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편저 / 개마고원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모름지기 지식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을 맨처음 품게 해준 것은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시리즈였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탐욕스레 식당문을 들어서는 부랑자처럼 대학도서관을 배회하던 새내기 시절 만났던 강준만이 준 충격은 얼마나 섬세하고 날카로웠던가.

리영희의 삶을 통해 강준만이 바라보는 한국 현대사인 이 책은 1929년 리영희 선생의 출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현대사를 살아가는 생생한 지식인의 면모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어떤 맥락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도 함께 던져준다.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 바로 행동인 지식인 리영희의 치열한 삶에 대한 경의뿐 아니라 리영희가 70~80년대 대학가에 준 영향, 그로 인한 리영희 부채의식 등이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한 개인의 삶이 주는 가치, 의미, 화두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훗날 리영희 평전이 나오더라도 이보다 성실하게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준만 특유의) 세밀한 자료조사와 관점이 녹아 있는 현대사 읽기는 새로움이 아닌 되새김이었지만, 거기에 스스로를 '60% 저널리스트, 40% 아카데미션'으로 지칭하는 '지식인' 리영희의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이 대입되자 지식인의 삶이 주는 고뇌, 무게감, 책임감, 고독을 느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용서'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관점이었다.
미국인들이 진주만을 폭격한 일본을, 유태인들이 독일을 용서한 것과 우리가 일본을 용서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주장.
많은 정치인들, 언론인들은 미국인과 유태인들이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대국적'이고 '포용적'인 관점을 따라서 일제 시대를 바라보고 일본을 용서하고 과거를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는데, 이에 대한 정면 반박인 셈이다.
미국인들과 유태인들은 강자이므로 용서할 여유가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약자중 약자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견.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과 친일파들을 용서해서도 잊어서도 안된다는 단호함을 역설하셨다.
나도 모르게 '주입받아온' 그 용서의 미학에 대한 철퇴같았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달 전쯤 신영복 선생이 말한 약한자의 용서와는 사뭇 색다른 의견이었다. 성찰을 강조하는 신영복 선생과 다른 개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는 여러 조명 중 각기 다른 방향에서 비추는 무대의 조명같은 지식인들의 고뇌라 생각한다.

리영희 선생이 존경하는 두 인물 백범 김구와 루쉰은 선생에게 등불이었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싸움에서 청년의 정신을 가지고 큰 걸음을 걸어가 따라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준 오롯함에 경건할 정도의 존경이 피어올랐다.
그동안 많이 아는 것, 깊이 아는 것, 남들과 다른 것을 보는 것, 미쳐 깨닫지 못한 사실을 깨닫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고 이런 지식인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뻤다.

현대사에 대해 지식인에 대해 리영희에 대해 현재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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