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다산책방)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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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번역도 되기 전에 원서로 읽을 만큼 궁금했던 작품이다. 이후 몇 년이 지나 호주의 104세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존엄사 소식이 전해졌고 그 내용이 책과 겹쳐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최근에는 호주와 네덜란드에서 부부가 함께 안락사를 결정한 사례도 보도되었다.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과 당사자 사이의 의견차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되었고 가족의 사랑과 당사자 선택의 간극에 관한 고민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작은 마을에 사는 루이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일하던 카페가 문을 닫자 급하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휠체어에 의존하는 전신마비 환자 윌 트레이너의 간병인으로 고용된다. 시급은 높은 만큼 그녀는 이 일이 곧 고통을 동반할 것임을 직감한다. 윌은 한때 능력 있는 사업가이자 익스트림 스포츠와 여행을 즐기던 인물이었으나 사고 이후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고 안락사를 결심한 상태다. 루이자는 단지 생계를 위해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윌과의 첫 만남부터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루이자와 윌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루이자의 진심 어린 말과 행동은 윌의 굳게 닫힌 마음에 균열을 만든다. 루이자는 윌의 안락사 계획을 알게 된 뒤 충격을 받지만 그의 삶을 바꾸기 위해 직접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했으나 가끔은 미소도 보였다. 여행을 떠나고, 콘서트에 가고,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하며 두 사람은 점점 깊은 유대를 쌓아간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윌의 마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미 비포 유는 미비포유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이후 애프터 유와 스틸 미로 이어진다. 이 시리즈는 한 여성의 성장기를 다루지만, 첫 권의 핵심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한 남자의 자기 결정권이다. 작품은 전신마비 상태로 존엄을 잃었다고 느낀 인물이 죽음을 결정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생존 자체보다 자기다움의 지속 가능성이 인간에게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그린다. 또한 가장 가까운 가족의 사랑과 당사자의 선택 간의 간극을 조명하고 있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다. 죽음을 선택한 한 인물의 결정을 두고, 우리는 삶의 조건, 통제, 사랑, 존엄성 등 다양한 층위에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생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타인의 선의가 당사자의 의지를 대신할 수 있는가? 사랑은 정말 구원이 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 결정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왜 가능한지, 또 우리는 그것을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작중 윌의 결정은 단순히 고통을 피하려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사고 이후 전신마비가 되면서 모든 일상을 타인의 손을 거쳐야만 삶이 유지되는 상태에 놓인다. 여기서 핵심은 육체의 불편함이 아니라 인생의 선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다. 동시에 최소한으로 보장되어야 할 인간 존엄성의 소멸이기도 하다. 삶을 구성하던 능동적 행위들이 제거된 상태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자신이라 부를 수 없었다. 생존은 단순한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통제 가능성의 유무에 따라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 드러난다.



죽음을 결정하는 행위는 흔히 포기, 절망, 혹은 삶의 실패로 간주된다. 하지만 윌의 결정은 그와는 다르다. 그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더는 자신을 자신이라 부를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한 것이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무너진 통제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주체적 표현이자 저항이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자기 정의의 마침표이자 마지막 자기 복원일 수 있다. 우리는 이 결정을 단지 비극으로만 간주할 수 있을까?



타인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흔히 사랑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 사랑이 살아야 한다는 전제를 강요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개입이 된다. 작품 속에서 주변 인물들의 설득은 선의로 출발하지만 결국 윌의 결정권을 뒤흔드는 외부의 압력으로 작동한다. 그의 존재는 보호받아야 할 상태로 정의되고 판단은 유예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결정을 바꿔도 되는 걸까? 선의는 언제부터 통제가 되며, 그 통제는 왜 쉽게 정당화되는 걸까?



사랑은 언제나 구원의 언어로 제시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 믿음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루이자는 윌을 사랑했지만 그 감정이 그의 존재 조건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자각하고 있었다. 감정은 의식을 대체하지 못하며 사랑이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종종 그 사람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죽음을 결정하는 순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선택을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사랑이 강할수록 그 결정이 더 무겁게 거부당할 수 있다. 루이자는 끝내 윌의 선택을 존중한다. 중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그 결정이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서로가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삶을 연장하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일은 아니다. 목숨은 하나뿐이고 결정 또한 단 한 번뿐이다. 우리는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충분히 고민하고 나서 서로의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는 죽음조차 한 인간의 자기표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삶의 끝에서 내리는 결정은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 않으며 우리는 타인의 선택 앞에서 쉽게 감정으로 반응하지만, 그 감정이 판단을 대체할 수는 없다. 과연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선택을 허용하거나 금지하려는 건 아닐까? 존엄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감정 없이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은 가족의 사랑과 당사자의 선택 사이의 간극을 고민하게 만든다. 



#미비포유 #조조모예스 #다산책방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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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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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브루노 야시엔스키의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혁명이 가능하던 시절의 뜨거운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이 방식으로 외쳤다. 흑사병이 퍼진 파리, 붕괴되는 자본주의, 자치국을 세우는 이민자들과 무너지는 질서. 인간판 동물농장이라 불릴 만하다. 유토피아는 끝내 도달할 수 있을까? 파리의 몰락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가능성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경기 침체로 해고된 공장 노동자 피에르는 여자친구 자네트에게조차 실직 사실을 숨긴 채 거리로 내몰린다. 결국 자네트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분노에 휩싸여 폭행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고, 노숙자로 전락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느 날, 고향 친구 르네를 우연히 만나 그의 도움으로 시립 정수장 수압관리탑에서 일하게 된다. 르네는 세균 연구소에서 일하며 흑사병 균을 비롯한 치명적 병원체들을 돌보고 있었다.



르네는 흑사병 세균이 든 시험관을 보여주며 한 말에 피에르는 자극받아 결국 시험관을 훔쳐 정수장에 투입한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 파리는 봉쇄되고 죽음이 도시를 휩쓴다. 이후 도시 곳곳에서는 각 민족과 이념 세력이 자치국을 선언하고, 지배 계급을 전복하려는 혁명이 시작된다. 판창퀘이는 황인종 공화국을, 유대인은 자치령을, 백계 러시아인은 제국의 재건을 꿈꾸며 파리를 세계 축소판으로 만든다. 혼란과 전복 속에서 유토피아는 폐허 위에 싹튼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문자 그대로 무너졌다. 전쟁으로 인프라가 파괴되었고, 경제는 회복되지 못했으며,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쫓겨났다. 프랑스도 상황은 비슷했다. 공장은 일주일 중 이틀만 가동되었고, 일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은 하루아침에 빈민이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존엄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계는 인간을 대체했고, 계급은 고정되었으며, 인종과 출신은 배제의 기준이 되었다. 구조조정은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체제를 위한 기술처럼 작동했다. 사람들은 숫자가 되었고, 일상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정치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유럽 각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두려워했고, 프랑스 역시 우익과 좌익의 충돌이 거세졌다. 파업과 실업이 일상화되었고, 극우 정당은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며 세를 넓혔다. 빈곤은 범죄와 연결되었고, 이념의 차이는 적대와 혐오의 언어로 바뀌었다. 이 불안정한 시기에 쓰인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단지 허구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현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며, 문학이 가장 어두운 현실을 상상으로 직시하는 방식이었다. 불가능한 시대에 가능한 상상만이 남았다.


브루노 야시엔스키의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속 피에르는 그 모든 붕괴의 끝에 서 있었다. 일자리를 잃고,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고, 연인에게조차 버림받은 그는 더 이상 살아 있는 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배고픔에 쓰레기통을 뒤졌고, 벤치에서 노숙하다 우연히 친구 르네를 만난다. 그를 통해 정수장이라는 임시 일자리를 얻지만, 거기서 본 것은 인간보다 더 냉정한 실험실이었다. 흑사병을 담은 시험관을 본 순간, 피에르는 파괴라는 방식으로 세계에 말을 걸기로 한다. 아무도 듣지 않으니, 그는 도시 전체에 병을 뿌린다.



저자는 전염병을 병리학이 아니라 언어로 본다. 피에르가 흑사병을 뿌리는 장면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세계에 남긴 하나의 메시지다. 제도는 그를 구제하지 않았고, 사회는 그를 잊었으며, 제시된 해답은 없었다. 그는 복수하지 않는다. 그는 증명하고 싶었다. 존재하고 있음을, 버려졌음을, 남겨졌음을 말이다. 전염병은 그가 던진 유일한 언어였고, 병든 도시만이 그 말을 들었다. 저자는 이 파괴를 미화하지 않지만 사회가 누군가를 얼마나 철저히 침묵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결과, 파리는 응답한다. 죽음으로.


피에르의 죽음 이후 도시에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 각 인종과 계급, 이념이 모여 자치 정부를 선언하며 도시를 분할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은 황인종 공화국을, 유대인은 자치령을, 앵글로색슨은 연합국을 세운다. 모두가 평등과 자치를 말하지만 결과는 새로 칠한 권력일 뿐이었다.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고 단지 새로운 지배 구조가 탄생했다. 이 소설은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도달한 것은 인간판 동물농장이었다. 각 세력은 이전의 억압을 답습하고 해방을 외치며 타인을 배제한다. 권력은 얼굴만 바꿔 반복되었다.



지금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 삶을 통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 해고자, 디지털 문해력에서 밀려난 이들은 더 이상 시장의 주체가 아니라 배제된 잉여로 취급된다. 기술은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그 편리함은 배제된 자들의 생명 위에 세워진 것이다. 피에르가 흑사병을 퍼뜨린 이유는 단지 분노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다시 누군가의 절규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에도 데이터 바깥, 체제 바깥에서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라고 속삭이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또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말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배제된 타인이 존재해왔다. 평등을 외치면서도 구조 속에서 새로운 불평등을 복제하고, 해방을 주장하면서도 또 다른 억압을 정당화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역설을 드러낸다.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한 꿈이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진짜 유토피아가 가능하려면 먼저 인간의 욕망부터 바꾸어야 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가 만들려는 세상은 진짜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더 정교한 동물농장인가?



인간판 동물농장을 그린 브루노 야시엔스키의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도시가 무너진 뒤에야 드러나는 진짜 얼굴들을 보여준다. 각자 평등과 해방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질서와 배제가 생긴다. 이상을 말하면서 누군가는 밀려난다. 이 작품은 혁명이 어떻게 반복되는지, 구조가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를 말한다. 또한 이 소설은 단순한 재난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체제도 인간의 욕망과 맞닿을 때 유토피아는 어려운 과제임을 말해준다.



#나는파리를불태운다 #브루나야시엔스키 #김영사 #인간판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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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편지
설라리 젠틸 지음, 최주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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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제 무더위를 날려줄 미스터리 소설의 계절이다. 이 시기에 맞춰 위즈덤하우스에서 미스터리 스릴러 설라리 젠틸의 살인 편지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들어 있는 액자식 구성으로 현실의 작가 해나와 조언자 리오의 편지, 그리고 해나가 쓰는 추리소설이 번갈아 전개된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바깥과 안을 오가며 하나의 인물을 중심으로 양쪽 세계가 교묘하게 연결되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 속에서 완벽하게 감춰진 트릭과 의심은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로 이어진다.



호주에 거주하는 작가 한나는 미국 보스턴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그녀는 현지의 생생한 분위기를 구현하기 위해 보스턴에 사는 리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부 묘사와 배경 정보를 보완해나간다. 이 작품은 작가 한나가 쓰고 있는 소설과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편지 교환이 액자식 구조로 전개된다. 리오는 점차 과도하게 개입하며 언젠가부터 그의 편지에는 해나가 쓴 소설 속 살인 사건들이 그대로 발생하고 있다. 해나의 소설 속 리얼한 묘사를 돕기 위하여.



프레디, 케인, 윗, 마리골드는 우연하게 보스턴 공공도서관에서 의문의 비명 사건이 벌어진 그 순간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졌으며 다음 날 이 비명 소리가 살인 사건이라고 알게 된다. 케인은 전과자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온 우주가 케인을 살인자로 만들기 위하여 움직이는데 과연 살인이 일어나던 시각에 열람실에 있던 그가 진짜 범인일까? 그러나 마지막에 상상하기 힘든 반전이 일어나는데....


설라리 젠틸의 살인 편지는 읽을 때 방점을 어디에 두고 읽느냐에 따라 컬러가 달라지는 특이한 작품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나오지만, 현실 인물과 작중의 인물의 이름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독자는 이 둘을 묘하게 혼동한다. 이는 출판사의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원제는 소설 속 소설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번역본은 리오의 편지에 포인트를 두었다. 전자에 방점을 두고 읽는다면 흥미를, 후자는 사회 문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본문에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급 인물이 다섯 명이나 나온다. 이런 장치로 인하여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즐기려는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를 꿈꾸는 이에게 작법서로도 다가온다. 창작 활동을 하기 전 인물 설정, 자료 조사, 배경 묘사, 피드백 등등 많은 부분에서 글쓰기하는 방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작품의 맥을 끊는다는 평가를 받는 리오의 피드백 편지를 통해서 가장 많이 알 수 있다. 다른 작가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랄까? 



먼저 흥미를 위하여 사건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인상 깊었던 점을 살펴보자. 저자 설라리 젠틸은 살인 편지에서 강한 흥미 유발을 위하여 첫 챕터에 사중 구조로 시작하였다. 첫 번째는 작품 속 현실 작가 해나가 이 모든 것을 쓰고 있다는 것, 두 번째는 그녀의 작품 속 작가인 프레디의 현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녀가 쓰고 있는 작품으로. 여기에 리오의 피드백과 작품 속 저자가 오늘 범인과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는 멘트까지. 독자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첫 챕터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등장인물들은 해나가 현실에서 차용하였으며 그 과정을 프레디가 답습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인하여 독자는 해나와 프레디를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이다. 이것을 위한 또 다른 장치가 현실의 리오와 작품 속 리오이다. 심지어 리오는 이름조차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이 해나의 소설인지 프레디의 현실인지 모호해져 독자의 긴장도는 배가 된다. 개인적으로 이 장치 덕분에 수많은 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수상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두 번째로 한국 출판사인 위즈덤 하우스에서 초점을 맞춘 리오의 편지에 초점을 맞추면 이 작품은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아니라 공포물에 가까워진다. 자신의 꿈을 투영하여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롤 모델, 팬심으로 빠지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현실 리오의 모습이다. 리오의 직업은 출판사에 투고하였을 때 언제나 거절당하는 포지션에 있는 작가이다. 반면 해나는 이미 상까지 받은 인물이기에 리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는 처음엔 단순한 팬심으로 해나의 작품을 돕기 위하여 피드백을 보낸다. 헤나는 호주에서 보스턴을 배경으로 작품을 쓰고 있었고, 그는 보스턴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낸 피드백 내용은 보스턴의 배경, 미국과 호주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다른 점, 해나가 글을 쓸 때 놓쳤던 부분 등이다. 완결도 나지 않은 책의 각 챕터를 보낼 정도면 둘 사이에 이미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즉, 매우 순수한 팬으로서의 건강한 교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그가 무너져 그녀의 작품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건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한 후이다. 즉, 이전까지는 나긋나긋한 봄과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 한겨울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해나의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이 그가 사는 곳에서 그대로, 우연히 발생한다. 해나는 이 사진들이 하나둘씩 쌓이면서 결국 리오의 편지를 증거로 FBI에 신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소설에서 당연하다는 듯 FBI는 그를 놓치고 그는 호주로 입국한다.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 설라리 젠틸의 살인 편지는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힌다. 사건 중심으로 읽으면 치밀한 트릭과 반전의 재미가, 리오의 편지에 주목하면 집착과 감시가 만들어내는 현실 공포를 느낄 수 있다. 흔히 리오의 편지는 타 작가에 대한 과잉 참견이어서 읽기 불편하다는 평이 있지만 사실은 그 광잉이 그의 정신이 무너져 내림과 연결되고, 작품 속 트릭을 배가 시킨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저자의 센스에 감탄할 것이다. 더운 무더위를 잊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살인편지 #설라리젠틸 #미스터리스릴러 #위즈덤하우스 #여름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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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세트 - 전2권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외 지음, 김연수 옮김, 안지희 감수 / 히스토리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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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흔히 요부, 희생자, 혹은 사랑에 눈먼 여왕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조지 버나드 쇼의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함께 엮은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세트를 읽으면 전혀 다른 인물이 드러난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그리지만, 공통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그녀의 사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전략이었거나 열망이라는 감정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사랑은 이집트와 로마의 운명을 바꾸었다.



두 작품의 클레오파트라는 같은 인물이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버나드 쇼의 그녀는 성장 중인 소녀이며, 권력에 대한 본능적 직감을 가진 전략가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그녀는 이미 왕권을 손에 쥐었으나, 사랑에 눈이 멀어 그 손아귀에서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있는 비극의 여왕이다. 하나는 국가를 세우는 과정을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국가와 함께 무너지는 모습을 담아낸다. 그러나 둘 다, 그녀가 역사의 관찰 대상이 아니라 서사를 주도하는 주체임을 그리고 있다.



카이사르는 계산적인 통치자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이집트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한다. 아이처럼 굴면 여왕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며 감정 표현까지 통제한다.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는 유모에게 억눌린 열여섯 살 소녀였지만, 카이사르 앞에서는 눈물을 삼키고 명령을 흉내 내며 여왕처럼 행동한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감정에 휘말려 정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한다. 한 사람은 여왕으로 만들고 떠나고, 다른 한 사람은 함께 몰락한다.



그러면 왜 같은 사람인데 상대방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묘사되었을까? 단지 작가의 차이일까? 아니다. 그녀는 시대가 요구한 방식대로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카이사르는 여왕을 원했기에 그녀는 그에게 맞는 여왕이 되었으며, 안토니우스는 여인을 원해서 그녀는 그에게 맞는 여인이 되었다. 정치의 언어를 말하던 그녀는 사랑의 언어로 바뀌었고 목적을 위해 살아가던 존재는 감정에 목숨을  건 존재로 변했다. 이 극적인 변모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녀가 그녀라는 인물보다 시대와 욕망이 만든 역할에 가깝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언제나 무대 위에 있었다. 무대는 시대가 만들고 관객인 그녀의 남자들은 그녀에게 그에 걸맞은 연기를 요구했다. 카이사르 앞에서 그녀는 스핑크스처럼 침묵했고, 안토니우스 앞에서는 나약한 여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세의 반영이었다. 로마라는 제국의 파도 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흔들려야 했던 존재다. 고정된 인물이 아니라 상황에 반응하는 역할로 존재했기에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동시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유동성은 그녀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으로 만든다. 버나드 쇼는 그녀를 열여섯 소녀로, 셰익스피어는 치명적인 여인으로 그려냈지만, 두 극작가 모두 사실상 동일한 구조를 그리고 있다. 어린 그녀는 아직 체계로부터 자유롭고 감정을 통제하며 외교의 언어를 배워나간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통제의 언어를 내려놓고 내면에 귀 기울이며 감정의 파국으로 진입한다. 그녀는 둘로 쪼개진 두 인물이라기보다 한 인물의 전환 구조 안에 존재하는 상이한 시기의 생존 의지이다.



또 다른 차이는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시작을 만들어준 인물이다. 그는 그녀를 정치의 언어에 입문시켰고 냉철함과 절제를 요구했다. 카이사르 앞에서의 그녀는 배우가 아닌 학생이었고, 그만큼 성장의 가능성을 가진 미완의 존재였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이미 완성된 존재로 대했다. 그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없었다. 오직 사랑하고, 보여주고, 함께 몰락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그 차이는 그녀의 본성이 아니, 그녀가 대응해야 했던 관계의 문법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종종 한 인물의 진면목을 찾기 위해 변화를 배제하고, 일관된 성격이나 고유의 기질을 추적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접근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다가오게 만든다. 그녀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상태에 있다. 시대에 따라, 권력에 따라, 그리고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그녀는 정체성의 고정값이 아닌 유동성의 극단에 놓인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읽어내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능력으로 생존했고 몰락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면서도 여인이었고, 계산과 감정 사이 줄다리기를 계속한 인물이다. 두 작가는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세트에서 서로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조명했지만, 공통적으로 드러난 건 단일한 성격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정체성이었다. 그녀를 희대의 요부로 낙인찍은 건 로마인의 시선이었고, 이후 많은 문학 작품도 그 이미지를 답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문학 속에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다면성과 불확정성 덕분이었다. 이제는 낙인과 답습을 넘어, 그녀의 진짜 얼굴을 독자가 직접 마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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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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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04년, 미모 비탈리아니는 왜소증을 가진 채 태어나 조각가인 삼촌 치오 밑에서 착취당하며 자란다. 그는 오르시니 가문의 막내딸 비올라를 만나 처음으로 지식과 가능성을 배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날게 하고 지탱하겠다고 맹세하지만, 비올라는 열여섯 생일에 강제 약혼 소식을 듣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후 미모는 다른 도시로 팔려가고 그의 재능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러나 몇 년 후 미모는 조각가로서 성공하지만, 성장한 비올라와의 관계는 점차 어긋나기 시작한다.



비올라는 남편과 사회에 무시당하며 도도새처럼 자신을 감춰 살아가고, 미모는 파시스트 정권의 조각을 맡으며 정치적 타협에 휩싸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선택을 비판하며 갈등하지만, 결국 미모는 유대인 친구의 도움 요청을 계기로 정권에 맞서다 투옥된다. 전쟁 후 풀려난 미모는 다시 비올라와 재회하고, 그녀는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한다. 그러나 두 오빠는 그녀의 공약을 막기 위해 출마를 저지한다. 비올라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며 끝까지 맞서려 하고 그런 그녀에게 또 다른 장애물이 닥친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는 불가능에 도전한 두 사람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재능으로 날아보고 싶었던 소년 미모는 신분과 환경에 가로막혔고, 하늘을 날고 싶어 비행기를 만들던 비올라는 귀족 사회 여성이라는 신분에 막혀 답답함을 느끼는 상황에 만났다. 이런 묘한 공통의 상황으로 인하여 이 책은 단순한 우정담이 아니라 시대라는 감옥 속에서 마음속에 샘솟는 꿈을 어떻게 실현하며 존재하고, 기억되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격동의 이탈리아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다. 귀족 계급과 파시즘 정권의 권력 구조 아래 개인은 쉽게 말소되거나 조작됨을 매우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모순 속에서 미모와 비올라는 서로의 꿈을 지지하며 연대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선택을 수없이 좌절시킨다. 각자의 자리에서 마주한 억압은 정치적이면서도 철저히 일상적이며 그 안에서 우정은 개인적 이상을 넘어 생존의 몸부림으로 작동한다.


비올라는 지식과 자유의지를 갖춘 존재로 시대가 허용하지 않는 자율성과 정치의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들에 의해 통제되고, 남편에게 억압당하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선거 출마를 저지당한다. 비올라는 이런 자신을 도도새에 비유하는데 이는 그런 시대적 구조가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침식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비올라의 결혼으로의 도피를 위한 비행 추락은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사회적 제한에 대한 거부의 결과이다.



그녀의 우뚝 선 여자라는 표현은 침묵을 견딘 이가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사적 존재가 공적 주체로 전환되는 시점에 선 인물의 의지를 상징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계속해서 그녀를 시험하며 이 과정은 시대가 개인의 꿈과 목소리를 어떻게 제한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자기 세계에 갇힌 삶을 넘어 공적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정치 참여가 아니라 억압된 존재가 시대를 향해 스스로를 주장하는 근본적인 선언이다. 그녀는 발화되지 못한 말들의 총체이자, 억압된 모든 여성의 대리인으로 서 있다.



미모는 예술가로서 성공하지만 그의 성공은 철저히 정치권력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다. 그는 유대인 친구의 도움 요청을 통해 파시즘의 실체를 깨닫고 예술가로서의 방향을 전환한다. 이는 단순한 전향이 아니라 자신이 조각하는 존재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전환점이다. 이후 그는 다시는 권력을 위한 조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와 동시에 감옥에 수감된다. 이 과정은 예술이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기억의 증언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단순히 비올라에 대한 애정과 스스로의 성공을 위해 시작한 조각이지만 사회적 고난과 그녀로 인해 나름의 철학을 만들어 가는 그는 급기야 모든 사람의 호기심을 참지 못하게 하는 작품으로 마무리한다. 그를 보면 종종 미켈란젤로가 떠오르는데, 이는 그가 조각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꺼내는 작업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해방시키듯 미모 역시 원석 안에 잠든 존재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그의 조각은 창작이라기보다 구출이며 존재의 기록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미모의 회상이 현대에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분명 그의 피에타에 큰 비밀을 숨겨 놓았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결국 수도원은 피에타를 숨겨 놓는다.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각국의 석학들이 찾아오지만 작중에서는 여전히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그려진다. 다만, 미모의 죽기 전 마지막 회상을 통하여 인간의 눈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을 독자는 깨닫게 되며 그 이유와 비밀에 전율을 일으키게 된다. 덕분에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여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는 우정을 넘어선 연대, 존재를 위한 몸부림,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저항을 조각이라는 예술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다. 시대가 꺾은 존재를 예술이 어떻게 복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너무 순순히 인간을 따랐기에 멸종한 도도새를 살린 조각가로 남는다. 그 방법이 상당히 충격적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방식에 반기를 들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책은 아름답지만 존재를 증명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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