 보면 내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은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든 그 해결의 실마리도 결국은 내가 풀어야 하는 것이지요. 삶의 주체는 타인이 아닌 나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삶의 순간순간을 살아나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나로써 존재할 때 가장 빛이 난다는 말이 줄곧 생각이 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무리이다. 예를 들면 무엇이 자기를 지금 있는 장소로 내몰았는지조차 제대로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서 파악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모양이 그다지 다른 것도 아닌데도 멈출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주술과 같다. 』- p 325


저자는 민간전승으로 전해져 오는 설녀와 눈 오는 날이면 나타난다는 유킨코라 불리 우는 아이들의 전설을 새롭게 해석하여 생명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조금은 난해하게도 들리지만 삶과 죽음, 그 경계를 지나 불교에서 말하는 “몸은 죽어 없어져도 넋은 남아 다른 이들의 몸을 통해 다시 태어나기를 끊임없이 거듭한다”라는 윤회사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언젠가 내 자신도 기억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흩어져 먼 하늘 저편에서 빛이 된 후 다시 이 세상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한번은 확실히 나였던 그 존재는 그랬는지 모른 채로 예전 유키코였던 누군가와 만날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때 우리는 서로 누구였는지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에게 틀림없이 특별한 느낌을 가질 것이다.』- p392


유키코와의 만남을 가즈키는 하나의 환영일까. 꿈일까. 아니면 내 자신의 누군가가 말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진 채 확신하지 못하지만 짧은 시간 그녀와 나눈 대화를 토대로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 세계의 관계, 그 소중함을 새롭게 그려 나갑니다. 우리는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 저마다의 이름을 부여 받아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순환되어 계속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존재 이유와 인간의 삶 그 면면을 생각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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