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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평점 :
몇 배는 더 슬프게 다가오는 이 문장들을 겪으니 정미경 소설가의 유고 소설집이라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했다
못부터 새벽을 거쳐 장마까지 가는 길목에도 서늘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거구나, 정미경
소설가의 매력
내가 김영하 소설가의 책을 읽었을 때와의 비슷한 희열이 여기에 있다
어쩌면 조금 더 소름 끼치는 서늘함이
쓰고 단 것이 삶이라면 현실에는 쓴 것만 있다며 소리치는 것 같은 문장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주 귀한 단 맛들을 조금씩 빼내어 보여준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ㅡ 번외 : 나의 이야기
창작과 비평에서 받은 책 <쟁점
한국사> <시누이> 서평단 활동 이후 여러 번의 시도에도 그 어떤 책도 서평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지는 않을까 내 서평이 너무 형편없이 부족해 출판사 관계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수많은 고민을 했다
오사카로 떠나던 날 아침 연락 한 통을 받았다
창비에서 온 연락이었다
글을 보자마자 마음에 와 닿았던 故 정미경 소설가의 유고 소설집 서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창비 측에서 책을 보내겠다는 사랑스런 문자와 메일을 받았고 나는 오사카로 떠나던 날 두개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소포 하나를 뜯어 표지부터 감성적이고 서늘한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이 문장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겁이 나 종이를 넘기기 무서웠다
긴 망설임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문장들을 맞았다

ㅡ 못
겨울이라는 글자가 차게 다가왔다
그 중 겨울의 끝이라고 함은 이제까지의 겨울을 정리라도 해주는 듯 더욱 세차게 그렇게 우리의 살갗에 내려앉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아쉬움을 남겨 미련을 두기도 했다
쓰디 쓴 일상들을 담담한 문체로 읊어내려 간다
글에서 오는 대단한 서늘함을 이제는 어디에 가야 느낄 수 있을까

ㅡ 새벽까지 희미하게
전에,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원화 채색을 무한 반복하는 일을 한동안 했어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단순한 반복이 절 버티게 해주었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했어요.
그림 명상이라고나 할까.
색과 디자인이 어우러져 무한대에 가까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것.
색을 쓰는 방식. 글자로 감정을 표현하는 법.
실무적으로 배운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제가 그 일을 좋아한다는 걸 거기서 알게 되었죠.
젊다 우리는, 힘들고
아프고 많이 어렵다
영어 단어 수학 공식 따위를 줄줄 외고 납작한 종이에 끄적이다
갑자기 험한 곳에 내쫓긴다
굽이굽이 똥 뭍은 팬티를 찾아 나선 토끼 얘기를 뚱 하게는
시적 허용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혀 멀지 않고 또 뜬금없지도 않은 일이다
쓴 가시밭길을 걷는 송이는 정미경 소설가의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세상에 조금 험하고 조금 더 험한 길에 쫓긴 차이만
있을 뿐 송이는 주변 어디에도 있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던 달만큼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