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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 합본
신영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해전 어떤 사람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민하던 내게 "머리 좋은 사람은 가슴 좋은 사람만 못하고, 가슴 좋은 사람은 손 좋은 사람보다 못하고, 손 좋은 사람은 발 좋은 사람보다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라며 이 글이 실린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추천해주었었다.
아껴 읽었던 그 극기와도 같은 삶의 진액을 맛보고 나서 신영복님의 모든 책들을 한꺼번에 구입했었다.
이 책은 그때 엽서, 나무야 나무야와 함께 구입한 1,2권 짜리 여행기다. 그때 회사로 배달되어온 커다란 택배 상자를 보고 뿌듯했던 기분은 사실 찰라와도 같았다.
사놓기만 하고 정작은 앞뒤 몇장만 읽고 쳐박아 놓았던 그 세월 동안 달라진 세계에 대한 인식 만큼이나 책을 읽는 감회가 남다르다.
사랑도 타이밍이 있듯,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도 어떤 시기,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취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책을 읽는데 있어 내가 가진 생각, 고민, 나를 둘러싼 상황, 시대, 그리고 읽고 있는 장소가 이다지 중요한지 왜 미쳐 몰랐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 읽었다면 그저, 나는 어떻게 느꼈을까, 그저 여행을 가고프다 하는 감상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지금 찾은, 더불어숲에서 말하는, 세계 각국 민중들의 삶은 진한 슬픔이 배어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절절한 생애의 처절함, 세계 여러 민중들 삶의 공통점, 각 나라의 '관광지'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특유의 통탈로 아우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내가 여행지에서 느낀 것은 그동안 무엇이었던가 되돌아보면, 비교할 수조차 없는 부끄러움이 엄습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각 여행지에 대한 각각 3~4장에 불과한 짧은 글들은 모두 명제와 그림을 남겨준다.
"관용은 자기와 다른 것,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입니다 -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정체성의 기본은 독립입니다 - 멕시코 국립대학"
"끊임없는 해방이 예술입니다 - 예술의 도시, 파리"
"우리는 누군가의 생(生)을 잇고 있으며 또 누군가의 생으로 이어집니다 - 보리수 그늘에서"
등 그저 한문장만으로도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
신영복님이 느낀 여행지에서의 경험, 그곳에서의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은 그저 이렇게 명제만으로도 충분하게 내 가슴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잉카제국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에 올라 잉카인들의 슬픔을 느끼며 떠올렸다는 바예흐의 그 한문장 "당신의 향기가 나의 뿌리를 타고 내가 들고 있는 술잔까지 올라온다"는 내내 가슴에 남는다.
이것이야말로 관계의 최고형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