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VS 사람 - 정혜신의 심리평전 2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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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에게 있어 저자 정혜신 박사는 탄핵때부터 '발견'된 사람이다.
그때 "국민을 탄핵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국회의원들을 향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던가. 통쾌했었다.

책을 산 이유는 심은하 때문이었는데, 심은하에 대한 구구한 소문들과 가십성 기사 외에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사실 '심은하 쟁이'로서 반갑고 기쁜일이다.

저자는 심은하는 내면화된 사람이어서 현직에 있을때 조차 그렇게도 인터뷰를 사양했던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외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흡사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을 읽는 듯하다.
문체는 유려하고 문장은 생생하며 비유는 적절하다.
무엇보다 인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도가 좋았다.
저자가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사람은 그전에도 그랬지만 더욱 더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긍정적으로 바라본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물론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을 나누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내면의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는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매력을 느끼거나 아닐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건 아닐까.

나는 저자가 써내려간 '심리평전'에 대부분 수긍하면서 그들의 '그런 그'를 만든 각각의 가치관(뭐라고 불러야 할지...)을 배웠다.
박찬욱에게는 부감식 사고(타워크레인 시점)를
이창동에게는 심리적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는 치열함을, 그리고 진성한 소통을 위해서라면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의지를
문성근에게서는 자기혐오를 극복하며 얻은 힘을
김근태에게서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한결같음을
나훈아에게서는 신체적 건강에서 나오는 당당함을
김중배에게서는 부끄러움의 '미학'과 힘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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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반레 지음, 하재홍 옮김 / 실천문학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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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반레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방현석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였다.
그런 사전정보가 아니더라도 전장에 대한 감상 없는 묘사는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통찰이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세세하고 치열한 기억력. 
많이, 세밀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오래 아플 수 밖에 없는데... 작가의 고통이 어떨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전장에서 눈뜨고 뼈와 살같은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글을 쓴 것은 참으로 서럽고 슬픈 깨달음이었는데, 그렇게도 담담해보이는 글쓰기라니 더욱 말이다.

작가 방현석은 베트남 '여행기' <하노이에 별이 뜨다>에서도 반레 시인의 삶에 대해, 베트남전에 대해 말해주었었다.
최강대국 미국을, 그 많은 전쟁에서 한번도 지지 않은 미국이 '미개한' 나라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패배를 한 이유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승리의 진정성을 말이다.

반레 소설은 의외성이 빛난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10년간 전장에 몸을 담고 있었던 용사로서 가질법한 무용담 따위는 전혀 없다.
해방전선의 숭고함에 대한 그 어떤 장황한 설교도 없다.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인민의 고통에 대한 애닯음, 베트남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 '문화'의 맥을 이어가려는 순박함, 모든 삶의 궁극인 사랑, 그리고 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안에서 주인공 빈 상사는 연인 캄이 죽자, 분노에 치달아 적을 쏘아 죽이다가 자신도 총에 맞아 황천길에 오르고만다.
죽은 빈 상사가 회상하는 전쟁터에서 혹시 따이한을 만날까봐 두근두근했다.
'다행히' 초토화된 마을을 만날 때마다 반레는 그저 '적'의 공격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 부채의식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주의에 대한 어떤 비난도 없다.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저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미군이 얼마나 잔인한지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쉬운 선택을 반레는 비켜간다. 어떤 선정성도 소설에는 없다. 심심할 정도로.
베트남 인민은 명예보다는 정의를 정의보다는 삶을 위해 해방전선에 뛰어든 것 뿐이다. 그 대상이 미제라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전쟁 자체에 대한 분노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주었다.

베트남 군대에서도 비열한 자식은 있고, 관료주의에 대한 역겨움을 토하는 이들도 있고, 그저 그런 정치국원도 있고,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는 대원들도 있고, 유난히 순진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이들이 어떻게 뭉치고,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희생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이런 작가의 선택으로 인해 헐리웃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영화가 얼마나 비열한지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황천강을 건널 노잣돈이 없어 강주변을 맴돌던 빈 상사는 결국,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의 죽을 먹지 않기로 결심한다.
잊지 않기로 결심한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극심한 고통을 주는데도, 모두가 선택하는 환생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하기로 결심한다.

그 슬픈 선택은 어쩌면,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세대가 전후 세대에게 남긴 과제이자, 베트남에 씻을 수 없는 죄를 남겨 놓았던 우리에게 남겨진 몫을 말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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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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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 코소보, 버마, 라오스,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를 비롯한 40여 분쟁지역을 방탄조끼 하나 없이 맨몸으로 누빈 전선기자 정문태가 본 비열하고 더러운 전쟁 이야기가 담기어 있다.

처음 정문태 기자를 만난 것은 일년전쯤 한겨레21 10주년 기념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강좌에서 였다.
그때까지만해도 전쟁취재하는 기자를 서슴없이 '종군기자'로 불러왔던 내개 '전선기자'라는 새로운 명칭과 함께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전쟁의 잔혹함, 그안에 숨어 있는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을 던져주었다.
무엇보다 외모만으로는 냉소적인 인텔리로 보이는 그가 수많은 전쟁터를 가장 많이 뛴 기자 중 하나라는 사실은, 평화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방법, 전쟁없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이렇게 짙고 독특하고 어렵게 표현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말로만 평화를 떠드는 내 부끄러운 자아도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기억 때문에 책이 나오자마자 주문했는데, 다른 책들에 밀려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 안타깝다.
좀 더 긴 기간, 알아야 할 것들을 '덜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버마에서 만난 학생군에 대한 애정, 팔레스타인에서 겪은 어린이들과 기자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비열하고 더럽고 조직적인 학살, 라오스에서 벌인 미국의 '끝나지 않는' 비밀전쟁의 실태를 본 충격, 동티모르에서 기사 송고를 핑계로 현장을 떠났다는 이유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 찬란하고 순결한 기자적, 인간적 양심을 보았다.

그는 말한다.
기자의 중립성에 대해.
"나는 이렇게 믿어 왔다. 예컨데, 한국전쟁에서 우리 전선기자들이 승리만 전하는 '전령사'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하여 군대를 치열하게 감시했더라면 적어도 그 많은 양민학살 가운데 일부는 줄일 수 있었다고.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전선기자들이 군대를 따르는 '종군기자'이기를 거부했더라면, 하여 전쟁 본질을 치밀하게 파헤쳤더라면 적어도 한국 젊은이들이 남의 해방전쟁에 뛰어들어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전선기자들이 국적, 민족, 인종, 종교, 정파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그 직업적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에 철저하고 기자 정신에 엄격하고, 인간적으로 따뜻한 한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일었다. 정문태 기자,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애정이 책을 절반도 읽기 전부터 솟아 올랐다.
자신의 일이 한사람을 살릴 수 있고 또,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치열한 삶이 책장 갈피갈피에 담기어 있었다.

다른 난민촌과는 질적으로 다른 코소보 (알바니아 계통) 난민들을 보면서 느낀 박탈감에 대한 이야기도 눈을 넓혀주는 데 일조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알바니아에 난민으로 온 사람들이 더욱 윤택한 생활을 함으로써 '자원봉사자'에게 준 자괴감과 강대국들의 장난질이라니...
어이없고, 화가나고, 놀라웠다.

여성 전사들이 생리문제로 전장에서 빠져 나가는 문제, 익히 미국의 개입을 알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문제 외에도 정문태 기자가 밟은 거의 모든 전장에는 미국의 입김, 미국의 검은손이 뻗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철저히 자본주의, 서양위주의 세계 판도, 미제국주의의 횡포, 패권이 이땅의 얼마나 많은 민중들에게 피맺힌 어두움을 안겨주었는지 기자, 정문태는 말하고 있었다. 우리 안의 나도 모르게 판박히게 알고 있는 그 관념이 한 사람, 한 민중이 죽어가는 것을 외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각을 알려주어… 모르고 지냈던 시절이 두려울 정도로 부끄러웠다.

다소 과격한 '남성적'언어로 느껴지는 속어의 사용은 그때, 그곳에서, 현재, 여기에서 느끼는 비애를 처절하게 느끼게 해준다.
훌륭한 기자는 또 실력있는 글쟁이여야 하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맛깔나는 문체도 전쟁 이야기라면 치떨며 싫어하는 내게도 착착 다가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내용임에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행동하는 지성인다운 살아 펄덕거리는 글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정문태 기자와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고 전선위의 총알을 보고, 죽은 아이를 보고 절망했다.

문장안에서 눈에 거슬리는 외래어 찌꺼기는 볼 수 없었고 바로쓰는 우리말의 전형을 보는 듯 깔끔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문장, 문체에서 제대로 된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은 껄끄럽게 마련이다.

숙고하여 쓰여지고, 세밀하게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슬람>, <타인의 고통>이 떠올랐는데.... 이 책들과 함께 다시 한번 읽어보면 세계를 이해하고, 어디에 눈을 돌려야 하는지, 그리고 아파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더욱 깊게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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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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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마치 전쟁 사진 작가 작품이나 저널리즘 사진을 볼 때 빠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함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하지만, 사진을 볼때 또 그를 통한 '타인의 고통'을 볼때 보다 '도덕적'인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져주는 화두였다.
그러니까 사진에 대해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일종의 이중적 태도를 취하면서 내가(혹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선정성과 도덕적 결함에 대해 통찰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각장의 주제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던 이유로 편집(혹은 저작 자체가)이 불성실하다고 생각했었더랬다.
우선, 전쟁사진을 중심으로 그것을 '보는' 우리에 대한 비판인듯 하면서도 사실은 그저 현상을 통찰하는 데 그친다.
9개 각 장의 내용이 서로 겹치는 것도 있고 앞의 장 내용과 연계되는 것도 있으면서도 또 독특한 주제를 담고 있어서 저자의 의도를 쉽게 나눠(장마다)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었다.
저자가 하루 아침에 '휘리릭' 쓴 책 같기도 하고, 이곳 저곳에 썼던 글들을 모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책의 구성이 나같이 한때 편집자였던 사람에게 다소나마 불성실하게 보였던 이유는 책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현대인의 단편성이나 짧은 기억력 등에 대한 나름의 경종이 아닐까 싶다.
사실, 지나치게 친절한 책은 사람을 지나치게 게으르게 만들어버린다.
책은 클릭 한번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 수 있는 네이버도 아니고, 버튼 한번 꾹 누른다고 금세 다른 세상에 빠질 수 있는 TV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 정도 편리성을 제거해버린 것은 과연 숙고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
따로, 또, 나름대로, 열심히 기억하는 것보다는 사색하고 느끼는 것보다는 성찰하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에서는.

사지가 잘려나가는 잔혹함에 대해 호기심과 동시에 관음증을 갖고 있는 우리 사고 체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프로이트의 주장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이용한 사진 저널리즘의 함의를 뚫고 우리가 보아야 하고 사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관점을 제시하면서 작가는 이런 의문을 제시한다.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현실이 언론을 통해 1회성 뉴스로 소비되는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언론이나 사진작가들은 이런 고통은 알리기 위해(양심적인 사진 작가들의 경우에는 언론이나 인간이 갖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매혹은 차지하고) 계속해서 이런 사진들을 찍어 보인다는 것은 점점 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다만, 남을 쉽게 연민하지 않는 자기 성찰만이 타인의 고통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사유의 건더기를 남겨 놓는다. 이것은, 얼마나 도덕적인 결론인지 모르겠다.

사진을 볼때 연민을 느끼는 것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도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통찰을 던진다. 그러니까 기아나 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인민(작가가 쓴 표현은 아니다)들은 대개 유럽이나 미국과는 아주 먼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인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는 특별한 위치에서 이 불쌍하기 그지없는 난민들을 싸구려 감정 소비에 대한 비판!

결국 이렇게 말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사진 저널리즘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생을 바라보는데 있어서도.

그리고 내 안에 머무르고 있었던, 위선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전쟁에 반대하지만,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닌 저자의 생각에는 물론 의문이 들 수 있다. 평화로운 전쟁이나 정의로운 전쟁이나 혹은 삶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은유가 아닌 이상(이것은 저자가 911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 행정부에 대해 비판한 것과 맞닿아 있다.)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독재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혁명을 위해, 인종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나는 전쟁에도 고통을 겪는 인민이 있지 않을까. 평화주의자라는 것이 이런 경우에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러니까 혁명이라는 것은 나같이 소심한 사람에게는 그저 수동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타인의 고통>외에 실려 있는 2002년, 2001년, 2000년, 1999년에 발표한 짧은 칼럼과 연설문 등은 이 치열하고 비판적인 작가가 생각하는 작가 정신(및 문학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지난해 12월, 수잔 손택은 세상을 떠났지만 남겨 놓은 작품을 읽지 않을 이유가 내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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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52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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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읽은 시기, 현재는 매우 시의적절 또는 매우 부적절하다. 내 스스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왜 이다지도 보수적인 것일까, 아니 보수적이나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것일까. 어떻게 단지, 낙태를 반대한다고 해서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한다고 해서 동성애자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의 부시 같은 깡패를 찬양할 수가 있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공연하게 가장 잔혹하게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기독교도들이라는 자들이 찬양할 수가 있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착하기만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듯, 단지 낙태, 동성애 반대 등의 정책이 그 모든 죄악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도 없지 않은가...

소설이 주는 서정성, 낭만, 현실안주 또는 현실회피 등이 어느 때에는 신물이 날 때가 있다. 하지만, 소설이 갖는 막강한 힘도 모르지 않는다. 그 힘을 확인한 소설이 바로 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미국 부르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는 고향이 북한의 황해도다. 고향방문단 사업으로 교향인 찬샘골에 다녀오려는 그는 미국에 건너온 형 류요한 장로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회개를 권고한다. 회개는 없다, 난 할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하는 형은 떠나기 사흘전에 갑자기 죽고, 형이 이전에 보았다는 헛것(귀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형의 헛것과 함께.
그리고 시작된 황해도에서 일어난 처절한 살육. 그저 죽고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잔혹한 현장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류요한 목사의 여행길과 함께 재현된다. 헛것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결국 형이 북에 버리고 왔던 조카와 형수가 제사를 지내주고, 거기서 받은 속옷을 불태워 그 현장에 뭍어주는 것으로 끝이난다.

그러나, 과연 끝난 것인가. 그렇게 해서 그들의 영혼은 한을 풀었는가. 왜 우리는 이런 비극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기독교인들은 모조리 미국측에 붙었고, 대부분 밥술깨나 먹는 사람들이며, 당에 가입한 사람들은 가난한 소작농이거나 남의집 머슴들이다.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고, ┰봐聆퓔?몰랐을 때 그들은 그럼에도 한 이웃 사람으로 서로를 일으켜주며 함께 살았다. 그러나, 이 손님들로 인해 서로가 죽일 듯이 미워하게 되었던 현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미국이라는 손님이 가장 무서운 나라.

신기하게도(!) 기독교인이면서 당원인 류목사의 외삼촌만이 이 살육의 현장에서 온전히 살아남아 지금까지 기도하며 당원으로 잘 살고 있다. 그것이 작가가 말해주는 해답인 것인가. 왜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리하여 서로 반동이라고,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싸우고 있는가.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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