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손민지 지음 / 디귿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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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걷기조차도 귀찮아하며,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1~2분만 뛰어도 숨이 거칠어져서 진정하는 데 5분 이상 걸리는흐물흐물한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다. 그 정도로 체력이 조악하기 때문에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의 제목만 봤을 때 솔직히 한숨부터 내쉬었다.(작가님 죄송합니다;;) 설마 첫 장부터 달리기를 하면 당신도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든가 하는 자기계발서의 말투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은 출판사를 믿고 책을 펼치기로 했다. 이전에 디귿의 다른 에세이들(행복의 모양은 삼각형)을 읽고 자기계발이나 훈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에 대한 글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이번에도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는 달리기의 성공신화가 아니라 일기였다. 작가가 달리기를 만병통치약이라고 과대광고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1달리는 여자()’은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2체력으로 하는 사랑은 러너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후 살아가는 작가의 생활을 담아냈다.

 

사실 1부는 달리기의 효과로 인해 긍정적인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약간은 달리기 만능주의·환원주의적인 면이 있다. 작가는 각각의 꼭지를 교훈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하려는 듯했다. 다음의 인용문은 각 꼭지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14) 스스로의 기분에 결정권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하자 나는 굉장히 믿음직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달리고 올 때마다 나는 나를 믿고 살아봐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42) 나는 언제고 나와 함께 붙어 있는데, 함께 있는 나 스스로를 좋아하지 못해서 그렇게 타인을 찾아 다녔는지도 모른다. 기꺼이 혼자가 되기 위해 달리러 나간다.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나는 또다시 나 자신을 절실히 돕고 싶어진다.

 

(60-61) 재능과 무관하게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달리기라서달리기의 논리 앞에서는 재능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나 자신을 조금 덜 의심하길, 다양한 무언가를 그냥 쭉 해나가길.

 

이렇게 잘 정리된 문장을 읽으면, 작가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보다는 점잖게 갈고 닦은 글, 그러니까 이를테면 스터디 플래너나 다이어리에 필사해두면 멋질 법한 문장을 쓰는 데 집중했다는 게 티가 났다. 독자에 따라 취향이 갈리겠지만 나는 이런 문장에서 작가가 달리기와 원고에 정성을 갈아 넣은 게 와닿아서 좋았다.

 

2부에서는 달리기로 얻은 체력과 그 체력 때문에 가능해진 사랑하는 힘을 키워드로 꼽을 수 있는데, 작가의 사랑이 동네 고양이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마음이 데워졌다.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작가도 체력이 넉넉하지 못해서 삶이 힘겨웠다고 한다.

 

(100) 체력 없는 삶의 문제점은 단순히 몸의 피로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관계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느 관계에서든 일정량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된다면 미련 없이 정리해버렸다. 대화가 사소하게 어긋나거나 가치관이 충돌하면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혼자 마음속에서 밀어낸 친구만 여럿이었다.

 

(101-102)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것이 체력의 문제였다는 것을. 삶에 달리기가 들어온 후로 일상의 많은 일이 대수롭지 않아졌다. 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늘어나자 나는 조금씩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갔다. 체력이 나쁠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게 동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이다.

 

(103-104) 조금 더 튼튼해진 몸 덕분에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의 사랑을 알아가고 있다. 매일 동네 고양이들에게 다정한 냐옹인사를 받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발라당 배 뒤집기도 보는 특권을 누린다. 계속해서 다정함을 나누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체력을 기를 셈이다.

 

동네 고양이를 돌본다는 건 고양이를 찾아다니며 식사를 제공하는 일고양이를 해치려는 사람으로부터 고양이를 보호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할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수모를 당하며 체력과 자존심이 깎이기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잡념과 스트레스를 벗어 버리기 위해 작가는 달리기를 한다고 말한다.

 

(130-131) 내 수많은 자아 중 캣맘 자아와 달리는 자아의 차이는 엄청나다. 히어로 무비에 자주 나오는, 평소에는 나약한 주인공이 옷만 갈아 입으면 갑자기 초능력을 얻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설정이랑 비슷하다. 스스로가 너무나 약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마다 그것을 반증하기 위해 내 안의 러너 자아가 나서준다.

 

전반적으로 좋았으나, 조금 아쉬운 부분이 두어 군데 있었다. ①본문 22~29쪽에 해당하는 꼭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거팬츠를 입은 사람이 표지에 그려졌다면 고증(!)이 완벽했을 텐데 짧은 반바지를 입은 러너가 표지에 들어가서 약간 아쉽다. ②125쪽에서 인용한 떨림과 울림의 문장들을 큰따옴표로 묶기만 하고, 각주 등 별도의 방법으로 출처를 명기하지 않아서 아쉽다. 이 부분은 떨림과 울림본문 49쪽에 해당한다.


선천적인 체력은 약하지만 후천적으로 계발한 지구력,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읽으면서 인간 손민지를 알 수 있어서 좋은 책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타고난 능력보다는 훈련으로 얻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 사랑하기 위한 체력을 부지런히 기르는 것 말이다. 손민지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달리는 여자, 어른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스스로의 기분에 결정권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하자 나는 굉장히 믿음직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달리고 올 때마다 나는 나를 믿고 살아봐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P14

나는 언제고 나와 함께 붙어 있는데, 함께 있는 나 스스로를 좋아하지 못해서 그렇게 타인을 찾아 다녔는지도 모른다. …기꺼이 혼자가 되기 위해 달리러 나간다.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나는 또다시 나 자신을 절실히 돕고 싶어진다.

재능과 무관하게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달리기라서… 달리기의 논리 앞에서는 재능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나 자신을 조금 덜 의심하길, 다양한 무언가를 그냥 쭉 해나가길. - P60

체력 없는 삶의 문제점은 단순히 몸의 피로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관계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느 관계에서든 일정량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된다면 미련 없이 정리해버렸다. 대화가 사소하게 어긋나거나 가치관이 충돌하면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혼자 마음속에서 밀어낸 친구만 여럿이었다. - P100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것이 체력의 문제였다는 것을. 삶에 달리기가 들어온 후로 일상의 많은 일이 대수롭지 않아졌다. …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늘어나자 나는 조금씩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갔다. …체력이 나쁠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게 동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이다. - P101

조금 더 튼튼해진 몸 덕분에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의 사랑을 알아가고 있다. 매일 동네 고양이들에게 다정한 ‘냐옹’ 인사를 받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발라당 배 뒤집기’도 보는 특권을 누린다. …계속해서 다정함을 나누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체력을 기를 셈이다. - P103

내 수많은 자아 중 캣맘 자아와 달리는 자아의 차이는 엄청나다. 히어로 무비에 자주 나오는, 평소에는 나약한 주인공이 옷만 갈아 입으면 갑자기 초능력을 얻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설정이랑 비슷하다. …스스로가 너무나 약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마다 그것을 반증하기 위해 내 안의 러너 자아가 나서준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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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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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은 새벽형 인간이다. 자정부터 오전 다섯 시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책도 읽고 글도 읽고 야식도 먹고, 상상을 한다. 그 일상과 상상과 꿈과 시에 대한 이야기가 일기시대에 섞여 있다. 나도 괜히 그를 따라 새벽에 이 책을 읽고 새벽에 감상문을 써본다. 문보영 시인이 반려 돼지 인형 말씹러를 가까이 두듯이 나도 앵무새 인형 퍼렁이’(대충 지은 건 사실이지만 나름 입에 착착 감기는 이름이라 좋다)를 옆에 앉히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책 속 시인님은 귀엽게 느껴졌는데 나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잡동사니가 가득하고 눅눅한 방에서 쓰는 평이한 글이다. 그래도 이걸 일기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

 

현재 시각 오전 252.

 

일기에 대한 문보영 시인의 생각은 각별하다.

 

(12) 시 이야기를 하든, 소설 이야기를 하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일기가 있다. 일기가 창작의 근간이 된다는 말은 흔하지만 사실 일기가 시나 소설이 되지 않아도 좋다. 무언가가 되기 위한 일기가 아니라 일기일 뿐인 일기, 다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은 일기를 사랑한다.

 

(149) 일기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인데, 내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 나에게 무심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공간에서 혹은 내 방에서만 일기를 쓸 수 있다.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는 건 의외로(?) 어렵다. 남의 말을 듣고 받아 적는 공부는 할 만한데, 나의 내면을 탐구하고 글로 표현하는 일은 고되다. 나는 일기를 잘 쓰지는 않지만 이번 학기에 시를 습작하면서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과제로 씨감자에 대한 시를 써낸 적이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그 시는 전 그냥 말하는 감자라구요. 아시겠어요?” 짤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어느 날 민망하지만 자취방 냉장고에서 너무 오래 방치해서 싹이 난 감자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두 상황을 겹쳐보니 씨감자가 꼭 4아니, 5학년이어도 전공 지식 1도 모르는 나 같아서, 순간 서러움이 확 밀려왔다. 그 감정을 그대로 글로 옮겨서 제출했다가는 합평 때 어떤 혹평을 들을지 무서워져서, 적당히 각색하고 꾸며 써냈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온전히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독자라고는 나 하나뿐인 시를 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직은 모르겠다. 시를 열 편도 안 써본 초보니까 당장 알 수는 없겠지. 그저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을 익히면서 내 식대로 조립하는 연습을 계속하는 수밖에. 문보영 시인도 역시 부딪쳐 가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낙엽 선생님에게서 시를 배웠던 이야기를 일기시대2부에서 풀어 놓았는데, 시인의 시 입문기라니 흥미로웠다.

 

(82) 첫날, 낙엽 선생님은 내게 시를 한 편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그 시를 읽고 연필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머릿속에 있었던 시는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푼 다음 깨끗이 빨아오세요.” 일명 빨래 숙제였다. 그러더니 작고 낡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게 던져 주었다. ‘문예지란 것이었다.

 

(83-84) 나는 일주일간 문예지를 탐독했다.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다. 사전을 뒤져 새로운 단어를 찾기도 하고, 익숙한 단어를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 산문으로 된 짧은 시를 하루에 한 줄씩 써서 완성해 가져갔다. 일단 너저분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은 다음에 거기서 진심을 찾는 게 시 같았다. 뱉고 나니, 거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90) “시를 한번 좋아하면, 빠져나갈 수 없어. 늦게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돼. 한번 삔 발목은 꼭 다시 삐게 되잖아? 그게 시잖아, 보영아. 너는 쭉 써.”

 

문보영 시인은 또한 일기시대곳곳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카프카에게서도 영향을 많이 받은 듯싶다.

 

(173) 카프카의 소설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종족에는 요제피네라는 쥐가 나온다. 그녀가 찍찍거림을 작정하고 노래라고 생각하고, ‘노래라고 호명하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것은 엄청나게 멋진 노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찍찍거림은 쥐들의 습관적인 찍찍거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찍찍거릴 필요가 없는데도 찍찍거린다.

 

(174) 다른 쥐가 요제피네를 따라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뒤샹이 변기를 예술이라고 호명한 것과 같이. 그녀의 예술작품은 찍찍거림이 아니라 찍찍거림을 예술이라고 우긴 행위이고, 그것을 첫 번째로 우겼다는 사실 자체가 작품이기 때문이다. 요제피네의 노래 실력이 예술이 아니라 찍찍거림이 예술 작품이라는 그녀의 생각이 예술 작품이었던 것이다.

 

(175)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직 시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시라고 호명할 때 그것은 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노트북을 연지 한 시간 정도 지났다. 4부의 편지 광기라는 꼭지가 마음에 들어서 리뷰를 더 쓰고 싶은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맥락은 없고 중언부언은 많은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나머지는 내일의 내가 덧붙이고 고쳐주겠지.

 

현재 시각 오전 346. (희망)최총 취침 시각 오전 4.

일기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인데, 내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 …나에게 무심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공간에서 혹은 내 방에서만 일기를 쓸 수 있다. - P149

"시를 한번 좋아하면, 빠져나갈 수 없어. 늦게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돼. 한번 삔 발목은 꼭 다시 삐게 되잖아? 그게 시잖아, 보영아. 너는 쭉 써."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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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상반기에는 시집을 꽤 정기적으로 읽었다. 사실 과제 때문에 시작한 리뷰였지만, 이제는 관심이 더 깊어져서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신작 시집을 사는 단계까지 왔다. 과제차 읽었던 시집은 『당신은 겨울로 왔고 나는 여름에 있었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재와 사랑의 미래』,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도움받는 기분』,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이곳의 안녕』 등 8권이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건 『재와 사랑의 미래』,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 『도움받는 기분』 등 3권이었는데 문제는… 좋아하는만큼 리뷰를 매끄럽게 쓰지 못했던 것이다. 과제는 모두 기한 내에 제출하긴 했지만 『재와 사랑의 미래』, 『도움받는 기분』 리뷰는 다시 읽어봤을 때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알라딘에는 올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좋았던 시들을 옮겨 적어 본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어요? 남자의 중얼거림과

거짓말 말고 말해요, 심령술사의 다그침

춥지 않아요? 나의 외침이

직사광선 아래 어지러이 놓일 때


이곳으로 걸어오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곳에서 내내 얼어 갈

영원히 남아 있을 손을 뻗어 나는

그것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기구의 고리와 이음새가 내 머리를 세게 조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거대한 입김이 내 얼굴과 남자의 완전히 덮는 것을 바라보다 최면에서 깼다.


(중략)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기구는 못 쓰게 돼.

담요를 고쳐 올려 주며 그들의 묻고


사람과 겨우 비슷해진 얼굴로 나는 답한다.

"간직하고 싶었어요."


(중략)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수영모를 쓰고

복잡하게 고안된 컴퍼스를 쥔

미래로 가는 사람 곁에


모르는 사랑 곁에 서 있다.


―「재와 사랑의 미래」(부분), 『재와 사랑의 미래』43~53쪽


여기서부터 다시 노래해

우연은 새가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

부리가 길고 가느다란 희귀종의 새가, 날개가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다친 새가

상처 부위에만 온기가 남아 있는 새가

네 손안에서 죽어가고 있네


(중략)


너는 이름이 많지 그 이름들은 모두 훔치기 좋고 훔치기 좋은 이름들을 꽃다발처럼 끌어안고 사는 삶을

너는 상상하지 않으려고 해 시든 꽃들이 밟히면서 풍기는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해

이름이 많다는 건 이름이 없다는 것과 같아

색깔을 다 빼앗기고 표백된 드라이플라워처럼, 목매단 꽃처럼


(중략)


여기서부터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

작고 가볍고 부드러운 나의 새야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쓴 악필의 편지」(부분),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 30~33쪽


언니 나는 단지 언니의 아름다운 시를 읽고 얼굴이 빨개졌을 뿐인데 왜냐하면 어떤 것은 꼭 내 꿈속에서 일어난 일 같고 어떤 문장은 내가 잊기 위해 평생 애쓴 계절 같아 나는 가끔 언니가 너무 밉고 너무 좋고 언니의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나를 벗어버릴 것 같고 영원히 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언니


(중략)


모래 속에서 빗속에서 눈보라를 안고 있으면 너무 춥고 너무 힘들지 않을까 언니가 적은 대로 언니가 그렇게 지낼까 봐 걱정이 돼 언니, 언니


시가 뭘까


언니 나는 궁금한 것이 없어

그게 제일 궁금한데 그런 것도 모르면서 시를 써도 될까?


―「언니의 시」(부분), 『도움받는 기분』 42~46쪽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는 원래도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쓴 리뷰가 이달의 당선작에 올라서 더 좋아졌다🙃 과제로 시집 리뷰를 써낼 때 곧바로 피드백을 듣지는 못해서 내 글의 어느 부분이 좋고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감이 없었는데…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하게도 6월 당선작으로 뽑혀서 기분이 좋았다.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니 덩달아 자신감과 흥미도 충전되어서 학기 중 남은 과제들을 기쁘게 해낼 수 있었다.


4월말부터 매주 시집을 한 권씩, 짧게나마라도 리뷰를 쓸 목적으로 독해하다보니 취미로 시를 읽을 때와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저 눈에 띄는 몇몇 구절을 필사하고 다시 책장에 꽂던 옛날과는 달리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의도나 특징을 찾아내려고 자세히 보게 되었다. 문학동네/창비 위주로 시집을 모으던 취향도 넘어서서, 다양한 출판사의 경향을 접하게 된 것도 좋은 변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달의 당선작 부상으로 받은 적립금을 쓰기도 하고, 동네 책방에 스탬프를 받으러 다니며 신간 시집을 샀다. 시집으로 가득찬 책장 한켠을 보면 왠지 마음이 든든해진다. 아직은 종강한지 일주일도 안 지났으니 6월까지는 넷플릭스를 보면서 휴식하고😏 7월부터 다시 시집을 읽으려고 한다.










최근에 『맑고 높은 나의 이마』,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완벽한 개업 축하 시』,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등 6권의 시집을 구매했다. 과제 때문이 아니라 그냥 표지와 제목 때문에 끌려서 산 건데😅 모아놓고 보니 푸른 계열이 많다. 『완벽한 개업 축하 시』는 앞부분을 조금 읽어보았는데 '나무인간'이라는 시어가 특히 마음에 들고,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는 제목부터 감성이 충만해서 기대된다! 여름에도 부지런히 시집을 읽으면서 기민한 감각을 키우는 훈련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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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폭력 - 고대 그리스부터 n번방까지 타락한 감각의 역사
유서연 지음 / 동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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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폭력』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 성폭력의 근원을 탐색하며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다. 나는 여태까지 불법촬영이나 성착취를 일삼는 이들을 경멸하기만 했는데, ‘시각’이라는 감각에 집중하여 뿌리를 찾으려는 저자의 시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디지털 성폭력이 만연하게 된 저변에는 서양의 근대적·시각중심적 ‘이성’이 있었다.


(41쪽) 끝없이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들의 범람과, 그 뒤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끝없이 소비하겠다는 수천, 수만, 수억 개의 광기어린 눈들. …디지털 성폭력의 저변에는 여성의 시각적 대상화와 시각중심주의의 광기라는 매우 오래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 근원에는 여성을 비롯한 타자들과 소수자들을 눈앞에 두고 시각적으로 대상화하고 통제하려는 서양의 근대 시각중심주의적 이성이 있다.


저자 유서연은 고대 자연철학자들과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근대를 연 데카르트와 근대의 도구였던 렌즈, 원근법, 카메라 옵스큐라 등을 ‘시각’으로 엮으며 텍스트를 전개한다. 서양철학에서 ‘빛’과 ‘시각’의 개념은 다분히 남성적이며 또한 신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흐름은 18세기 계몽주의까지 이어져서 “계몽과 이성의 시선은 인식의 원천으로서의 눈과 태양을 동등하게 간주”할 만큼, 시각을 특권화하고 절대시했다(78쪽).


저자는 이처럼 신과 같이 모든 것을 한눈에 보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근대(남성)의 광기’라고 명명한다. 이 근대적 광기는 제러미 벤담이 설계하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한 ‘파놉티콘’에서 실현된다. 자신의 존재는 드러내지 않고 눈앞의 대상을 철저히 감시할 수 있다는 자만을 함축하고 있는 근대적 광기는 관음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호프만의 소설 『모래 인간』(국내에서는 주로 ‘모래 사나이’로 출간됨),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아커만의 영화 <갇힌 여인>은 위에서 말한 근대적 광기를 가진 관음증적 주체가 경악, 공포, 파멸로 귀결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그려냈다. 『시각의 폭력』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인데, 문학 텍스트나 영화를 예시로 들며 자칫하면 딱딱하게만 읽힐 수 있는 철학을 잘 풀어냈다는 점에서 좋았다.


관음증적 시각은 카메라의 발명으로 더욱 심화되는데, 특히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된 오늘날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카메라로 인한 불법촬영과 디지털 성폭력의 구조에서, ‘보는’ 가해자와 ‘보여지는’ 피해자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149쪽)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여성의 몸은 단 몇 번의 클릭으로 과거와 미래도 없고 영혼도 없는, 그래서 실재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나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비틀리고 파편화된 몸으로 끝없이 재현된다. 그 여성의 의식 속에 살아 숨 쉬던 과거와 그 지평 아래 펼쳐질 미래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156쪽) 누군가가 나를 빤히 쳐다볼 때 느끼는 감정은 내가 타자의 시선에 따라 객체화될 때 느끼는 수치심일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은 바로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확인할 수 없는 공간에서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서 느끼는 인간의 원초적인 수치심과 공포를 극대화한다.


(157쪽) 반면 어떤 남성들의 경우… 옆에서 인기척을 내는 그 누군가가 친구이고 지인일 경우, 그것을 권하고 공유한다. …이 대목에서 사르트르가 예로 든,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누군가의 시선 아래 객체화되는 대신, 동영상 속 여성들을 노리갯감으로 공유하는 힘 있는 시선의 주체가 되기를 권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그동안 불쾌하다고 느끼기만 했던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공감한다는 게 아니다). 『걸어간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현암사, 2021)에서도 여성을 인격이 아닌 대상으로 여기는 상황에 대해 쓴 글을 읽기도 했는데, 『시각의 폭력』에서 ‘주체’와 ‘객체’ 그리고 권력으로 현상을 분석해주어서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수치심이 부재하는 가해자의 카메라를 누가 부수고 전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여성 광인’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세대의 ‘렌즈를 깨는 여성들’을 소개한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단어로 옮기자면 그들은 바로 ‘제트 세대 페미니스트’이고, 가부장제에 포섭될 수 없는 태생적으로 ‘저주받은 여성’들(194쪽)이다.


요즘 들어 ‘메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나는 그런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없었다면 다른 여러 분야의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훨씬 적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저자 역시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남성혐오와 과격함을 밝히기보다 그들이 등장한 배경에 주목하자고 권한다. 그리고 직접 렌즈를 송곳으로 깨트림으로써 디지털 성범죄에 사용되는 카메라의 눈을 부순 ‘소라넷 고발 프로젝트’,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추적단 불꽃’ 등의 여성단체들을 소개한다.


『시각의 폭력』은 서양 철학에서 비롯된 ‘시각’을 다루기 때문에 철학사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어려운 텍스트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문제적인 디지털 성폭력을 비롯한 젠더 이슈를 이해하기엔 좋은 참고서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참상에 감정적으로만 반응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은 배제적인 시각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여태까지 지배적이었던 시각 대신 ‘포용적인 촉각’ 등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덧붙여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뤼스 이리가레의 ‘여성성’과 ‘여성적 글쓰기’는 내게 아직 생소한 개념이지만 ‘새로운 카메라의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연습을 계속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43쪽) 새로운 카메라의 시선은, 위계화된 시선의 권력을 통해 지금, 여기, 눈앞에 현전하는 성애화된 이미지의 여성 형상과 모양새만을 응시하는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영혼과 정신이라는 내부와 접촉하고 공감하는 능력 속에서 만개하는 시선이리라.

끝없이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들의 범람과, 그 뒤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끝없이 소비하겠다는 수천, 수만, 수억 개의 광기어린 눈들. …디지털 성폭력의 저변에는 여성의 시각적 대상화와 시각중심주의의 광기라는 매우 오래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 근원에는 여성을 비롯한 타자들과 소수자들을 눈앞에 두고 시각적으로 대상화하고 통제하려는 서양의 근대 시각중심주의적 이성이 있다. - P41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여성의 몸은 단 몇 번의 클릭으로 과거와 미래도 없고 영혼도 없는, 그래서 실재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나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비틀리고 파편화된 몸으로 끝없이 재현된다. 그 여성의 의식 속에 살아 숨 쉬던 과거와 그 지평 아래 펼쳐질 미래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 P149

새로운 카메라의 시선은, 위계화된 시선의 권력을 통해 지금, 여기, 눈앞에 현전하는 성애화된 이미지의 여성 형상과 모양새만을 응시하는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영혼과 정신이라는 내부와 접촉하고 공감하는 능력 속에서 만개하는 시선이리라.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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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안녕 파란시선 29
이병국 지음 / 파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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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안녕에는 가깝게 여기던 관계가 깨어진 화자가 자주 등장한다. 관계가 끝남으로써 화자가 잃어버린 대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시인이 문제적인 상황을 시로 풀어내면서 보여준 현실인식과 대처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시집을 리뷰하려 한다.


이별을 경험한 화자는 스스로를 받쳐 줄 등도 휘두를 팔도 없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스툴)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스툴은 슬픔의 얼룩이 쌓이는 곳이다. 슬픔이나 후회 같은 감정을 지탱해줄 등받이가 없는 의자 위에서 얼룩은 꾸역꾸역 위태롭게 쌓여만 간다. 화자는 이별 상황을 인식한 뒤 솜털만큼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스툴)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무도 심각한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게다가 화자는 팔이 없는 스툴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서 아픔과 괴로움을 떠안고 있다.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들로 인해 불안해진 화자는 무의식적으로 작은 행동들을 반복하며 안정을 되찾으려 한다. “죔죔, 몇 번이면 괜찮아질 것들을 붙잡고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르기도 하고, “부드럽게 구부러진 그림자를 꾹, 꾹 눌러 보기도”(이곳의 안녕) 한다. 불안을 억제하기 위한 행동들은 일상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감각적인 만족을 가져다주기는 해도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이고, 상처받은 마음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불안을 해결하고 싶다면 먼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가위-오후의 화자는 길바닥에 누워 뒹구는 아이를 본다. 그 아이는 어제 죽은 동생을 사 달라고 칭얼거린다. 아이는 자신이 맞닥뜨린 동생의 죽음이라는 이별, 즉 문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불편한 마음을 칭얼거림으로 표현한다. 화자는 아이를 따라 누움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아이의 상황을 포개어본다. ‘를 타자와 겹친다는 것은 동일시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칭얼거리는 아이는 문제를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는 주체이자, 스툴에서 슬픔의 얼룩을 떠안은 화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다른 이별이 발생한다.(*) 갑자기 아이의 엄마가 이제 넌 혼자 살아야 한다고 말해버리며, 떠나기 전 밥그릇 가득 흰 구름을 퍼준다. “아이는 허겁지겁 구름을 퍼먹고 하얀 트림을하고 엄마에게 손을 흔든다”. 트림하면 가득 찬 속이 빈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의 유산을 충분히 먹었다고 생각하며 트림하지만 실제로 남는 건 없다. 엄마가 떠나버리면 아이에게 당장 밥을 차려 줄 사람이 없다. 그제서야 아이는 빈속으로 울며 엄마를 찾게 될 것이다. 동생의 죽음과는 다르게 엄마와의 이별은 아이에게 배고픔으로 직접 다가온다. 화자 역시 자신과 아이를 동일시하며 상실의 충격을 느낀다. 감정을 마구 표출하거나 매몰되는 단계에 그치지 않고, 이별 상황이 현실의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놀이터의 흙을 한 줌 쥐어 먹는데, 흙 대신 구름을 먹여줄 엄마는 이제 없다. 화자는 아무리 불러도 기척이 없음을 깨닫고 길게 운다. 자신이 무언가 상실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이제 화자는 홀로 감당해야 할 거리가 생겼다”(가위-허공의 아이들)는 자각을 갖고, 상실로 인한 아픔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집 나간 고양이에서 화자와 잠시 이별했던 고양이는 화자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읽힌다. 화자는 문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는 찾아내지 못했던, “콘크리트와 철심에 갇혀 마른기침을 토해냈던 마음에게 주저앉아 울더라도 도망가지는 말자고 말을 건넨다. 아프고 거대한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음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한다. 비록 두렵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기울조금 가까이 다가가 앉조금 가까이 다가가 안기로”(우리), 그리하여 와 내 안의 또 다른 가 마주보기를 결심한다.


시인이 제시한 마주봄의 구체적인 방법은 시 쓰기이다. 분명 현실은 아스피린아달린’(**)을 구별할 수 없이 삼키는 혼란스러운 세계이다. 틀어진 관계에서 배신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비밀의 한 귀퉁이에서” “시와 호환되지 않아” “손을 들어도 악수하지 못하는 불능의 상태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속에서도 오늘은 잠이 들기 전에 시를 쓸 것이다”, “나는 써야만 한다”(비밀의 화원)는 말을 계속 되뇐다. 이별과 상실을 반복하며 삶을 슬픔과 후회로 점철할지라도, 도망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내면을 마주보겠다는 위대한선언으로서의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 엄마가 왜 아이를 떠나는지는 알 수 없다. 앞 연의 내용과 관련짓는다면 아이가 죽은 동생을 사 달라는무리한 요구를 했는데, 엄마는 그 요구를 들어줄 능력도 없고 칭얼거림을 받아줄 여유도 없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이유로 읽힌다. 다만 이것은 아이나 엄마가 직접 밝힌 게 아니라 화자(그리고 독자)가 상황을 지켜보며 유추한 것이다.


(**) 아스피린은 해열진통제, 아달린은 최면제 또는 수면제인데 이 두 약물은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쓰인 바 있다. 날개의 화자(서술자)는 감기에 걸려 아픈 자신을 위해 아내가 주는 약이 아스피린인 줄로 알고 있었으나, 우연히 그것이 아달린일 수도 있음을 발견하자 혼란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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