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크 머리를 한 여자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 지음, 이지민 옮김 / 혜움이음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리뷰에는 약한 정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최근 문학 번역계에서 주변국으로 불리던 북미, 아프리카, 아시아권 소설의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안에서 이미 창작된,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번역, 출간되는 일은 독자로서 뜻깊고 행복한 일이다. 혜움이음출판사의 문학선은 그중에서도 북미 원주민 문학에 집중해 엄선된 작품을 국내 번역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된 스티븐 스레이엄 존스의 장편소설 『엘크 머리를 한 여자』는 특히 공포소설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원주민'에는 ‘한 지역에 본래 거주하던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땅의 주인이던 사람을 강조하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주민’이 유입되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주민이 원주민의 문화와 생활을 존중했다면 좋았겠지만, 익히 알려진 대로 백인들은 신대륙을 찾는 과정에서 원주민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그들을 몰아내기에 바빴다. 때문에 원주민은 주류였음에도 학살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안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나라의 원주민은 ‘소수자’로서 문화, 사회적 억압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문학은 더욱 발굴되어야 하고 문화 역시 보존되어야 한다.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의 『엘크 머리를 한 여자』에도 이런 현실이 뒷배경으로 자리잡는다. 굳이 ‘원주민’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내비치지 않아도 작가 스스로 소수자로서 경험하고 체험한 차별적 분위기가 이 책의 문장마다 녹아 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건 하나의 죽음이다. 공포소설이라는 분류에 걸맞게 강렬하고 끔찍한 사건이 소설의 도입에 묘사된다. 

“리처드 보스 립스의 사망사건은 ‘인디언 남성, 술집에서 몸싸움 도중 사망’이라는 기사로 보도될 터였다.”-15쪽

여기서 리키(리처드의 별명)는 기묘한 엘크의 환상을 보고 그것이 벌인 잘못을 뒤집어쓴다. 이 단편적인 상황의 피해자는 명백히 리키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독자는 이 책을 읽을수록 리키가 피해자가 아님을, 오히려 가해자임을 섬뜩하게 깨닫는다. 리키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엘크를 잔혹하게 죽인 후 뱃속의 새끼 엘크까지 죽인 과거가 있다. 소설의 도입에 리키가 본 엘크의 환상은 바로 그가 과거에 죽인 엘크였던 것이다. 이렇게 리키를 시작으로 그의 친구들은 모두 엘크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얼마나 오랫동안 대가를 치러야 할까?” 그들은 십 년 이상의 시간을 건너 죗값을 치른다.

작가는 위로는 엘크, 아래로는 사람인 이물을 설정함으로써 본래 엘크의 성별을 그대로 인간에게 옮겨 놓는다. 뱃속의 아기를 무참히 묻어버린 인간 넷에게 엘크가 가하는 복수는 상상 이상이다. 터지고, 잘리고, 맞는 고수위의 폭력이 낭자하지만, 그 안에서 엘크의 행동은 일관적이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하다. 이 소설은 과감한 육체적 폭력과 조여오는 심리적 공포를 동시에 잡았다. 동시에 환상을 등장시키며 현실을 벗어난, 풍부한 이미지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엘크 머리를 한 여자』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역전한다. 공포,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후의 복수’ 플롯을 작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새로운 방식으로 써냈다. 엘크의 보복에는 완전한 잔혹함만 남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끝은 의외로 안전하다. 인간들의 자식에 손자까지 멸해도 풀리지 않을 엘크의 뒤틀린 복수심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마저 저지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역시 이 소설의 매력이다.

하나의 복수는 얼마나 다양하고 끈질긴 모양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엘크 머리를 한 여자』는 ‘죗값을 치른다’는 말에 담긴 폭력성의 무게를 곱씹게 한다. 때로는 한없이 가볍게 왜곡되는 이 ‘죗값’은 실상 얼마나 무거울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끝날 수 없는 복수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엘크 머리를 한 여자, 그 복수의 망령이 지금도 우리의 곁을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가장 기괴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_

본 리뷰는 개인 SNS(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리뷰를 전문 발췌하였습니다.
원문 링크 : https://www.instagram.com/p/CcrwEP8Lq9B/?utm_source=ig_web_copy_lin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있는 그대로 오스트레일리아 나의 첫 다문화 수업 4
김하늘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나라와는 오래 전 인연이 있을 뻔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영어를 배우던 곳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유학 기회를 주었는데 어린 나이에 연고도 없는 곳에 가면 어렵지 않겠느냐는 부모님의 걱정에 무산되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아쉬움이 없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변화할 수 있는 유익한 체험인데 어린 나이에 할수록 더 넓은 세계를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나라였다. 지형의 특징에 따라 신기한 동물들이 있는 곳, 느긋하고 여유로운 사람들, 훌륭하고 아름다운 조형물인 오페라 하우스가 대표적으로 떠오르고 국기에 영국 국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접했을 때 꽤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누군가 물어온다면 할 수 있는 말은 몇 개 없다. 이 책의 제목에 더욱 끌린 것은 하나의 질문 때문이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오스트레일리아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부끄럽게도 이름부터 문화까지 그 나라에 대해 하나도 깊이 아는 것이 없었다. 코알라와 캥거루가 실제로 어떤 동물인지, 오페라 하우스가 얼마나 오랜 기간 건축되어야 했는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연 환경은 어떤지. 느긋한 사람들의 한편으로는 여전히 인종 문제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까지 문화적, 인종적인 요소를 가볍지만 꼼꼼하게 알아갈 수 있었다. (TV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윌리엄, 벤틀리 형제가 즐겨 먹던 야채 잼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 음식이라는 것도!)

가장 놀라웠던 건 오스트레일리아의 인종 차별 문제였다. 왜인지 나에게 그곳은 인종 차별이 거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는 원주민의 학살과 차별로 얼룩져 있었다. 그곳 원주민에게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린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내어 백인 문화를 답습시킨 관습과 당시에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도둑맞은 세대’. 그리고 그 악습이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웠다. (도둑맞은 세대에게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2008년에야 이루어졌다.)

본래 그 나라에 씌워진 인식이 긍정적일 때 사회적으로 만연한 병폐를 확인하면 놀라기 마련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종 차별적 사례들을 통해 어느 나라에나 문화, 인종적인 과오가 있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을 오히려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인종, 정치, 문화에 관한 내용은 『있는 그대로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제목에 담긴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런 인종 간 갈등이 있는 한편, 교육의 면에서는 매우 자유로운 나라가 오스트레일리아다. 가히 ‘지옥’이라 말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입시를 통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그곳의 학교는 유토피아에 가깝게 보였다. 오후 3시에 하교를 하고 자신이 원하는 스포츠를 마음껏 선택할 수 있으며 외국어를 다양하게 배운다는 점까지. 교육제도 안에 갇혀 있느라 운동과 외국어에 뒤늦게 재미를 느낀 나에게는 무척 부러운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유학을 갔어야 했는데!)

밑줄을 긋고 별표를 치자면 한없는 이 책 안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을 꼽자면 질문과 토론이 가능한 구성에 있다. 한 챕터가 끝나면 말미에 이 나라의 문화를 정리하는 질문이 적혀 있다. 아이들에게는 깊이 생각할 논의거리인 동시에 나이를 잊고 청소년 책에 푹 빠진 나같은 성인에게는 후에 만날 학생들에게 들려줄 깊이있는 이야깃거리처럼 보인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한 나라에 관한 가장 솔직한 질의응답 시간과 같았다. ‘있는 그대로 오스트레일리아’의 묵직한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이에 관계없이 입문서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종, 문화, 교육, 정치, 역사, 음식, 건축, 사회, 환경 등의 분야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색이 무엇인지 현지인의 시각으로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

+ 본 리뷰는 개인 SNS(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리뷰를 전문인용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www.instagram.com/p/CcMku6bpRP2/?utm_source=ig_web_copy_lin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출판사 창비에서 책을 무작위로 발송하는 시크릿 세계문학 서평단을 모집한다기에 '세계문학은 언제나 환영이야'라는 마음으로 반신반의하며 신청했다. 얼떨결에 선정이 됐고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받았다. (이게 무슨 행운인지) 포의 여러 단편집 안에서 유수의 작품을 만난 기억이 있어서인지 그의 유일한 장편이라는 이 책에 자연스럽게 기대를 걸었다.

포의 소설은 대체로 공포 장르에 뿌리를 둔다. 리사 크뢰거와 멜라니 R. 엔더슨이 공저자인 『여자가 쓴 괴물들』(2021, 구픽)에는 공포에 대한 탁월한 정의가 나오는데 에드거 앨런 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호러가 관습을 거스르는 장르"라는 그들의 표현을 빌려야 하겠다. 포의 소설은, 특히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는 명백히 관습을 거스르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애드거 엘런 포는 기이한 것, 특히 독자의 상상 이상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미지의 공포를 이 소설에서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의 배경을 바다로 설정한다. 서술자인 아서 고든 핌은 자신이 항해하는 동안 있었던 일, 특히 끔찍했던 경험을 독자에게 풀어놓는다. 포는 '핌'이라는 인물이 작가인 자신을 통해 실제 이야기를 세상에 보이는 것처럼 서술했다. 핌이 직접 쓴 듯한 서문을 꾸며 실었고 그와 친분이 있는 것처럼 후기를 썼다. 그는 후기에서 핌이 죽었다는 소식을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는 듯 뒷이야기를 요약한다.

1인칭으로 소설을 쓴 것으로도 모자라 픽션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서문에 드러난 A.G.핌의 망설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말이 "너무나 황당하다 할 만큼 신기한 내용"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핌은 자신의 이야기가 "어느 누구도 믿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며 "뻔뻔하고 교묘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쉬울 것이라 말한다. 이 서문에서 포는 핌의 입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실제와 동떨어진 소설을 쓸 것인지를 독자에게 암시한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에서 포는 '미지의 바다', 그리고 '미지의 야만인'에게서 오는 '익숙하지 않음'의 공포를 그린다. 그의 예고처럼 환상적인 동시에 현실과 멀어 보이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한다. 그것은 끝까지 완전히 해석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든다. 드넓은 바다 위에서의 표류는 사람의 목숨을 사소하게 만든다. 매일 죽음 앞에 서는 핌의 감정은 요동친다. 포는 자극적인 약탈, 살인, 식인 등의 소재로 분명한 잔혹함을 표현하는 한편에는 자연과 미지의 존재에게서 오는, 기묘함을 소설 전반에 깔아둔다. 

'야만인'의 섬 에피소드는 또 어떤가. 핌은 '말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위협을 받는 동시에 "테켈릴리!"라는 해석불가능한 외침에서 오는 그들의 공포를 읽는다. 포는 후기에서 "테켈릴리!"라는 비명 안에는 '흰' 것에 대한 '야만인'들의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흰 것을 보고 소리친 '야만인'들의 섬에는 모두 어두운 것뿐이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핌의 일행을 제외하면.

완독하고 나니 유수의 연구자들마저 이 소설을 미완성작으로 분류했는지를 알 것 같다. 실제로 에드러 앨런 포가 '미지의 공포'와 은유의 해석을 완성하지 않은 채 소설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독자의 다양한 상상을 유도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야만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의 해석되지 않는 행동과 바다 위의 공포는 결이 다르지만 독자의 내면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하다. 악취미인지 한 번 읽고 이해되지 않는 책을 여러 번이고 읽는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에드거 앨런 포가 남긴 단 하나의 단편,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즐거웠다. 창비세계문학 발간사에 적힌 최초의 소망처럼 "가보지 못한 길",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열린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포의 공포 속에서 헤엄친 만큼, 그의 소설을 다양하게 찾아 읽어야겠다.


+본 리뷰는 개인 SNS(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후기를 전문 발췌한 것입니다.
  리뷰 원문 보기 : https://www.instagram.com/p/CbzpKr4pRKc/?utm_source=ig_web_copy_lin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선집의 출현에는 언제나 궁금증과 설렘이 따라온다. 한 사람이 쓴 좋은 글을 추려내는 작업에는 그만한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글항아리에서 출간되는 비비언 고닉의 선집 소식을 듣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내 독서 지평의 얕음이었고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다음 든 생각은 '이 사람이 누구인가'하는 것이었다. 작가 소개의 화려한 이력 가운데 그녀를 부르는 '작가들의 작가'라는 호칭이 눈에 띄었다. '작가들의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이 말이 붙은 사람 치고 글을 재미없게 쓰는 이는 없었기에, 비비언 고닉의 선집 첫 번째 『사나운 애착』을 읽어보기로 했다.

굴지의 논픽션 작가들은 한 번쯤 기자였다. 비비언 고닉도 마찬가지다. 좋은 논픽션은 끈질기고 세심한 관찰에서 나오기 때문에 기자를 해봤던 사람들에게 유리한 분야다. 비비언 고닉의 특기는 '일인칭 비평'인데 이것은 '일인칭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주 어려운 글쓰기 기법이다. (어쩌면 일인칭 소설 쓰기보다 일인칭 비평 쓰기가 더욱 난해하다.) 일인칭은 이야기와 작가의 간격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에 글이 먹히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것이 일인칭 글쓰기다. 하지만 그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마침내 한 편의 글을 써낸다면, 독자는 자신에게 직접 다가오는 그 이야기에 속절없이 몰입하게 된다. 비비언 고닉은 그런 일인칭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다. 그녀가 『사나운 애착』에서 던지는 화두는 과거에 '어머니'와 그 주변에 있던 여성들이다.

"우린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온 사람들,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닮아버린 두 여자다."-72쪽

딸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작가는 위의 문장으로 엄마와 딸의 기묘한 관계를 요약한다. 엄마와 딸에게는 각각 자신의 세상이 있다. 그들은 살아온 환경과 조건, 삶의 영역이 완전히 같지 않다. 그러나 남처럼 다른 두 사람이라 해도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 영향을 준다면 닮기 마련이다. 엄마와 딸은 종종 서로의 유사한 부분을 확인하며 '사랑'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 애착은 때로 사납다. 서로의 차이를 못 견디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유대감을 확인해야 하는 관계. 그것이 비비언 고닉이 말하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는 딸과 '어머니'이다.

"내가 속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로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109~110쪽

엄마와 딸은 공통점과 차이점 이외의 다양한 층위에서 부딪히고 얽힌다. 이 책은 온통 그 둘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쉽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것'. 표지마저 두 여자가 한 방향을 바라보는 이 책은 그 시절 어머니와 딸이 함께 지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비언 고닉은 특유의 일인칭 시점과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자신의 '엄마'에 대해 쓴다. 누구라도 몰입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이야기를.

물론 작가와 엄마 이외에 삶의 반경 안에 있던 여러 인물(대부분 여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비비언 고닉은 '소수자'의 감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여성이었으며, 동시에 기민하게 주변의 일을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작가 소개를 읽고 그녀의 기자 경력이 논픽션 집필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예상했지만, 사실 비비언 고닉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자의 감각을 타고난 것이었다. 커너 부부, 러빈슨 가족, 네티. 수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주변애 존재했다.

『사나운 애착』은 비비언 고닉 선집의 첫 번째 책으로선 순조로울 정도로 알차다. 사납지만 애정 가득한, 피 튀게 싸우다가도 서로가 없이는 허전한 두 여자와 그 주변을 깊이 관찰하기 원하는 독자에게 주저없이 권하고 싶다. 때로 한 인생에 가장 깊이 관여하는 부모, 특히 '엄마'라는 존재를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선집의 다음 권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쓰는 데에 주저함이 없던 이 작가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마아
마리 파블렌코 지음, 곽성혜 옮김 / 동녘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동 청소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전공 수업을 통해서였다. 동화와 청소년 소설이 막연히 어린이를 위한 '쉬운 글'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주마다 아동문학을 살펴보며 내 생각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틈틈이 관련 소식을 찾아보았다. 최근 눈에 띄었던 것은 동녁 출판사에서 출간된 생태 소설 『사마아』였다.

이 소설은 여성, 환경, 생태를 주제로 한다. 어느 것 하나도 관심 없는 키워드가 없다. 아니, 실은 셋 다 매우 흥미롭다. 이 세 가지는 종종 함께 붙어다닌다. 여성을 빼면 환경을 말할 수 없고 환경을 빼면 여성의 역사가 한 귀퉁이 잘린다. '에코 페미니즘' 등의 분야에서는 여성 존재와 환경을 밀접하게 연관짓는다. 생명을 준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끝없는 착취를 당했다는 것이 둘의 공통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마아는 여자가 사냥꾼이 될 수 없는 부족에 산다. 나무를 '사냥'해서 돈을 버는 부족 사람들은 폐허가 된 세상에서도 환경을 착취하고 있다. 소설 속 세계가 완전한 판타지가 아니라 미래의 디스토피아라는 것은 읽다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마아는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동경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마을을 빠져나온다. '여성'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자면 사마아는 꿈을 좇는 인물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서사를 한번 비튼다. 독자는 '여성'뿐 아니라 '생태'와 '환경'도 이 소설을 이루는 중요한 주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이가 지긋하고 현명한 노인 랑시엔은 사마아에게 사냥꾼들이 "나무를 죽이는 걸 막아"라고 하지만 사마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사냥꾼들을 뒤쫓다 구렁에 빠진다.

사마아가 구렁에 빠져 오랜 시간 주변을 관찰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동시에 매우 중요하다. 구렁 밖에서 벌어지는 착취와 파괴를 서서히 잊고 사마아는 자신과 함께 놓인 나무와 미물, 친구 '트위다'의 이름을 붙인 동물과 지낸다. 다친 발목이 나을 때까지 물과 나무 곁에서 지내는 사마아의 눈에 자연과 생명의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사마아는 점점 사냥꾼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닫는다.

'환경'과 '생태'의 키워드 안에 '여성'이 존재한다. 어린 사마아의 눈은 섬세하게 구렁 안의 생활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씨앗을 떨어뜨리는 나무를 보며 "나무는 엄마"라는 것을 깨달은 사마아는 나무의 이름을 나이아라고 부른다. 트위다, 나이아처럼 주변 식물과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사마아가 그만큼 자연과 친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아의 씨앗에서 나온 싹을 '폴록'이라고 부르며 사마아는 점점 구렁 안의 생태에 스며든다.

이런 장면이 아주 느린 속도로, 사마아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후 그녀가 구조되는 장면은 매우 극적이다. 사냥꾼들은 사마아와 함께 발견된 자연을 '사냥'한다. 토막나는 자신의 세계와 공격적인 사냥꾼들의 날카로움에서는 생태의 부드러움과 차분함을 느낄 수 없다. 사마아의 구출 과정은 '사냥'이 '생명'을 앗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아는 '완전히' 죽지 않는다.

비록 나이아를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씨앗의 생명은 살아남는다. 자연에 접촉한 아이 한 명의 용기와 정성이 만들어내는 것은 생태의 회복이다. 노인 랑시엔의 지혜가 사마아에게 이어졌듯 나이아의 씨앗은 폴록을 거쳐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 군집을 이룬다. 사마아가 살린 건 나무 하나의 씨앗이 아닌 지구였다.

디스토피아 미래에 사냥꾼을 꿈꾸던 여성은 자연과의 교감 후 '사냥'의 폭력을 몸소 체험한다. 『사마아』는 단순히 하나의 키워드에 집중한 소설이 아니다.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냥꾼 집단은 '식량'을 얻기 위해 자연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하지만 소녀 사마아는 구덩이에서 자연을 건져올렸다. 울창한 숲 가운데 당당히 서있는 그녀의 뒷모습은 혼자지만, 후손들은 생태의 시초로 사마아를 기억할 것이다.

치열한 생존의 끝에서 만난 진짜 생명이 싹을 틔우는 순간, 사마아의 여정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한 소녀가 이룬 생명과 자아의 회복을 보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