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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안녕 ㅣ 파란시선 29
이병국 지음 / 파란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이곳의 안녕』에는 가깝게 여기던 관계가 깨어진 화자가 자주 등장한다. 관계가 끝남으로써 화자가 잃어버린 대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시인이 문제적인 상황을 시로 풀어내면서 보여준 현실인식과 대처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시집을 리뷰하려 한다.
이별을 경험한 화자는 스스로를 “받쳐 줄 등도 휘두를 팔도 없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스툴」)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스툴은 슬픔의 얼룩이 쌓이는 곳이다. 슬픔이나 후회 같은 감정을 지탱해줄 등받이가 없는 의자 위에서 얼룩은 꾸역꾸역 위태롭게 쌓여만 간다. 화자는 이별 상황을 인식한 뒤 “솜털만큼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스툴」)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무도 심각한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게다가 화자는 팔이 없는 스툴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서 아픔과 괴로움을 떠안고 있다.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들로 인해 불안해진 화자는 무의식적으로 작은 행동들을 반복하며 안정을 되찾으려 한다. “죔죔, 몇 번이면 괜찮아질 것들을 붙잡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르기도 하고, “부드럽게 구부러진 그림자를 꾹, 꾹 눌러 보기도”(「이곳의 안녕」) 한다. 불안을 억제하기 위한 행동들은 일상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감각적인 만족을 가져다주기는 해도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이고, 상처받은 마음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불안을 해결하고 싶다면 먼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가위-오후」의 화자는 “길바닥에 누워 뒹구는 아이”를 본다. 그 아이는 “어제 죽은 동생을 사 달라”고 칭얼거린다. 아이는 자신이 맞닥뜨린 동생의 ‘죽음’이라는 이별, 즉 문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불편한 마음을 칭얼거림으로 표현한다. 화자는 아이를 따라 누움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아이의 상황을 포개어본다. ‘나’를 타자와 겹친다는 것은 동일시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칭얼거리는 아이는 문제를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는 주체이자, 「스툴」에서 슬픔의 얼룩을 떠안은 화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다른 이별이 발생한다.(*) 갑자기 아이의 엄마가 “이제 넌 혼자 살아야 한다”고 말해버리며, 떠나기 전 “밥그릇 가득 흰 구름을 퍼”준다. “아이는 허겁지겁 구름을 퍼먹고 하얀 트림을” 하고 “엄마에게 손을 흔든다”. 트림하면 “가득 찬 속이 빈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의 유산을 충분히 먹었다고 생각하며 트림하지만 실제로 남는 건 없다. 엄마가 떠나버리면 아이에게 당장 밥을 차려 줄 사람이 없다. 그제서야 아이는 빈속으로 울며 엄마를 찾게 될 것이다. 동생의 죽음과는 다르게 엄마와의 이별은 아이에게 ‘배고픔’으로 직접 다가온다. 화자 역시 자신과 아이를 동일시하며 상실의 충격을 느낀다. 감정을 마구 표출하거나 매몰되는 단계에 그치지 않고, 이별 상황이 현실의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놀이터의 흙을 한 줌 쥐어 먹”는데, 흙 대신 구름을 먹여줄 엄마는 이제 없다. 화자는 “아무리 불러도 기척이 없”음을 깨닫고 길게 운다. 자신이 무언가 상실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이제 화자는 “홀로 감당해야 할 거리가 생겼다”(「가위-허공의 아이들」)는 자각을 갖고, 상실로 인한 아픔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집 나간 고양이」에서 화자와 잠시 이별했던 고양이는 화자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읽힌다. 화자는 문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는 찾아내지 못했던, “콘크리트와 철심에 갇혀 마른기침을 토해”냈던 마음에게 주저앉아 울더라도 “도망가지는 말자”고 말을 건넨다. 아프고 거대한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음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한다. 비록 두렵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기울”여 “조금 가까이 다가가 앉”고 “조금 가까이 다가가 안기로”(「우리」), 그리하여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마주보기를 결심한다.
시인이 제시한 ‘마주봄’의 구체적인 방법은 ‘시 쓰기’이다. 분명 현실은 ‘아스피린’과 ‘아달린’(**)을 구별할 수 없이 삼키는 혼란스러운 세계이다. 틀어진 관계에서 배신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비밀의 한 귀퉁이에서” “시와 호환되지 않아” “손을 들어도 악수하지 못”하는 불능의 상태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속에서도 “오늘은 잠이 들기 전에 시를 쓸 것이다”, “나는 써야만 한다”(「비밀의 화원」)는 말을 계속 되뇐다. 이별과 상실을 반복하며 삶을 슬픔과 후회로 점철할지라도, 도망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내면을 마주보겠다는 “위대한” 선언으로서의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 엄마가 왜 아이를 떠나는지는 알 수 없다. 앞 연의 내용과 관련짓는다면 아이가 “죽은 동생을 사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는데, 엄마는 그 요구를 들어줄 능력도 없고 칭얼거림을 받아줄 여유도 없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이유로 읽힌다. 다만 이것은 아이나 엄마가 직접 밝힌 게 아니라 화자(그리고 독자)가 상황을 지켜보며 유추한 것이다.
(**) 아스피린은 해열진통제, 아달린은 최면제 또는 수면제인데 이 두 약물은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쓰인 바 있다. 「날개」의 화자(서술자)는 감기에 걸려 아픈 자신을 위해 아내가 주는 약이 ‘아스피린’인 줄로 알고 있었으나, 우연히 그것이 ‘아달린’일 수도 있음을 발견하자 혼란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