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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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읽은 시기, 현재는 매우 시의적절 또는 매우 부적절하다. 내 스스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왜 이다지도 보수적인 것일까, 아니 보수적이나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것일까. 어떻게 단지, 낙태를 반대한다고 해서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한다고 해서 동성애자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의 부시 같은 깡패를 찬양할 수가 있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공연하게 가장 잔혹하게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기독교도들이라는 자들이 찬양할 수가 있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착하기만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듯, 단지 낙태, 동성애 반대 등의 정책이 그 모든 죄악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도 없지 않은가...

소설이 주는 서정성, 낭만, 현실안주 또는 현실회피 등이 어느 때에는 신물이 날 때가 있다. 하지만, 소설이 갖는 막강한 힘도 모르지 않는다. 그 힘을 확인한 소설이 바로 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미국 부르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는 고향이 북한의 황해도다. 고향방문단 사업으로 교향인 찬샘골에 다녀오려는 그는 미국에 건너온 형 류요한 장로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회개를 권고한다. 회개는 없다, 난 할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하는 형은 떠나기 사흘전에 갑자기 죽고, 형이 이전에 보았다는 헛것(귀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형의 헛것과 함께.
그리고 시작된 황해도에서 일어난 처절한 살육. 그저 죽고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잔혹한 현장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류요한 목사의 여행길과 함께 재현된다. 헛것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결국 형이 북에 버리고 왔던 조카와 형수가 제사를 지내주고, 거기서 받은 속옷을 불태워 그 현장에 뭍어주는 것으로 끝이난다.

그러나, 과연 끝난 것인가. 그렇게 해서 그들의 영혼은 한을 풀었는가. 왜 우리는 이런 비극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기독교인들은 모조리 미국측에 붙었고, 대부분 밥술깨나 먹는 사람들이며, 당에 가입한 사람들은 가난한 소작농이거나 남의집 머슴들이다.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고, ┰봐聆퓔?몰랐을 때 그들은 그럼에도 한 이웃 사람으로 서로를 일으켜주며 함께 살았다. 그러나, 이 손님들로 인해 서로가 죽일 듯이 미워하게 되었던 현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미국이라는 손님이 가장 무서운 나라.

신기하게도(!) 기독교인이면서 당원인 류목사의 외삼촌만이 이 살육의 현장에서 온전히 살아남아 지금까지 기도하며 당원으로 잘 살고 있다. 그것이 작가가 말해주는 해답인 것인가. 왜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리하여 서로 반동이라고,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싸우고 있는가.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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