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보영 시인은 새벽형 인간이다. 자정부터 오전 다섯 시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책도 읽고 글도 읽고 야식도 먹고, 상상을 한다. 그 일상과 상상과 꿈과 시에 대한 이야기가 일기시대에 섞여 있다. 나도 괜히 그를 따라 새벽에 이 책을 읽고 새벽에 감상문을 써본다. 문보영 시인이 반려 돼지 인형 말씹러를 가까이 두듯이 나도 앵무새 인형 퍼렁이’(대충 지은 건 사실이지만 나름 입에 착착 감기는 이름이라 좋다)를 옆에 앉히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책 속 시인님은 귀엽게 느껴졌는데 나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잡동사니가 가득하고 눅눅한 방에서 쓰는 평이한 글이다. 그래도 이걸 일기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

 

현재 시각 오전 252.

 

일기에 대한 문보영 시인의 생각은 각별하다.

 

(12) 시 이야기를 하든, 소설 이야기를 하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일기가 있다. 일기가 창작의 근간이 된다는 말은 흔하지만 사실 일기가 시나 소설이 되지 않아도 좋다. 무언가가 되기 위한 일기가 아니라 일기일 뿐인 일기, 다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은 일기를 사랑한다.

 

(149) 일기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인데, 내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 나에게 무심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공간에서 혹은 내 방에서만 일기를 쓸 수 있다.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는 건 의외로(?) 어렵다. 남의 말을 듣고 받아 적는 공부는 할 만한데, 나의 내면을 탐구하고 글로 표현하는 일은 고되다. 나는 일기를 잘 쓰지는 않지만 이번 학기에 시를 습작하면서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과제로 씨감자에 대한 시를 써낸 적이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그 시는 전 그냥 말하는 감자라구요. 아시겠어요?” 짤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어느 날 민망하지만 자취방 냉장고에서 너무 오래 방치해서 싹이 난 감자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두 상황을 겹쳐보니 씨감자가 꼭 4아니, 5학년이어도 전공 지식 1도 모르는 나 같아서, 순간 서러움이 확 밀려왔다. 그 감정을 그대로 글로 옮겨서 제출했다가는 합평 때 어떤 혹평을 들을지 무서워져서, 적당히 각색하고 꾸며 써냈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온전히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독자라고는 나 하나뿐인 시를 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직은 모르겠다. 시를 열 편도 안 써본 초보니까 당장 알 수는 없겠지. 그저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을 익히면서 내 식대로 조립하는 연습을 계속하는 수밖에. 문보영 시인도 역시 부딪쳐 가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낙엽 선생님에게서 시를 배웠던 이야기를 일기시대2부에서 풀어 놓았는데, 시인의 시 입문기라니 흥미로웠다.

 

(82) 첫날, 낙엽 선생님은 내게 시를 한 편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그 시를 읽고 연필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머릿속에 있었던 시는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푼 다음 깨끗이 빨아오세요.” 일명 빨래 숙제였다. 그러더니 작고 낡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게 던져 주었다. ‘문예지란 것이었다.

 

(83-84) 나는 일주일간 문예지를 탐독했다.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다. 사전을 뒤져 새로운 단어를 찾기도 하고, 익숙한 단어를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 산문으로 된 짧은 시를 하루에 한 줄씩 써서 완성해 가져갔다. 일단 너저분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은 다음에 거기서 진심을 찾는 게 시 같았다. 뱉고 나니, 거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90) “시를 한번 좋아하면, 빠져나갈 수 없어. 늦게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돼. 한번 삔 발목은 꼭 다시 삐게 되잖아? 그게 시잖아, 보영아. 너는 쭉 써.”

 

문보영 시인은 또한 일기시대곳곳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카프카에게서도 영향을 많이 받은 듯싶다.

 

(173) 카프카의 소설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종족에는 요제피네라는 쥐가 나온다. 그녀가 찍찍거림을 작정하고 노래라고 생각하고, ‘노래라고 호명하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것은 엄청나게 멋진 노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찍찍거림은 쥐들의 습관적인 찍찍거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찍찍거릴 필요가 없는데도 찍찍거린다.

 

(174) 다른 쥐가 요제피네를 따라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뒤샹이 변기를 예술이라고 호명한 것과 같이. 그녀의 예술작품은 찍찍거림이 아니라 찍찍거림을 예술이라고 우긴 행위이고, 그것을 첫 번째로 우겼다는 사실 자체가 작품이기 때문이다. 요제피네의 노래 실력이 예술이 아니라 찍찍거림이 예술 작품이라는 그녀의 생각이 예술 작품이었던 것이다.

 

(175)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직 시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시라고 호명할 때 그것은 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노트북을 연지 한 시간 정도 지났다. 4부의 편지 광기라는 꼭지가 마음에 들어서 리뷰를 더 쓰고 싶은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맥락은 없고 중언부언은 많은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나머지는 내일의 내가 덧붙이고 고쳐주겠지.

 

현재 시각 오전 346. (희망)최총 취침 시각 오전 4.

일기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인데, 내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 …나에게 무심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공간에서 혹은 내 방에서만 일기를 쓸 수 있다. - P149

"시를 한번 좋아하면, 빠져나갈 수 없어. 늦게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돼. 한번 삔 발목은 꼭 다시 삐게 되잖아? 그게 시잖아, 보영아. 너는 쭉 써." - P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