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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알라딘을 돌아다니다, 어쩌다 파이이야기에 대한 추천글과 서평들을 접하게 되었다.
나의 경우를 보자면, 서평이라는 게 쉽다면 쉬울 수도 있지만 꽤나 번거롭고 귀찮고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이다. 그래서 정말 이거 보는 사람 말리고 싶을만큼 고약한 책이 아닌 바에야, 대개 서평이라는 것을 쓰게만들만큼 괜찮다는 책에 대해서만 서평을 쓴다. 그러다 보니 정성어린 서평들이 올라온 책들을 보면 마음이 조금 더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 파이이야기도 추천과 서평을 볼 때까지만 해도 꽤 설레었고, 그럼에도 확인이 하고 싶어서 시내 서점까지 가서 책을 쥐어보고 훑어보고 내려 놓고 다른 책을 보다가 다시 집어들고 나온 책이었기에 내심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었다.
오랫만에 황량한 내 방 책장에 들여온 새 책인만큼 설레기도 했고, 책 서문을 통해 말걸어주는 작가의 목소리에 뿌듯하기도 했더랬다. 파이의 일상들 - 가족과 동물원과 종교 이야기에 '호오, 이것봐라'하며 어떻게 진행될 지 이리저리 재어보며 읽어가기 시작했지만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딱딱하고 철학적인 논리가 요구되는 사회과학 책이 아닌 바에야 소설 하나 읽는데 몇시간도 안 걸리는 내가 무려 1주일넘게 읽은 꽤나 기록적인 책이 되어버렸다. (읽는 게 꽤나 고통스러운 카프카의 책이나 알베르 까事?페스트같은 소설은 일단 제외하고... ;;;;) 재미있지도 재미없지도 않은 그저 심드렁한 느낌...
그리고 불현듯 몇년 전에 내가 이 책을 만났더라면 이렇게 무성의하게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치열하고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들추어내는 책을 꽤나 좋아했다.(물론 지금도 싫어하진 않는다. 다만 관점과 다루는 방식에서 마음에 든다 아니다가 결정될 뿐...)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그 책들을 접했을 때 다시 만난 치열한 문제의식과 현실의 모순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내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또한 앞으로의 삶또한 그럴 거라고 속삭이는 글들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일까하는 생각도 해봤더랬다.
꽤나 무기력한 상태에서 책을 읽었던지라 무기력하게 읽어낸 건 사실이고, 그래서 몇 년 전 혹은 몇 달 후에 읽었다면 언제나처럼 몇시간만에 가뿐하게 읽어치웠을 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재밌지만은 않았을 거 같다. 파이의 죽을 지도 모르는 현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하는 행위 하나 하나가 심드렁했다. 내 눈에 비친 생사의 경계에서 외줄타듯 아찔한 파이의 일상이 지독한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픈 발버둥으로 보였기에... 죽음을 잊기 위해, 공포를 잊기 위해, 죽음과 공포가 안겨다 주는 지독한 무기력함을 잊기 위해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래서 앞으로의 내용이 궁금하지도 기대되지도 않은 채 나의 무기력함과 오버랩되어 몇장 넘기다 내려놓고 그러다 다시 읽고 그랬나보다... 파이가 그래도 죽지 않기 위해 열심이었듯 나 역시 그래도 다 읽기 위해 끝까지 읽어내렸다.
이 책을 읽을 때의 나는 권정생 선생님이 주는 지엄하면서도 한없이 푸근함, 혹은 일상을 잊게 만들만큼 흥미진진한 활극을 기대했을 거다. 거기엔 무슨무슨 유명한 수상작이라는 것, 그리고 신작치고는 꽤나 많이 달린 리뷰와 꽤나 괜찮은 소감들이 그 기대에 한 몫했을 거다... 그럼에도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리고 태평양에서 우연히 들르게 된 섬이 꽤나 매력적이었음을 인정하지만 읽는 동안 느꼈던 나의 심심함과 열의없음으로 별넷까지는 주지 못할 거 같다.
마지막으로, 처음으로 이 책을 접하게 해 준 알라딘편집자의 추천은 안 믿기로 했다는 거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