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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ㅣ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심야식당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 검정
검정은 있다
세수를 하고 수건을 집어 들 때나 젖은 손으로
쌀을 씻을 때 갓 지은 밥을 풀 때
검정을 본다
수시로 고개를 드는 검정
방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다가가면 깜짝 놀래는 검정
너는 대체 누구니?
늦은 시각 들른 어느 상가에서 묻어온 것인지
제 몸만 한 개미를 지고 가던 개미인지 장지의 흙인지
손을 뻗어 잡으려 하면 이내 도망쳐버리는 검정
뜻 모를 이름의 벌레처럼 수많은 발을 달고서
나는 공연히 이불 밑이나 호주머니 속을 들춰보게 되고
비명을 지르게 되고
검정은 없지만, 분명
검정은 있다
밤이면 쓰다 만 일기 속에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인다
너는 대체 누구니?
버려야겠다 이 어두운 방을,
생각하지만
문을 열면 이내 성큼 따라나서는 검정
검정은 나를 입고 잠시 외출한다

/ 맴맴
그 여름의 숲에서 당신은 물었지
낯선 초록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물었지
왜 우는가
왜 너는 울어야만 하는가
짐짓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초록 속으로 초록 속으로 쉼 없이 걸어들어가고
당신은 물었지
세상 가장 근심 어린 얼굴로
왜 우는가
무엇이 너를 울게 하는가
나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신발도 가방도 놓고
초록을 한송이 꺾어 슬며시 주머니 속에 넣었지
오래오래 그것을 길러볼 요량으로
언젠가 한번은 당신을 초대할 요량으로
당신은 물었지
왜 우는가
왜 우는가
나는 그만 길을 잃고 싶었네, 무성한 초록 속에
당신을 오롯이 남겨두고
슬픈 일은 모두 사라져
시간이여,
이제 달려간대도 나를 싣고 저 멀리 가버린대도

< 한 사람의 닫힌 문 >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닫힌 문을 두드려 준다고 표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문이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는 표현을 했다.
시집을 열어 몇 자 읽어내려가다 더이상 하지 못하고 덮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속이 조금씩 아려오더니 버티지 못하게 했다.
그 닫힌 문의 한 사람이 나인 것 처럼.
덤덤한 어조로 위로라도 하듯 그렇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팠다 조금은.
굉장히 차분하고 덤덤한 어조로 말을 한다.
마치 본인에게 건네는 듯이, 본인을 억제하고 조절하고 그렇게 차분해지 듯이.
그리고 그걸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는 닫힌 문을 두드려 준다고 했지만
나는 바로 그 곳에, 그저 문이 있는 것만으로도 .. 하는 후자의 느낌이 더 강했다.
조금은 아프고 힘들 때,
책장에서 꺼내어 한 - 두 장만 읽고 내려놓게 될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이 시집을 들여다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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