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며 문장을 고쳐보려고 한 다스의 볼펜에 포함된 빨간색 볼펜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모든 문장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쓰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귀밑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내나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느낄 수 있는 엉덩이와 허리 사이의 굴곡 같은 것들을 검은색 볼펜은 묘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볼펜을 쥐는 즉시 머릿속에 줄줄 흘러나온 검은색 문장들이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는 빨간색 문장들을 써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온몸에 남은 오감의 경험을 문장으로 표현해야 할 텐데, 그건 쉽게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실제의 경험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 고통이란 이 양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됐다. 빨간색 볼펜을 손에 들고 괴로워하던 나는 그 고통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경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괴로운 것이다. 한 여자와 헤어진 뒤의 나는 그녀를 사랑하던 시절의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빨간색 볼펜을 들고 내가 쓰지 못한 것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작가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빨간색 볼펜으로 검은색 문장들을 고쳐썼을 때다.˝-`푸른 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사월의 미 칠월의 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