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시선 455
신미나(싱고)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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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이 덜 깬 몸을 습관적으로 일으키고 집을 나선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골목을 허정허정 걸어가다 보면, 뒤통수에 대고 빠앙- 클락션을 울리는 차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고, 눈이 뜨이고, 등이 펴져서 힘을 주며 걸어 갈 수 있다.


신미나의 시는 그처럼 몽롱했던 의식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경적 소리 같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에는 개인 또는 사회의 문제를 담은 시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은 금세 그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직접 지시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파과2」),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창경원에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 당신(「새로운 사람」), “나의 감탄이 부끄럽게” 움직이는 아쿠아리움의 생물들(「아쿠아리움」), “검은 버섯구름과/조선인의 시체를 덮은 재”가 있었던 히로시마(「히로시마 단풍만주」), “상자를 다 나르지 않으면/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게”되므로 서커스 단원처럼 일하는 오빠(「서커스」), “사람들이/하나/둘/물속으로/첨벙” 빠져서 “돌아오지 않는” 4월의 세월호(「국화가 있던 자리에 국화가 사라지듯이」) 등등… 온갖 아픔과, 아픔 이후가 등장한다.


기독교에서 빌려온 이야기도 많다. 앞에서는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헌금하지 않은 언니와 나를 세워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보라고” 추궁하는 목사(「파과1」)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연상케 하는 “타워크레인에” 매달린 거인(「거인」)에 대해 시인은 말한다. 아예 대놓고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인간들이 절규”하지만 “가책도 재미도 없는 얼굴로 우주의 마지막 행성을 깨뜨”리는 신을 묘사(「통곡의 벽」)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시들의 공통분모는 ‘고통’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에게 삶의 신산한 풍경을 보여준다. 주목할 지점은 바로 그 다음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그저 앓는 소리와 푸념으로 그치지 않고, 나가서 싸우자고 외치지도 않는다. 다만 리포터처럼, 그 국면에 개입하지 않고 생생하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전달할 뿐이다. 삶과 아픔과 죽음을 생각하는, 한 인간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맥락을 따르면 「지켜보는 사람」은 시인의 정체성을 직접 드러내는 시로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한 알의 레몬”에 대해 쓴 것 같지만, 시의 제목이 「지켜보는 사람」인 만큼 화자에 집중해야 한다. 화자는 “흰 테이블보 위에” 있는 레몬을 관찰하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오래전에 있었던 것처럼/금방/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는 레몬이 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해 보자. 화자는 “레몬은/레몬으로서 있다”며 긍정하고, “과거형으로 존재”하는 레몬도 “레몬은/레몬빛으로 남”는다고 “진심으로” 본 것을 말한다. 레몬을 앞에 두고 레몬과 나의 관계라든가, 레몬과 타인의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레몬에 초점을 두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인은 여기에 “레몬이 있다”고 발화하고, 독자는 그 경적 소리를 듣는다.


낱말 ‘지켜보다’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다”라는 뜻을 가진다. 지켜보는 사람은 대상을 성의 없이 훑어보거나, 함부로 대하거나, 난입하거나, 힘을 가하지 않고, 사려 깊게 곁을 지킨다. 그 정체성은 「속죄」에서 돌을 받는 사람으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던지면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돌”을 주고 떠나며 화자를 “진흙탕에서 핀 연꽃”이라며 아름답다고 칭송한다. 돌은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이다. 정작 화자는 “점점 무거워지는 돌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세상에 그런 돌이 다 있느냐고/기억나지 않는다고/이제 그만 돌아가달라고” 거절한다. 사람들은 아픔을 금세 잊어버리는 사회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화자는 “나의 죄는 너무 오래 돌을 매만진 것”이라며 자책하고, “돌을 되돌려주지 않”기로 결심한다.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 다르게 시인은 독자에게 고백한다. 


보아라, 세상에는 레몬이 있고, 돌이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내가 있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를 충실히 읽은 독자라면, 시집을 펼치기 전과 덮은 후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머릿속에 가득 울리는 경적 소리를 외면하지 못한다. 뒤를 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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