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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ㅣ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마치 전쟁 사진 작가 작품이나 저널리즘 사진을 볼 때 빠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함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하지만, 사진을 볼때 또 그를 통한 '타인의 고통'을 볼때 보다 '도덕적'인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져주는 화두였다.
그러니까 사진에 대해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일종의 이중적 태도를 취하면서 내가(혹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선정성과 도덕적 결함에 대해 통찰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각장의 주제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던 이유로 편집(혹은 저작 자체가)이 불성실하다고 생각했었더랬다.
우선, 전쟁사진을 중심으로 그것을 '보는' 우리에 대한 비판인듯 하면서도 사실은 그저 현상을 통찰하는 데 그친다.
9개 각 장의 내용이 서로 겹치는 것도 있고 앞의 장 내용과 연계되는 것도 있으면서도 또 독특한 주제를 담고 있어서 저자의 의도를 쉽게 나눠(장마다)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었다.
저자가 하루 아침에 '휘리릭' 쓴 책 같기도 하고, 이곳 저곳에 썼던 글들을 모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책의 구성이 나같이 한때 편집자였던 사람에게 다소나마 불성실하게 보였던 이유는 책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현대인의 단편성이나 짧은 기억력 등에 대한 나름의 경종이 아닐까 싶다.
사실, 지나치게 친절한 책은 사람을 지나치게 게으르게 만들어버린다.
책은 클릭 한번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 수 있는 네이버도 아니고, 버튼 한번 꾹 누른다고 금세 다른 세상에 빠질 수 있는 TV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 정도 편리성을 제거해버린 것은 과연 숙고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
따로, 또, 나름대로, 열심히 기억하는 것보다는 사색하고 느끼는 것보다는 성찰하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에서는.
사지가 잘려나가는 잔혹함에 대해 호기심과 동시에 관음증을 갖고 있는 우리 사고 체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프로이트의 주장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이용한 사진 저널리즘의 함의를 뚫고 우리가 보아야 하고 사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관점을 제시하면서 작가는 이런 의문을 제시한다.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현실이 언론을 통해 1회성 뉴스로 소비되는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언론이나 사진작가들은 이런 고통은 알리기 위해(양심적인 사진 작가들의 경우에는 언론이나 인간이 갖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매혹은 차지하고) 계속해서 이런 사진들을 찍어 보인다는 것은 점점 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다만, 남을 쉽게 연민하지 않는 자기 성찰만이 타인의 고통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사유의 건더기를 남겨 놓는다. 이것은, 얼마나 도덕적인 결론인지 모르겠다.
사진을 볼때 연민을 느끼는 것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도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통찰을 던진다. 그러니까 기아나 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인민(작가가 쓴 표현은 아니다)들은 대개 유럽이나 미국과는 아주 먼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인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는 특별한 위치에서 이 불쌍하기 그지없는 난민들을 싸구려 감정 소비에 대한 비판!
결국 이렇게 말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사진 저널리즘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생을 바라보는데 있어서도.
그리고 내 안에 머무르고 있었던, 위선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전쟁에 반대하지만,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닌 저자의 생각에는 물론 의문이 들 수 있다. 평화로운 전쟁이나 정의로운 전쟁이나 혹은 삶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은유가 아닌 이상(이것은 저자가 911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 행정부에 대해 비판한 것과 맞닿아 있다.)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독재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혁명을 위해, 인종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나는 전쟁에도 고통을 겪는 인민이 있지 않을까. 평화주의자라는 것이 이런 경우에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러니까 혁명이라는 것은 나같이 소심한 사람에게는 그저 수동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타인의 고통>외에 실려 있는 2002년, 2001년, 2000년, 1999년에 발표한 짧은 칼럼과 연설문 등은 이 치열하고 비판적인 작가가 생각하는 작가 정신(및 문학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지난해 12월, 수잔 손택은 세상을 떠났지만 남겨 놓은 작품을 읽지 않을 이유가 내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