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세트 - 전2권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외 지음, 김연수 옮김, 안지희 감수 / 히스토리퀸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흔히 요부, 희생자, 혹은 사랑에 눈먼 여왕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조지 버나드 쇼의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함께 엮은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세트를 읽으면 전혀 다른 인물이 드러난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그리지만, 공통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그녀의 사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전략이었거나 열망이라는 감정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사랑은 이집트와 로마의 운명을 바꾸었다.



두 작품의 클레오파트라는 같은 인물이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버나드 쇼의 그녀는 성장 중인 소녀이며, 권력에 대한 본능적 직감을 가진 전략가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그녀는 이미 왕권을 손에 쥐었으나, 사랑에 눈이 멀어 그 손아귀에서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있는 비극의 여왕이다. 하나는 국가를 세우는 과정을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국가와 함께 무너지는 모습을 담아낸다. 그러나 둘 다, 그녀가 역사의 관찰 대상이 아니라 서사를 주도하는 주체임을 그리고 있다.



카이사르는 계산적인 통치자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이집트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한다. 아이처럼 굴면 여왕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며 감정 표현까지 통제한다.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는 유모에게 억눌린 열여섯 살 소녀였지만, 카이사르 앞에서는 눈물을 삼키고 명령을 흉내 내며 여왕처럼 행동한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감정에 휘말려 정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한다. 한 사람은 여왕으로 만들고 떠나고, 다른 한 사람은 함께 몰락한다.



그러면 왜 같은 사람인데 상대방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묘사되었을까? 단지 작가의 차이일까? 아니다. 그녀는 시대가 요구한 방식대로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카이사르는 여왕을 원했기에 그녀는 그에게 맞는 여왕이 되었으며, 안토니우스는 여인을 원해서 그녀는 그에게 맞는 여인이 되었다. 정치의 언어를 말하던 그녀는 사랑의 언어로 바뀌었고 목적을 위해 살아가던 존재는 감정에 목숨을  건 존재로 변했다. 이 극적인 변모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녀가 그녀라는 인물보다 시대와 욕망이 만든 역할에 가깝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언제나 무대 위에 있었다. 무대는 시대가 만들고 관객인 그녀의 남자들은 그녀에게 그에 걸맞은 연기를 요구했다. 카이사르 앞에서 그녀는 스핑크스처럼 침묵했고, 안토니우스 앞에서는 나약한 여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세의 반영이었다. 로마라는 제국의 파도 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흔들려야 했던 존재다. 고정된 인물이 아니라 상황에 반응하는 역할로 존재했기에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동시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유동성은 그녀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으로 만든다. 버나드 쇼는 그녀를 열여섯 소녀로, 셰익스피어는 치명적인 여인으로 그려냈지만, 두 극작가 모두 사실상 동일한 구조를 그리고 있다. 어린 그녀는 아직 체계로부터 자유롭고 감정을 통제하며 외교의 언어를 배워나간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통제의 언어를 내려놓고 내면에 귀 기울이며 감정의 파국으로 진입한다. 그녀는 둘로 쪼개진 두 인물이라기보다 한 인물의 전환 구조 안에 존재하는 상이한 시기의 생존 의지이다.



또 다른 차이는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시작을 만들어준 인물이다. 그는 그녀를 정치의 언어에 입문시켰고 냉철함과 절제를 요구했다. 카이사르 앞에서의 그녀는 배우가 아닌 학생이었고, 그만큼 성장의 가능성을 가진 미완의 존재였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이미 완성된 존재로 대했다. 그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없었다. 오직 사랑하고, 보여주고, 함께 몰락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그 차이는 그녀의 본성이 아니, 그녀가 대응해야 했던 관계의 문법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종종 한 인물의 진면목을 찾기 위해 변화를 배제하고, 일관된 성격이나 고유의 기질을 추적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접근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다가오게 만든다. 그녀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상태에 있다. 시대에 따라, 권력에 따라, 그리고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그녀는 정체성의 고정값이 아닌 유동성의 극단에 놓인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읽어내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능력으로 생존했고 몰락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면서도 여인이었고, 계산과 감정 사이 줄다리기를 계속한 인물이다. 두 작가는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세트에서 서로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조명했지만, 공통적으로 드러난 건 단일한 성격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정체성이었다. 그녀를 희대의 요부로 낙인찍은 건 로마인의 시선이었고, 이후 많은 문학 작품도 그 이미지를 답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문학 속에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다면성과 불확정성 덕분이었다. 이제는 낙인과 답습을 넘어, 그녀의 진짜 얼굴을 독자가 직접 마주해야 할 때다.


#클레오파트라의남자들세트

#클레오파트라와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와안토니우스

#조지버나드쇼

#윌리엄셰익스피어

#영미희곡

#히스토리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