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 아침달 시집 18
원성은 지음 / 아침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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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는 독자에게 활짝 열려 있지만은 않다. 일상적이고 쉬운 단어를 오밀조밀 뭉쳐서 인기를 끄는 시집과는 다르다. ‘고전주의자’, ‘낭만주의자’, ‘리얼리스트’ 등 문예이론의 말을 그대로 가져온거나(「트리플렛」), ‘로만 야콥슨’의 연구를 제목으로 차용하는(「실어증의 두 가지 유형」) 유형의 시를 읽으면, 시인이 딱히 대중의 공감과 인기를 바라며 시를 쓰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성은의 시는 직관적으로 단번에 이해하거나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유의 것은 아니다.

시인은 첫 장에서 “때때로 공포라는 감정은 아주 아름다운 것을 우연히 보게 해준다”라고 운을 뗀다. ‘공포’라는 감정은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를 관통한다. 그런데 ‘공포’에 유념하며 시를 읽다 보면 절박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을 목격한 기분이 들고, 독자는 머뭇거리게 된다. 아름답기보다는 처절하다는 첫인상을 받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시인은 “내 웃음소리도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공포라는 장르의 속성이다”(「살아 있는 조각상」)라며 이 감정을 벗어날 수 없음을 토로한다. 심지어 “내가 만드는 소리를 나도 모르는 채/입을 다물 수가 없”기 때문에(「아나크로니스트」) 자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쏟는 데 온힘을 다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시집에서 내내 지속되어 껄끄럽기까지 하다.

시인은 왜 이렇게 어렵고 불편한 말을 반복하는 것일까? 다음 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소설가 안톤은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다 안톤은 어느 날, 자신이 6년 동안 집필한 장편 소설이 대형서점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 것을 본다… 아사 직전의 그는 텅 빈 냉장고 문을 열면서 그 소설이, 과장 없이, 그의 전부였다는 것을 간신히 기억해낸다”(「러시안 노블」 55쪽). 하루아침에 자신의 소설을 도둑맞은 “그날 이후 안톤은 더는 바덴바덴에서의 눈부신 여름을 떠올리지 않는다 더는 한겨울 시베리아의 추위에 떨면서 기분 좋은 외로움에 잠겨 있지 않는다 더는 바이칼호수를 응시하면서 아, 깨끗해 중얼거리지 않는다”(「러시안 노블」 57쪽). ‘안톤’이 시인과 동등한 존재는 아니지만, 시인이 어떤 ‘상실’ 때문에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예전의 일상이나 여유를 누릴 수 없는 상황을 겪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는 있다.

안톤의 머릿속에 “박쥐와 까마귀 수십 마리가” 살고 그 둘이 말다툼하는 것처럼 ‘도라’와 ‘클라라’도 다툰다. “도라에게는 클라라의 말끝을 따라하는 버릇이 있다…//클라라는 말한다/틀림없어 누군가 내 삶을 통째로 훔쳐갔어 그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그게 누구인지를 모르겠어//도라는 말한다/클라라, 너는 완전히 미쳤어 정신 차려”(「검은 쌍둥이」 51쪽). 클라라 역시 안톤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훔쳤다고 믿는다. 클라라도 “상상한 것을 공책에 쓰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었는데 공책을 잃어버린 것이다. 도라는 상심한 클라라를 위해 “기억력이 나쁜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써줄게 써놓고 나서/잊을 만하면 중얼거려줄게”라고 생각하며 클라라의 말을 예상하고 미리 공책에 적는다. 그동안 클라라는 “삶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에서, 허기에서, 잠에서/…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도라가 이런 말들을 공책에 쓰는 동안 클라라는 “사실은 깨어 있었던 적도 살아 있었던 적도 없는”(「검은 쌍둥이」 54쪽) 존재였음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비약적이긴 하지만) 도라는 한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의식이고 클라라는 잠재된 무의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을 빼앗겼다는 충격으로 인해 무의식이 깊은 잠에 빠진 절망적인 상황, 즉 실어증(「실어증의 두 가지 유형」)을 겪으면서도 시인은 의식적으로 클라라의 말끝을 따라하고 공책에 받아 적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원성은의 시 쓰기 방식이 아닐까.

여기, “부리가 길고 가느다란 희귀종의 새가, 날개가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다친 새가/상처 부위에만 온기가 남아 있는 새가” 죽어가고 있다. 새는 시인 또는 화자를 의미하는 사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상처와 공포에 질려 죽어가는 상태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해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여기서부터 다시 기억”하고 “여기서부터 다시 노래”하고 “여기서부터 다시 응시”하고 “여기서부터 다시 사랑”하려고 시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기서부터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작고 가볍고 부드러운 나의 새”를 손에 담는다(「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쓴 악필의 편지」). 이 광경은 독자에게 묘한 위로를 준다.

다시 첫 장으로 돌아와서, 시인은 “길을 잃은 단 한 명이라도/조금 덜 무섭고 덜 아프기를 바란다/그 가능성을 믿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야 시인의 말이 이해된다. 비록 원성은의 시가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에 닿아있지 않고 관념과 감정의 과잉으로 읽힐지라도… 공포에 질려있는 사람, 삶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손 내미는 시인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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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욕망과 파국 - 나는 환경책을 읽었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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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목표는 소개한 책을 읽거나 읽지 않도록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욕망과 파국』은 서평집으로서 원래의 목표에 충실하게 32권을 소개한다. 여기에 등장한 책들의 갈래는 사회과학, 동화, 소설, 시집 등으로 다양하지만 모두 ‘환경보호’ 또는 ‘생태주의’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나는 이 책에서 3부가 가장 잘 읽혔다. 저자 최성각은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소설과 환경 에세이를 써냈는데, ‘한 인물을 되짚어보는 글’에서 소설가로서의 필력이 제대로 드러난다. (특히 1부의 비교적 엉성한 짜임새와 비교하면 더욱…) 


조종(弔鐘)을 울린다는 소제목에 걸맞게, 니어링에 대해서는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갈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었던 실존적 인간”이고, 소로우는 “문학은 반권력”이라는 가르침을 준 스승이라고 평했다. “아름답게 살다가 가신” 권정생 선생, “문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솔제니친, “작가의 길”을 걸어간 “정직한 인간” 세풀베다 역시 저자가 아낌없이 존경심을 표한 인물들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사람이 수용소에서 하루 동안 겪은 생활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아무런 극적인 사건도 없이 보낸 영하 38도의 시베리아 수용소의 하루가 소설의 전부다.”(156쪽)


저자가 어린 시절 문학에 눈 뜨도록 해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50년 만에 다시 찾아 익은 이유는 시방 전 세계를 당혹과 불안, 공포로 뒤덮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었다.”(158쪽)


게오르그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신봉자답게 “이 소설이 스탈린 시대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되, 직정의 방식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고급스럽게 비판했다”(157-158쪽)고 평한 바 있다. 당시의 시대를 리얼하게 반영했다고 칭찬한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간 이후 60년도 더 지난 우리에게도 울림과 깨달음을 준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세계의 속성이 있음을 방증한다. 솔제니친은 이 소설을 통해 “세계가 수용소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100년이 채 안 되는 수명에 갇혀 있고, 공간적으로는 국가주의에 갇혀 있고, 영원히 해소될 길 없어 보이는 불평등과 피부색 차별, 한심스러운 성차별, 장애인 차별의 장벽에 갇혀 있고, 성장 숭배라는 신흥종교의 마법에 갇혀서 살고 있었다. 이번에는 박쥐에 연원(淵源)하고 있는 역병에 기습당황 상황이지만, 인류는 늘 여러 형태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갇혀서 살아오지 않았던가.”(159쪽)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직접 읽어보지 않았지만 저자 최성각과 루카치 덕분에 소설의 분위기와 형태가 얼추 유추되고 흥미로워졌다. 작금의 팬데믹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문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재앙 속에서도 ‘거의 행복하다고까지 해도 좋은 하루’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능력을 곱씹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업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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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시선 455
신미나(싱고)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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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이 덜 깬 몸을 습관적으로 일으키고 집을 나선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골목을 허정허정 걸어가다 보면, 뒤통수에 대고 빠앙- 클락션을 울리는 차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고, 눈이 뜨이고, 등이 펴져서 힘을 주며 걸어 갈 수 있다.


신미나의 시는 그처럼 몽롱했던 의식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경적 소리 같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에는 개인 또는 사회의 문제를 담은 시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은 금세 그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직접 지시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파과2」),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창경원에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 당신(「새로운 사람」), “나의 감탄이 부끄럽게” 움직이는 아쿠아리움의 생물들(「아쿠아리움」), “검은 버섯구름과/조선인의 시체를 덮은 재”가 있었던 히로시마(「히로시마 단풍만주」), “상자를 다 나르지 않으면/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게”되므로 서커스 단원처럼 일하는 오빠(「서커스」), “사람들이/하나/둘/물속으로/첨벙” 빠져서 “돌아오지 않는” 4월의 세월호(「국화가 있던 자리에 국화가 사라지듯이」) 등등… 온갖 아픔과, 아픔 이후가 등장한다.


기독교에서 빌려온 이야기도 많다. 앞에서는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헌금하지 않은 언니와 나를 세워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보라고” 추궁하는 목사(「파과1」)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연상케 하는 “타워크레인에” 매달린 거인(「거인」)에 대해 시인은 말한다. 아예 대놓고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인간들이 절규”하지만 “가책도 재미도 없는 얼굴로 우주의 마지막 행성을 깨뜨”리는 신을 묘사(「통곡의 벽」)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시들의 공통분모는 ‘고통’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에게 삶의 신산한 풍경을 보여준다. 주목할 지점은 바로 그 다음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그저 앓는 소리와 푸념으로 그치지 않고, 나가서 싸우자고 외치지도 않는다. 다만 리포터처럼, 그 국면에 개입하지 않고 생생하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전달할 뿐이다. 삶과 아픔과 죽음을 생각하는, 한 인간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맥락을 따르면 「지켜보는 사람」은 시인의 정체성을 직접 드러내는 시로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한 알의 레몬”에 대해 쓴 것 같지만, 시의 제목이 「지켜보는 사람」인 만큼 화자에 집중해야 한다. 화자는 “흰 테이블보 위에” 있는 레몬을 관찰하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오래전에 있었던 것처럼/금방/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는 레몬이 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해 보자. 화자는 “레몬은/레몬으로서 있다”며 긍정하고, “과거형으로 존재”하는 레몬도 “레몬은/레몬빛으로 남”는다고 “진심으로” 본 것을 말한다. 레몬을 앞에 두고 레몬과 나의 관계라든가, 레몬과 타인의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레몬에 초점을 두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인은 여기에 “레몬이 있다”고 발화하고, 독자는 그 경적 소리를 듣는다.


낱말 ‘지켜보다’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다”라는 뜻을 가진다. 지켜보는 사람은 대상을 성의 없이 훑어보거나, 함부로 대하거나, 난입하거나, 힘을 가하지 않고, 사려 깊게 곁을 지킨다. 그 정체성은 「속죄」에서 돌을 받는 사람으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던지면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돌”을 주고 떠나며 화자를 “진흙탕에서 핀 연꽃”이라며 아름답다고 칭송한다. 돌은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이다. 정작 화자는 “점점 무거워지는 돌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세상에 그런 돌이 다 있느냐고/기억나지 않는다고/이제 그만 돌아가달라고” 거절한다. 사람들은 아픔을 금세 잊어버리는 사회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화자는 “나의 죄는 너무 오래 돌을 매만진 것”이라며 자책하고, “돌을 되돌려주지 않”기로 결심한다.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 다르게 시인은 독자에게 고백한다. 


보아라, 세상에는 레몬이 있고, 돌이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내가 있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를 충실히 읽은 독자라면, 시집을 펼치기 전과 덮은 후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머릿속에 가득 울리는 경적 소리를 외면하지 못한다. 뒤를 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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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47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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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의 시에는 장광한 수식이 없다. 너무 길지 않은 호흡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시로 옮길 뿐이다. 시인은 시와 함께 걷는다.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된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 「미래의 사람」에 대해 '시인이 인식한 시와 세계'라는 주제로 나름의 해설을 붙여 보았다.

#붙잡기
“나를 두고 왔다./…/그때 보고 있던 게 멈추지 않고 흐는 물이라서//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 사이에 여름이 오고 “붉어지는 데 집중하다 떨어진 장미를 들고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이//장미는 다 어디로 갔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에서 화자는 눈앞과 손아귀를 떠난 물과 장미 때문에 허탈해 한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남은 것이라도) 남겨두기 위해 “한 번쯤 비유를 끌어다 쓰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은 현실을 시의 차원으로 옮겨오겠다는 의지이다. 현실의 물과 장미 같은 것들은 속절없이 떠나가지만 시에서는 함부로 그러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배우기
시인은 또한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가보려” 한다. 점프슈트는 윗옷과 아래옷이 통짜인 옷이다. 점프슈트를 입은 채로 팔을 들면 바짓단도 덩달아 올라간다. 그러니까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간다는 것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옷의 모든 부분이 같이 움직인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의 화자는 아직 점프슈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점프슈트를 입고 걷기로 가정한다. 없는데도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먼저 나와서…행동으로 보여주는” 선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화자가 마치 “오른발을 내밀면 왼발이 따라오는”, 점프슈트처럼 걷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밖으로 나와 행진하는 무리 같다. 이렇게 상상할 때 ‘점프슈트’는 ‘연대’와 나란히 놓고 보암직하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죽 이어진 길”이 된다.
점프슈트를 입고 걸으면 어떤 풍경이 보일까. 먼저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이게 여름이지 뭐가 여름이겠어”라고 말한다. “다리가 길어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간대는 해질녘에 그림자가 늘어지는 때로 생각된다. 화자는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를 벗어나 사람들의 행동을 본다. “걸어가면서 앉아 있는 걸 보는 거야.//왜 그럴 때 있잖아. 가다가 살짝 옆을 보는//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안 할 거야.” 화자는 사람들로부터 여름의 행동을 배우지만 아주 답습하지는 않고, “뭔가 따라온다는 생각을 버리면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어.”라며 자신의 페이스대로 걸어간다. “한 손엔 텀블러를 들고”, “누구를 만날 것처럼 가다가 아무도 못 만났는데도 다 만난 것처럼” 걸어가는 화자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게 좋았어.”라고 말하는 듯, 안온함이 느껴진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처럼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에도 시의 개념을 적용해 보자. 점프슈트처럼 ‘나’와 함께 걷는 사람들을 바로 시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인은 시로부터 여름을 배운다. “아직 없지만”, 여름에 걸맞은 점프슈트를 입고 밖으로, 거리로 나가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기다리기
아직 없는 점프슈트는 언제 입을 수 있는 걸까. 명확히 답하기는 어렵지만 「미래의 사람」을 통해 미래의 점프슈트를 찾아보자. 「미래의 사람」에서 화자는 무덤에 숨어서 누군가가 오는 걸 내다보고 있다. 그 누군가는 “멈추지 않고 걸어오는데도//오늘 안으로 도착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저녁 먹으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누군가를 ‘시’라고 생각해 보자. 길 위에서 걸어오는 시는 ‘나’의 시이기 때문에 ‘나’밖에는 불러줄 사람이 없다. “이게 하나의 장면에 불과하더라도//구겨버리지만 않는다면 누군가 오고 있다.”에서 결국 시를 쓰고 있는 지면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시를 만날 것이라는 의지가 드러난다. 시가 당도하길 기다리며 시인은 미래로 간다.

시인은 시 쓰기 행위를 통해 시와 함께 걸어간다. 점프슈트를 입고 멈추지 않는 물과 붉어지는 장미를 바라 볼 것이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에서 여름을 붙잡아주던 시,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에서 먼저 밖으로 나와 여름을 보여주었던 시, 「미래의 사람」에서 여름이 오기도 전에 출발하여 결국 도착할 시를 쓰면서 시인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오른발을 내밀면 왼발이 따라오는” 점프슈트처럼 움직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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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닝 - 채식에 기웃거리는 당신에게
이라영 외 지음 / 동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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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닝』은 크게 두 단원으로 나뉜다. 첫째 단원은 “뭐라도 하고 싶다면”, 둘째 단원은 “다르게 하고 싶다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전자는 채식에 기웃거리는 이들을 위한 글이고 후자는 본격적으로 비건을 실천하려는 이들을 위한 글로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첫째 단원의 「비겐의 식탁」과 둘째 단원의 「괜히 그 책을 번역해서」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비겐의 식탁」은 기사를 쓰기 위해 비건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이야기이고, 「괜히 그 책을 번역해서」는 철학(동물해방)을 공부하며 채식을 결심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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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겐의 식탁」의 ‘비겐’은 저자(신소윤 기자님)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던 선배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72-73쪽)

“요즘 건강 문제 때문에 나도 비건을 시작해보려고. …그런데 나는 비건까지는 아니고 비겐 정도인 것 같아.”

“아, 비긴-비겐-비건 중에 비겐 말하는 거지?”

비건 신청자 선배가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하하하, 무슨 그런 아재개그를……”

그때는 너무 썰렁한 농담이라며 웃어넘겼지만, 이후로 그의 말이 가끔 귓전을 맴돌았다.


육식을 즐기다가 갑자기 완전 채식을 시도하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비건적(的)’으로 음식과 생활용품을 따져가며 사용했던 경험에서, 스스로를 옥죄는 채식은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하지만 단순 실패에 그치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83쪽)

짧고 강렬했던 경험은 내 인생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알면,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다시 고기를 먹지만 조금은 주저하게 되었고, 먹는 것부터 입고 쓰는 것까지 동물의 희생을 대체할 것이 있으면 비건을 선택하는 비중이 훨씬 커졌다.


한 번의 ‘비긴’으로 완벽한 ‘비건’은 못 될지언정, ‘비겐’의 삶이라도 계속하다보면 비건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비겐’의 식탁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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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그 책을 번역해서」에서 ‘그 책’은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이다. 저자(김성한 교수님)은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친구의 권유로 별다른 생각 없이(!) 『동물 해방』을 번역했다가 혼란에 빠져버린 일화를 소개한다.


(92쪽)

한참 치킨을 뜯고 있는데, 누군가가 멀리서 다가와 내게 불쑥 인사를 했다.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내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이었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치킨을 계속 먹었지만 나는 더 이상 맛을 느끼지 못했다. 특히 창피하다는 생각과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 교차하면서 결국 멘붕이 왔다. …마침내 나는 채식을, 그것도 완전채식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저자는 윤리교육과 교수답게 ‘고기를 먹고 싶은 욕망’을 무려 공리주의와 칸트(!)의 철학으로 극복한다. 내가 채식을 결심한 것도 윤리 때문(『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를 읽고 설득 당함)이었는데, 덕분에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95쪽)

이 세상의 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증진하라는 공리주의의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가축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우리에게 그들의 고통에 관심을 둘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96쪽)

아무리 애를 써도 채식의 윤리적 정당성을 반박할 수 없었다. 문제는 고기를 먹고자 하는 나의 욕구였다. …문득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의미가 떠올랐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우리가 원초적 욕망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욕망을 극복하면서 도덕 법칙에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기준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나는 고기를 먹지 않고 오히려 채식을 해야 한다.


이후 저자는 완전채식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페스코(어류까지 허용) 채식을 시도했고 강박에서 벗어나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겐의 식탁」에서도 말했듯이, 처음부터 비건이 되려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타협적인 페스코부터라도 시도하는 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


나의 페스코 채식은, 가난한(?) 자취생으로서 매 끼니마다 완전 채식하기는 버겁기 때문에 선택한 일종의 타협안이다. 이 지점에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거닝』을 통해 완전 채식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고 다시 비건을 향해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건까지는 아니고 비겐 정도인 것 같아." - P72

아무리 애를 써도 채식의 윤리적 정당성을 반박할 수 없었다. 문제는 고기를 먹고자 하는 나의 욕구였다. …문득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의미가 떠올랐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우리가 원초적 욕망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욕망을 극복하면서 도덕 법칙에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기준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나는 고기를 먹지 않고 오히려 채식을 해야 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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