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평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내 방 하나 - 비전향 장기수 7인의 유예된 삶
김선명 외 지음 / 창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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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책 서두에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 선생님(45년 복역)의 글을 읽으며 든 의문이었다.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우리가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실상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배운자와 배우지 못한자로 나뉘어 있고 그 삶은 후대까지 이어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독 사상과 이념만큼은 그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자본주의 사회에 그저 만족하고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선량한’서민들은 ‘편하게’ 살 수 있다. 적어도 어느날 갑자기 국정원에 끌려가거나 하는 일은 없다.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이념을 명토박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가난하건 부자건 가족과 주위 사람과 자기 자신이 크나큰 댓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장기수 선생님들에게는 이념이 가장 중요했던 거다.

하지만,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다른 사람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뜻밖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쳐죽여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단식도 하도 데모질하고 글도 쓰지만,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다. 밉지는 않다. 그저 뭘 몰라서 그러는 거려니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설상 아는데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설득이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기껏 가장 중요한 게 어디다 팔어먹지도 못하는 사상? 그것도 공산주의? 그런거냐고 이해못할 수 있다.
그래, 무시할 수도 있다. 인정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빨갱이는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박아두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멀쩡한 사람들을 죽창으로 쳐 죽이는 자들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거나 이다지도 괴롭힐 권리가 생기는 건가.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나.

울음같이 책장을 덮고 나니 선생님들의 그 오롯한 투쟁의 역사는 바로 어떻게 이념의 차이가 이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유예되고, 잊혀지는 형벌로 다가오는지 알려주는 현주소다.

이분들의 수기에는 한줄 한줄이 생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줄기다. 이 수기에는 한 문장에서 다른 한 문장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그저 일년도 되고, 십년도 되고, 사십년도 된다. 무심해보일 지경이다. 자신들의 일이라 그런가 왜 이리 덤덤한가. 그 생애를 살아냈으면 피눈물 뚝뚝 묻어나야지 왜 이리 초연한가. (화가 날정도로 초연하다.) 나 같았으면 쓰고 싶어서, 말하고 싶어서, 그 벌거벗겨진 영혼을 토로할 것이다. 거친 글과 말로. 그런데 이분들은 그저 덤덤하다. 오히려 한일도 없이 잡혀 제대로 일도 못하고 갇혀 지낸 세월이 안타까워한다.
진정 조국에 대한 사랑,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멸, 진정한 평등사회를 원하시는 분들이다.

이분들이 왜 그렇게 유예된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해서 ‘빨갱이’가 되었는지는 접어두기로 하자. 감옥에서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얼마나 낮은 것인지 알 수 있다. 대체, 감옥에 갇힌 사람은 인격이 없는가, 감정이 없는가,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이분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감옥에서의 인권유린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십대, 삼십대 한참 젊은 때 잡혀 들어가 출소할 당시 칠순이 넘고 아흔이 넘었다. 밖에서 투쟁했던 세월보다 더 긴 끝도 알 수 없이 길고 긴 갇힌 세월.
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젊은 시절 국보법과 집시법으로 잡혀 들어가서 몇 년 살고 나와 그걸 훈장으로 달고 국회입성에 기름진 얼굴이 된 그들과 감히 비교하랴.

음식을 먹는 것조차 최대한 굴욕을 느끼게 했던 그 비참한 현장. 식기도 없이 옷이나 신발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먹는 견딜 수 없는 치욕스런 끼니. 이분들에게는 끼니가 삶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삶을 끝낼만한 명분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들이 역사책에서 배운 현대사의 질곡이 이분들에게 얼마나 왜곡되어 드러났던가.
7.4남북공동선언은 마치 통일의 물꼬를 튼 위대한 작업처럼 비쳐졌었다. 적어도 밖에 있었던 나에겐....
그러나 이분들에게는 그대로 칼이 되었다.
그 허울좋은 껍데기에도 불구하고, 남북공동선언이 이분들에게 준 선물은 전향공작일 뿐이다. 어이없이 남쪽에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은 씨를 말리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그들은 칼을 맞았다. 이전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온 전향작업은 이제, 살인자 강간범 조직폭력배와 같은 범죄자들에게 가석방을 조건으로 전향작업을 시킴으로써 비인간적인 것으로 급격하게 야만의 과정을 밟는다. 가족이 있는 분들은 가족을 앞세워,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담보로 전향을 강요한다. 잔혹하게.
무차별적인 폭력앞에서 자살로 저항하기도 하고, 단식으로 저항하기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버틴다. 살아 있다는 것이 투쟁인 이분들의 삶.
육체의 죽음보다 정신의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삶.

왜 살아가냐고, 누가 알아준다고 그렇게 처절하게 살아가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들을 하셨을까.

사람은 누구나 살아갈 복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분들의 유예된 삶을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이분들이 비록 자신들이 그렇게 원하듯이 직접 조국통일을 위해, 노동자 해방을 위해 원없이 투쟁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자신의 삶을 바쳐 사상의 자유를 지켜낸 것만으로도, 그 투쟁과정에서 우리 인권의 현주소를 체험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육체에 가해지는 작은 고통도 견디질 못하는 내가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워지게 만들었고 또, 투쟁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면, 함께 투쟁하는 동료가 있다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분들도 만약 혼자였다면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외로움은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드는 사슬이다.

0.75평 작은 감방에 갇혀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제대로 운동을 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단식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투쟁이다. 하지만, 이 투쟁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제 급식이라는 처절한 대응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사지를 붙잡고 식도에 호스를 끼우고 음식물을 강제로 투입하는 것인데, 그 방법의 잔혹성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수치스러운 강제 급식을 겪은 후 자살하는 분도 계신 것은 당연하다. 고결한 정신을 가진 분에게 그런 식의 굴욕을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분들도 식도를 다치거나 위장을 다치거나 하는 여파를 남긴 잔인한 탄압.

이 책에 담긴 비전향장기수 선생님 일곱분 모두가 다른 형무소에서 그같은 일들을 공통적으로 겪으셨다. 감옥에서의 우리 인권은 어떤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후반 차례로 출소하신 선생들은 2000년 9월 북으로 송환되었다. 그 절절한 심정이야 어떨지 감히 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갇혀 계셨던 길고긴 세월동안

남쪽의 이 찌들은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바 없는 북녘의 비참한 현실을 선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다.

북은 이제 그분들이 계시던 시절의 사회주의 지향의 사회라기 보다는 일인독재의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가. 남도, 북도 내 조국이라고 모두가 말씀하셨는데... 남도 북도 모두 다 다른 형태로 삐뚤어져 있으니...

다만, 통일을 바라는 마음.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마음.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만이 이분들이 남긴 유산을 가치있게 빛내는 일일 것이란 생각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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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 합본
신영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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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해전 어떤 사람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민하던 내게 "머리 좋은 사람은 가슴 좋은 사람만 못하고, 가슴 좋은 사람은 손 좋은 사람보다 못하고, 손 좋은 사람은 발 좋은 사람보다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라며 이 글이 실린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추천해주었었다.

아껴 읽었던 그 극기와도 같은 삶의 진액을 맛보고 나서 신영복님의 모든 책들을 한꺼번에 구입했었다.
이 책은 그때 엽서, 나무야 나무야와 함께 구입한 1,2권 짜리 여행기다. 그때 회사로 배달되어온 커다란 택배 상자를 보고 뿌듯했던 기분은 사실 찰라와도 같았다.

사놓기만 하고 정작은 앞뒤 몇장만 읽고 쳐박아 놓았던 그 세월 동안 달라진 세계에 대한 인식 만큼이나 책을 읽는 감회가 남다르다.
사랑도 타이밍이 있듯,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도 어떤 시기,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취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책을 읽는데 있어 내가 가진 생각, 고민, 나를 둘러싼 상황, 시대, 그리고 읽고 있는 장소가 이다지 중요한지 왜 미쳐 몰랐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 읽었다면 그저, 나는 어떻게 느꼈을까, 그저 여행을 가고프다 하는 감상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지금 찾은, 더불어숲에서 말하는, 세계 각국 민중들의 삶은 진한 슬픔이 배어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절절한 생애의 처절함, 세계 여러 민중들 삶의 공통점, 각 나라의 '관광지'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특유의 통탈로 아우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내가 여행지에서 느낀 것은 그동안 무엇이었던가 되돌아보면, 비교할 수조차 없는 부끄러움이 엄습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각 여행지에 대한 각각 3~4장에 불과한 짧은 글들은 모두 명제와 그림을 남겨준다.
"관용은 자기와 다른 것,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입니다 -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정체성의 기본은 독립입니다 - 멕시코 국립대학"
"끊임없는 해방이 예술입니다 - 예술의 도시, 파리"
"우리는 누군가의 생(生)을 잇고 있으며 또 누군가의 생으로 이어집니다 - 보리수 그늘에서"
등 그저 한문장만으로도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
신영복님이 느낀 여행지에서의 경험, 그곳에서의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은 그저 이렇게 명제만으로도 충분하게 내 가슴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잉카제국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에 올라 잉카인들의 슬픔을 느끼며 떠올렸다는 바예흐의 그 한문장 "당신의 향기가 나의 뿌리를 타고 내가 들고 있는 술잔까지 올라온다"는 내내 가슴에 남는다.

이것이야말로 관계의 최고형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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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편저 / 개마고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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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지식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을 맨처음 품게 해준 것은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시리즈였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탐욕스레 식당문을 들어서는 부랑자처럼 대학도서관을 배회하던 새내기 시절 만났던 강준만이 준 충격은 얼마나 섬세하고 날카로웠던가.

리영희의 삶을 통해 강준만이 바라보는 한국 현대사인 이 책은 1929년 리영희 선생의 출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현대사를 살아가는 생생한 지식인의 면모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어떤 맥락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도 함께 던져준다.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 바로 행동인 지식인 리영희의 치열한 삶에 대한 경의뿐 아니라 리영희가 70~80년대 대학가에 준 영향, 그로 인한 리영희 부채의식 등이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한 개인의 삶이 주는 가치, 의미, 화두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훗날 리영희 평전이 나오더라도 이보다 성실하게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준만 특유의) 세밀한 자료조사와 관점이 녹아 있는 현대사 읽기는 새로움이 아닌 되새김이었지만, 거기에 스스로를 '60% 저널리스트, 40% 아카데미션'으로 지칭하는 '지식인' 리영희의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이 대입되자 지식인의 삶이 주는 고뇌, 무게감, 책임감, 고독을 느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용서'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관점이었다.
미국인들이 진주만을 폭격한 일본을, 유태인들이 독일을 용서한 것과 우리가 일본을 용서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주장.
많은 정치인들, 언론인들은 미국인과 유태인들이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대국적'이고 '포용적'인 관점을 따라서 일제 시대를 바라보고 일본을 용서하고 과거를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는데, 이에 대한 정면 반박인 셈이다.
미국인들과 유태인들은 강자이므로 용서할 여유가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약자중 약자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견.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과 친일파들을 용서해서도 잊어서도 안된다는 단호함을 역설하셨다.
나도 모르게 '주입받아온' 그 용서의 미학에 대한 철퇴같았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달 전쯤 신영복 선생이 말한 약한자의 용서와는 사뭇 색다른 의견이었다. 성찰을 강조하는 신영복 선생과 다른 개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는 여러 조명 중 각기 다른 방향에서 비추는 무대의 조명같은 지식인들의 고뇌라 생각한다.

리영희 선생이 존경하는 두 인물 백범 김구와 루쉰은 선생에게 등불이었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싸움에서 청년의 정신을 가지고 큰 걸음을 걸어가 따라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준 오롯함에 경건할 정도의 존경이 피어올랐다.
그동안 많이 아는 것, 깊이 아는 것, 남들과 다른 것을 보는 것, 미쳐 깨닫지 못한 사실을 깨닫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고 이런 지식인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뻤다.

현대사에 대해 지식인에 대해 리영희에 대해 현재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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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평전 -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
김성수 지음 / 삼인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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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이다지도 낙서를 많이 한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대개 사회과학,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 다시 기억하기 위해 줄을 치는 경우는 있어도 이 정도로 의문투성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의문의 시작은 이 책이 과연 평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 책이 이전에 읽었던 문익환 평전, 한국 현대사를 통해 본 리영희 등과는 매우 다른 사상의 괘적만을 따라가는 저작이었기 때문이다.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은 그 문체나 구성, 자료 조사면에서 책 한권만으로도 문익환 목사님의 생애 뿐 아니라 흔적들을 비교적 면밀히 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은 함석헌에 대한 '최초의' '박사논문'으로 보자면 어쩌면 상당히 뛰어난 것일지 모르겠으나 평전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우선 책 한권으로 인물의 일대기, 앞서 가는 자의 애환, 가족사, 동지, 사상, 인물이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통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 훌륭한 평전이라 생각한다.
물론 담으려고 하는 것이 많을 수록 내용이 부실해질 수도 있으며, 그와 함께 자칫 다루는 인물에 대한 초점이 흐려질 수도 있다.

함석헌이 퀘이커교도라는 것, 한국의 간디로 불리는 사상가였다는 것, 기독교의 이단아였다는 것,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창간한 언론인이며 장준하 선생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함석헌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사놓기만 하고 뒤적거렸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상태였기 때문에 평전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의 퀘이커교 발달사나 한국 기독교와 퀘이커교 등으로 이름붙였으면 더욱 적당했을 것 같다.
이를 통해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가지는 허상을 깨닫게 된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도 어느정도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도이니까.

기독교, 불교, 도덕경을 아우르는 사상체계를 구축했던 함석헌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기독교가 갖는 배타주의에서 벗어나 씨알이 곧 하느님이다, 고 역설한 함석헌의 주장은 지금에 이르러 (적어도 나에게는) 신선하고, 이단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 거의 모든 평전에서 발견했고, 여지없이 함석헌에게도 드러난 '진정한 지식인'의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묵도하면서 진정 가족이라는 것이 뛰어난 이들에게는 굴레일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함석헌은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의 가족 또한 진정한 버팀목일 수도 있겠다 하는 두가지 생각을 했다.

"진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 그래서 시간이나 공간의 벽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고정 관념을 깨는 탄력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기도는 말이나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살림으로 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 예수"
"한국의 민주화는 결국 함석헌의 도덕률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기독교인을 삼위 일체론이나 속죄론, 육체 부활론 등의 교리를 타인에게 주장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정신을 이어 '지금 여기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 정의나 이타주의에 입각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기독교, 믿음, 도덕, 삶에 대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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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 장준하전집 1
장준하 지음 / 세계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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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에 대한 통념을 깨버렸다.
장준하 선생이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해방후 조국에 돌아오기까지 2년여의 과정을 담은 이 자서전을 읽으며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에 순종하기 원하는 자의 참된 고뇌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더불어 우익과 보수에 대한 생각도 했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 우익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조선일보와 더불어 생각하게 되는 무조건적인 진보진영 때리기나, 수구, 극우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은 인정하지 않는 사상적 편향이 얼마나 가치없고 무서운 일인가를 알게해준다. 또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기득권이라 할 때 조국의 미래가 참으로 어둡다는 것을 말이다.

장준하 선생은 내가 존경하는 그 어떤 분보다 바른 삶을 사셨고, 진정 사상에 있어 개방적인 분으로 '우익이면서도 반체제 운동'을 하셨다. 박정희 정권 때 사상계를 통해 유신정권의 부당성을 설파하신 용기를 보라. 그분의 글을 읽으면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항목을 매겨 따져놓아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무릇 지식인이란, 언론인이란 이렇게 글을 써야 한다는 표본도 제시해 놓고 계신 것이다.

자서전 돌베개는 탈출에서 시작한다. 생생한 기록과 그 순간 순간 박진감 넘치는 내용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긴장하게 한다. 스물 네살에 불과한 당시 청년이 가졌던 기개, 조국에 대한 사랑과 확신,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당당함,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른 그리스도 인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내 환경과 비교해서 더욱 속속들이 환기가 된다. 내 용기 없음, 무지함, 오만과 그 당시 선생이 겪었던 견디기 힘든 상황, 결단, 판단력, 추진력 등과 비교해서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우여곡절을 겪어 군사학교에 들어가고 그곳을 수료한 후 다시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임정에 찾아가 보았던 그 실망스러운 분쟁들과 그에 대한 피끓는 분노. 진정 착하고 선한자만이 분노할 수 있는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선생은 분노했고 그만한 자격이 있었다. 순수하고 빚이 없기 때문이다.

임정에서 다시 군관학교에 들어가 가진 것을 모두 불태우고 조국 해방을 위해 진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는데, 출격 며칠 전에 어이없이 해방이 되자 허탈감에 빠지지만 곧 마음을 추스린다. 선생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흩트러지지 않는 모습은 당시 나이에 작은 혼란에도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가를 반성하게 한다.

조국에 돌아왔지만, 미군정체제이고 임정 인사들은 호텔에 머물면서 그저 인터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선생은 김구 선생을 보필하면서 당시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한다. 분명 좌익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한 일에 대한 평가를 잊지는 않는다. 해방된 조국에서 곧바로 찾아가고 싶은 것이 가족일터인데도 가족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리워할 뿐이다.
무릇 큰일을 하는 자라 다르긴하다... 난 죽었다깨어나도 그렇게 못할 것이다.

야곱이 광야에서 베었던 돌배게를 배는 심정으로 이 모든 고난을 자초한 선생의 각오와 삶이 알알이 담겨 있는 이 책은 내게 다시 읽어도 소중한 마음의 의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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