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체, 코소보, 버마, 라오스,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를 비롯한 40여 분쟁지역을 방탄조끼 하나 없이 맨몸으로 누빈 전선기자 정문태가 본 비열하고 더러운 전쟁 이야기가 담기어 있다.

처음 정문태 기자를 만난 것은 일년전쯤 한겨레21 10주년 기념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강좌에서 였다.
그때까지만해도 전쟁취재하는 기자를 서슴없이 '종군기자'로 불러왔던 내개 '전선기자'라는 새로운 명칭과 함께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전쟁의 잔혹함, 그안에 숨어 있는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을 던져주었다.
무엇보다 외모만으로는 냉소적인 인텔리로 보이는 그가 수많은 전쟁터를 가장 많이 뛴 기자 중 하나라는 사실은, 평화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방법, 전쟁없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이렇게 짙고 독특하고 어렵게 표현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말로만 평화를 떠드는 내 부끄러운 자아도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기억 때문에 책이 나오자마자 주문했는데, 다른 책들에 밀려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 안타깝다.
좀 더 긴 기간, 알아야 할 것들을 '덜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버마에서 만난 학생군에 대한 애정, 팔레스타인에서 겪은 어린이들과 기자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비열하고 더럽고 조직적인 학살, 라오스에서 벌인 미국의 '끝나지 않는' 비밀전쟁의 실태를 본 충격, 동티모르에서 기사 송고를 핑계로 현장을 떠났다는 이유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 찬란하고 순결한 기자적, 인간적 양심을 보았다.

그는 말한다.
기자의 중립성에 대해.
"나는 이렇게 믿어 왔다. 예컨데, 한국전쟁에서 우리 전선기자들이 승리만 전하는 '전령사'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하여 군대를 치열하게 감시했더라면 적어도 그 많은 양민학살 가운데 일부는 줄일 수 있었다고.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전선기자들이 군대를 따르는 '종군기자'이기를 거부했더라면, 하여 전쟁 본질을 치밀하게 파헤쳤더라면 적어도 한국 젊은이들이 남의 해방전쟁에 뛰어들어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전선기자들이 국적, 민족, 인종, 종교, 정파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그 직업적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에 철저하고 기자 정신에 엄격하고, 인간적으로 따뜻한 한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일었다. 정문태 기자,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애정이 책을 절반도 읽기 전부터 솟아 올랐다.
자신의 일이 한사람을 살릴 수 있고 또,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치열한 삶이 책장 갈피갈피에 담기어 있었다.

다른 난민촌과는 질적으로 다른 코소보 (알바니아 계통) 난민들을 보면서 느낀 박탈감에 대한 이야기도 눈을 넓혀주는 데 일조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알바니아에 난민으로 온 사람들이 더욱 윤택한 생활을 함으로써 '자원봉사자'에게 준 자괴감과 강대국들의 장난질이라니...
어이없고, 화가나고, 놀라웠다.

여성 전사들이 생리문제로 전장에서 빠져 나가는 문제, 익히 미국의 개입을 알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문제 외에도 정문태 기자가 밟은 거의 모든 전장에는 미국의 입김, 미국의 검은손이 뻗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철저히 자본주의, 서양위주의 세계 판도, 미제국주의의 횡포, 패권이 이땅의 얼마나 많은 민중들에게 피맺힌 어두움을 안겨주었는지 기자, 정문태는 말하고 있었다. 우리 안의 나도 모르게 판박히게 알고 있는 그 관념이 한 사람, 한 민중이 죽어가는 것을 외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각을 알려주어… 모르고 지냈던 시절이 두려울 정도로 부끄러웠다.

다소 과격한 '남성적'언어로 느껴지는 속어의 사용은 그때, 그곳에서, 현재, 여기에서 느끼는 비애를 처절하게 느끼게 해준다.
훌륭한 기자는 또 실력있는 글쟁이여야 하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맛깔나는 문체도 전쟁 이야기라면 치떨며 싫어하는 내게도 착착 다가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내용임에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행동하는 지성인다운 살아 펄덕거리는 글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정문태 기자와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고 전선위의 총알을 보고, 죽은 아이를 보고 절망했다.

문장안에서 눈에 거슬리는 외래어 찌꺼기는 볼 수 없었고 바로쓰는 우리말의 전형을 보는 듯 깔끔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문장, 문체에서 제대로 된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은 껄끄럽게 마련이다.

숙고하여 쓰여지고, 세밀하게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슬람>, <타인의 고통>이 떠올랐는데.... 이 책들과 함께 다시 한번 읽어보면 세계를 이해하고, 어디에 눈을 돌려야 하는지, 그리고 아파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더욱 깊게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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