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졌다. 언제쯤이면 웃음과 망각과 옆 트레일러 거주자와 나누는 슬픈 섹스 외에는 중요한 게 하나도 없는 평행 우주에 한 발을 걸치게 될까.공원에서 일한 지 두 달 되었다는 얘기는 내가 오시리스의 전차에 태워 보낸 아이들이 거의 150명에 이른다는 뜻이었다. - P72
앞 베란다에 서서히 햇살이 가득 들어차면서 웃음의 도시에서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음을 예고했다. 그 순간 우리는 정적에 휩싸였다. 안락사 공원이 기를 쓰고 감추려 했던 엄숙함 같은 게 느껴졌다. - P91
그들은 나 같은 사별 조정관에게 애도 호텔의 꼭대기 층에 있는 원룸을 제공했다. 동료 중에는 세상을 구하고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그저 산처럼 쌓인 채 화장을 기다리고 있는 북극 전염병 희생자들과 스위트룸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시체 옆에 웅크리고 앉아 사별의 상처를 달래고 싶어 하는가족들을 상대하는 벨보이를 좀 좋게 부르는 것에 불과했다. 어느 날이든 지역 병원에서 사망한 이들이 생물재해 자루에 담긴채 지하실 복도에 줄지어 늘어서서 방부 처리의 세 가지 과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멸균, 방부, 항균 가소화 처리. 가족들은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을 벌었겠지만 우리 화장터는 수요를 따라잡느라 고군분투했다. 내가 하는 일은 무슨 로켓 과학도 아니었고 일을 견딜 수만 있다면 보수도 짜지 않았다. 애도 호텔이 문을 열고 장례 시장을 장악한 후 거의 3년 동안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며 내 이야기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캘리포니아 킹사이즈 침대에서 소각로까지 시체를 날랐다. - P171
마침내 오시리스의 전차가 하늘로 올라가자 쇠사슬과 유압식 발사체의 쉭쉭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그 소리에 장단을 맞춰 손뼉을 쳤다. 롤러코스터가 중간 표시 지점에 이르렀다가 곧 제일 높은 곳에 다다를 때까지 전차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선로의 굉음과 아이들의 흥겨운 괴성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커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롤러코스터가 첫 번째 뒤집기를 하고 10 중력가속도의 관성력을 유지하면서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나자 비명도 뚝 끊겼다. 두 번째 뒤집기 구간에서 뇌 기능이 멈췄다. 세 번째 뒤집기 구간에서는 아이들의 작은 심장이 더 이상 팔딱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들은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 버린듯 머리만 까닥거리고 있었다. - P70
저자는 맨체스터 대학교 의료정신과 교수로 내가 그녀와 공유할 만한 사회문화적인 접점은 거의 없지만, 뭐랄까 최근에 가장 감정적으로 공감하면서 읽은 책이다. 정신의학과 의사로서 자신이 겪은 우울증의 경험, 정서적으로 취약한 부분들을 서술하는데 어떤 부분은 내 이야기와 너무 닮아서 놀란 지점도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조심스러운 희망을 품었다. 앞으로는 그 끔찍한 불안과 두려움을 영영 겪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황량하고 공허한 감정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진이 빠지고 무력하면서 무감각한 기분까지 들었다. - P195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밤마다 베개를 땀과 눈물로 적시며 잠든다는 것, 내가 의사 일을 잘할 가망이 없고 무슨 일을 해도 잘할 것 같지가 않다는 것,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주변 모든 사람과 단절된 느낌이라는 것. 그리고 매번 꾸는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시험을 봐야 한다거나 무슨 과제를 끝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이 항상 있는데, 그 일을 하려면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 P197
나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의 모든 질환 중에서 가장 주관적이면서 개인적인 정신질환의 성격과 본질이 그리 간단한 무언가로 축약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 치료가 뇌의 모자란 물질을 채워주는 방법으로 그렇게 간단히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정신질환의 생물학적·사회적·심리적결정 요인을 모두 고려하도록 교육받았지만- 약도 물론 처방하긴 했으나- 치료는 늘 뒤의 두 방면에 중점을 두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다. - P201
정신과 의사 1년차 때 어떤 환자가 기분이 좋을 때는 잔디밭에서 잔디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말뜻이 그 순간 이해가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 이후로 항상 남들의 기분에 극도로 민감했다. 남들이 하는 말과 행동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고 거기에 담긴 의미를 걱정하곤 했다.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의 안 좋은 점이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그와는 다른 면에서 민감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세상과 다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고, 자연의 리듬과 다시 어우러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결코 병적인 현상으로 폄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 P206
나는 늘 실수를 했고, 거기엔 늘 대가가 따랐다. 우리 집에서는 아이가 실수를 저질러 부모를 힘들게하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취급됐다. 누구나 성장하면서 흔히 치르는 갈등이었다는 걸 지금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 행동을 사랑과 이해 그리고 때로는 엄한 통제로 다스려 나를 보다 성숙하게 자라게 해주기는커녕, 내게 분노를 쏟아내고 매몰찬 소외감을 안겨내 정서 발달이 저해되는 것을 넘어 꽤 오랫동안 정체되게 했다. 나는 50대가 된 지금도 가끔은, 언제까지나 분노와 반항심에 찬 10대소녀로 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P212
세상에 단일한 진실이란 없다. 저마다 몇 개의 안경 너머로 각자의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뿐이다. 남들의 기억과 인식과 가치관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람은 자기 필요에 맞는 진실을 만들어간다. 좋건 나쁘건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스토리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일기를 쓰면서,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만들어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거를 조금씩 되돌아볼 수 있고, 과거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차츰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금도 우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과거의 횡포에 맞서 그 힘을 무력화할 수 있다. - P225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렇게 급박한 심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몇 달 만에 처음이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틀어막는 밸브를 열어 김을 좀 빼고 싶었다. 하지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 P236
이야기를 하면 병이 낫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거의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기회를 놓쳐서 꼭 해야 할 말을 못 하기도 하고, 바라거나 목표했던 뜻을 생각만큼 잘 전달하지 못할 때도 있다. 긴 시간을 기다려 겨우 말을 꺼냈는데 중요한 내용은 말하지 못해 답답해하기도 한다. - P238
나는 어릴 때부터 집 안에 흐르는 ‘감정의 온도‘를 남달리 민감하게 판별하는 능력을 몸에 익혔다. 아버지가 지금 기분이 어떤지, 말을 붙이기에 좋은 때가 언제인지, 눈에 띄지 않게 내 방에 숨어 있어야할 때가 언제인지 기민하게 눈치챘다. 대개는 충돌을 피해 조용히 지냈지만, 불행히도 항상 그러지는 못했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는 가만히 있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내가 살기 위해 말 한마디, 곁눈질 하나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능력을 키운 덕분에, 나는 감정의 언어를 남들에게 더 잘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 P239
시기에 따라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정신역동치료를 통해 과거를 수용하는 노력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일상생활에 잘 대처하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인지행동치료CBT가 필요할 때도 있다. - P270
우울증은 도질 위험이 항상 있다. 하지만 재발 가능성에 대비하고 그 전조 증상을 감지할 수 있으면, 심각해지기 전에 손을 쓸 수 있다. 전조증상으로는 부정적 사고의 증가라든지 보다 심각한 상태를 예고하는 몇 가지 증상을 꼽을 수 있다. 내 경우는 잠이 오지 않거나 밤중에 배가 아파 깨는 것이 지금도 여전히 전조 증상이 된다. 인지치료가 우울증 재발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 - P284
나는 우울증이란 단순히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DSM이나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ICD에 제시된 증상들의 모음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거기에 나오는 것은 ‘우울증‘이란 것에 대한 근사치이자 구성개념이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학자들의 연구와 임상실무에는 유용하지만, 그 자체를 근본적 사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상적으로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는 우울증이란 DSM에서 제시하듯 단일한 병이 아니라, 서로 공통점도 있지만 매우 다른 점도 있는 복합적이며 다양한 병이라고 생각한다. - P288
"ㅇㅇ시장 사람들은 보수 중의 보수죠. 연배 있으신 분들은 60~70대가 상인들, 어떻게 보면 거의 다라고 보면. …… 가게 주인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은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하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죠.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6·25를겪은 사람도 있고, 박정희 세대 때 세뇌가 된 사람들은, 20년동안 사상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안 바뀌죠. 그거는 우리나라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초등학교 때 유신 하고 그랬잖아요. 나도 그때 아침 조회 때마다 ‘이룩하자 유신 과업‘카며 노래를 불렀는데 유신이 뭔지도 모르고." - P129
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자 제프리 알렉산더는 그 사회의 성스러움을 중심으로 모인 시민사회를 시민 영역(ivilsphere 이라 부른다. 시민 영역은 독립된 하나의 영역으로 국가, 경제, 종교, 가족, 공동체와 같은 비시민 영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각각의 영역이 비시민 영역인 이유는 민주적 의사소통을 통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는 권력, 경제는 효율성, 종교는 신념, 가족은 친밀성, 공동체는 습속에 의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민 영역은 각각의 영역이 독립적인 자율성을 회복해야 성장할 수 있다. - P131
대구경북의 공동체주의 마음의 습속은 시민 영역의 싹이 움트지 못하게 막는다.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는 시민 영역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것은 아직 민주주의 사회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