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폭한 독서 - 서평가를 살린 위대한 이야기들
금정연 지음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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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점심, 아버지와의 식사. 어머니는 파마를 하러 나가신 후 연락두절.

 

 

 

아버님   아들아, 내 너한테 할 말이 조금 있는데 말이지.

아들놈   그냥 편하게 말하시면 되실 것을. 어찌 그리 무게를 잡으시는지요.

아버님   그래, 니가 회사일을 열심히 하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다만, 주말 밤이면 방구석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긴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들놈   가끔 독후감을 쓰고는 합니다만.

아버님   그렇지. 독후감. 네 엄마 말에 따르면 가끔씩 책도 공짜로 받고 그런다면서?

아들놈   예전에 몇몇 출판사에서 내다 버리는 셈 치고 한 권씩 보내주기는 했습니다만,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습니다. 글쓰는 기한을 한참 넘겨버리기도 하고, 증정받은 책에다가 별점 테러를 하기도 하고, 또 뭐랄까...

아버님   됐다. 아무튼 글을 쓰기는 쓰는 모양이구나.

 

짧은 침묵. 숟가락이 입으로 두 세번 오간다.

 

아버님   이번에 글 하나만 쓰자. A4용지 한 장 분량으로다가.

아들놈   네?

아버님   주제는 은퇴의 변. 그동안 이 회사에서 얼마나 많이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뭐 그런 글들 있잖아.

아들놈   아니 어찌 입사 3년차에게, 20년 이상의 회사 경험을 담아내라 하시는지요.

아버님   그냥 써. 너 독후감 쓰듯이 말야.

아들놈   제 글 읽어보신 적 없으시잖아요. 그걸 그렇게 썼다가는 말년에 사람들한테 조롱의 대상이 되실텐데요.

아버님   독후감 쓸 때 책 다 읽고 쓰냐? 그런거 아니잖아. 똑같아. 네 생각대로 그냥 쓰면 OK야.

아들놈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아버님   수요일까지다. 31일날 메일 돌릴거야.

아들놈   못쓰겠는데요.

아버님   한 번만.

아들놈   아뇨 절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아버지가 직접 쓰시죠.

아버님   아니 이런, 천하의 불효자식을 봤나...

아들놈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버님   야! 아들! 야! 야!

 

 

 

 

밥그릇은 싱크대로. 그리고 아들은 집 앞 카페로 피신한다.

 

일요일 오후였다. 날씨는 쌀쌀했고 집안 분위기는 더욱 쌀쌀했다. 빙하기가 도래하기 직전에 겨우 빠져나왔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전날 들고나갔던 가방은 그대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축복받은 집』이나 챙겨가지고 나올걸... 북클럽 1월 선정도서인데, 단편 「섹시」의 독후감만 하나 써놓고서는 아직 다 못 읽은 상황이었다. 대신 가방에는 『난폭한 독서』가 들어있었다. 이번 주 지하철로 오가면서 읽기는 다 읽었던 책이다. 금정연의 서평이 그래왔듯 명확하게 정리가 되는 책은 아니었다. 닉 캐러웨이의 비판론, 희망의 공식 R=VD, 트위터로 RT 조리돌림 당하는 이야기들만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정도였다. (아마 졸면서 읽어서 이랬겠거니. 지난주는 좀 피곤했다.) 흐린 기억보다 명확한 건 언제나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 쪽이다. 『난폭한 독서』를 읽으면서 읽고 싶어진 책들을 그때 그때 쟁여놨다. 금정연의 글감이 된 13편의 작품 중 4권의 책이 담겨있었다. 『가르강튀아/팡타그리엘』, 『걸리버 여행기』, 『외투ㆍ코』, 『미크로메가스ㆍ캉디드 혹은 낙관주의』가 그 목록이다. 이는 해당하는 장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반면 목록에 들지 못한 책들은 너무 두껍다거나(900 페이지 대 작품도 있었다.) 아니면 아직은 읽을 때가 아니라고(해당하는 장이 별 감흥이 없었다고) 느꼈거나 둘 중 하나의 이유였다.

 

아무튼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를 주문하 자리에 앉아 『난폭한 독서』를 꺼내 들었다. 다시 첫 장 라블레를 펼쳤다. 누가 후장사실주의자 아니랄까 모든 소설은 엉덩이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로 썰시작된다. 처음 읽었때의 기억들이 하나 둘 깨어난다. 이를테면 뿌직, 뿡 다시 뿡뿡과 같은 사운드들부터 말이다. 그다음 세르반테스 OK. 그리고 다음 볼테르도 OK. 점점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렇게 30분 만에 마지막 장 카프카에 도달했다. 정성일의 추천 글을 읽게 된 건 아메리카노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물론 2회차라 가능한 이야기였. 1회차  무의식에 새겨뒀이미지를 다시 끄집어내고, 그 이미지를 필터 삼아 글을 읽는 것이. 그러면 내게 재미없거나 의미 없거나 하는 부분들은 알아서 제쳐진다. 흔히 말하는 속독과는 조금 다르다.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꺼내 읽기에는 『난폭한 독서』의 분량도 결코 만만치 않다. 게다가 난 지금 학문으로써의 독서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럼 이제 또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1,2회차를 마쳤으니 3회차로 가는 거다. 3회차는 끄적임이다. 보통 리뷰나 서평이라 말하고, 나는 감상이라 말하는 그 과정이다.

 

 

"어떤 작품을 정말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작품 전체를 고스란히 다시 쓸 수밖에 없다." - 7 p.

 

 

난폭한 독서』 7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명쾌한 문장이다. 한 줄이면 『난폭한 독서』에 대해서는 굳이 감상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동의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지만) 독자의 해석은 책의 어느 단면일 뿐이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에도 상세한 책의 내용 설명은 포기한다. 대신 책의 이미지를 뼈대로 쓴다. 2회차 독서에서 끄집어낸 이미지는 3회차 독서중요한 재료가 된다. 약간의 조리 과정을 거쳐 글 속으로 던져진. 그러면 책을 읽어본 사람끼리만 알 수 있는 지점이 감상에 새겨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워터마크처럼 말이다. 리뷰와 프리뷰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 금정연의 글이 그 좋은 예다. 서서비행』에서 밝힌 것처럼 금정연은 책과 꼭 닮은, 책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을 쓴다. 『난폭한 독서』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종의 평행우주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금정연의 제1원칙이고, 그장마다 글쓰기의 장르를 넘나드는 이유이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집요한 글쓰기이다. 작가를 물고 늘어지고, 작중 주인공도 가만 놔두질 않는다. 현실로 끄집어와 거칠게 다루고,세게 다루고, 막 대한. 책 제목대로다. 그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난폭한 독서』의 감상을 시작해볼까?

 

 

 

 

 

 

 

 

 

 

 

 

 

 

 

 

 

 

 

(그러기 앞서 일단 난폭한 독서를 읽고 오시오)

 

 

 

 

 

 

 

 

 

 

 

 

 

 

 

 

 

 

 

 

...

 

 

 

눈치가 빠른 분들이라면 벌써 알아차리셨을지도 모르겠다. 실은 『난폭한 독서』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야심차게 3회차 독서 운운하며 글을 전개한지 10분 만에 소재가 다 떨어졌다. 이 책은 서평집이다. 금정연이다. 고전을 다루고 있지만 양장본은 아니다. 그래서 딱딱하지 않다. 나는 전문 서평가도 아니고 파워북로거도 아니기에 어떻게 더 멋있게 풀어낼 수가 없다. 질문이 들어온다면 답변드릴 수는 있다.(보통 학창시절 PT 발표 후 Q&A 시간은 질문이 없거나 짜고 치는 고스톱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끝으로 이웃분들께는 서점에 가거든 이 책 말미에 실린 정성일 씨의 추천 글을 읽어보라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정확히 98% 일치한다.(조용히 묻어가자.) 아주 좋은 감상이다. 금정연씨가 두고두고 읽을 만한 그런 글이다.

 

감상을 마무리 지을 때가 되니 '은퇴의 변'이 다시 아른거린다. 나는 책을 최소 2회는 읽어야 감상을 적을 수 있는 사람이다. 창의력이 부족해서 생각만으로는 글을 전개할 수 없다. 그러니 읽지 않고(또는 경험하지 않고) 쓰는 글은 그 결과가 뻔하다. 금정연이라면 '은퇴의 변'을 어떻게 소화해낼까? 한 번씩은 읽다 말고도 글을 쓰는 것 같던데... 그리고 '은퇴의 변'의 압박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이 집에서 쫓겨난다면 원룸은 어디에다 구해야 할 것인가? 낙성대? 숙대 앞? 아니면 녹번동?

 

문득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이것은 상생을 위한 대타협이다. 나는 읽어야 쓸 수 있는 사람이니, 아버지의 회사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내주십사 요청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 아들이 그 책을 3회차까지 소화하고 '은퇴의 변'을 작성하겠노라고 말이다. 마감이 수요일이라 하셨으니, 화요일까지만 어떻게 책을 좀 전달해주시면 안 될까요? 존경하는 아버지. My Daddy. 뭐라고 하셨죠? 아~

 

...

 

당장 짐부터 싸라고요. 정녕 그 말씀이신가요? 아버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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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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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을 피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나를, 그리고 나와 바람이 난 여자를 찾아내 제거하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녀의 말이 진담 반 농담 반인 것처럼 그냥 웃어넘기려 시도해보지만, 역시 CR도 먹히지 않는다. 그녀는 콕 집어 말한다.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거든. " 그녀의 진담에 진땀만 삐질 흘러내린다. 딱히 죄진 것도 없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김연수의 소설 제목 『세상의 끝 여자친구』가 떠오른다. 조금 이따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지갑이라도 한 번 살펴봐야겠다. 제임스 본드가 지니고 있는 살인면허를, 사랑스러운 그녀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확인해봐야겠다. 짐작건대 그녀는 아마 1종 보통일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배우만 바꿔서 친구 배씨에게도 듣고, 먼저 결혼한 형들한테도 듣는다. 임자 있는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들 그러고 사는가 보다. 그렇다면 이게 바로 세상의 법칙일 터. 물론 남과 여의 입장이 정확히 반대인 경우도 있겠지만, 아무튼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그만큼 큰 위험 부담을 안고 가는 일이다. 시작은 일시적인 문제였겠지만, 끝은 반영구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운다. 몰래 숨어 불장난을 한다. 하지 말라면 더 한다.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말이다.

 

서울이든, 보스턴이든, 아니면 저 아래 캘커타가 되든 간에 이런 유의 이야기는 만국 공통이다. 얼마나 많은 커플이 소설 속에서 바람을 피우고, 걸리고, 파국을 맞이했던가. 배경이 다르다 해서 굳이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줄거리다. 대게는 욕을 하며 읽고, 몇몇은 뜨끔하면서 읽는다. 『축복받은 집』에 담긴 줌파 라히리의 단편 「섹시」 역시 다르지 않다. 등장인물도 정석대로다. 미랜더(어리숙한 젊은 여자), 데브(능글맞은 유부남), 데브의 아내(부재중인 아내)가 등장한다. 미랜더의 일상 속으로 데브가 끼어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신 이름의 일부는 인도식 이름이군요. (중략) 아니, 뒤의 몇 글자를 빼고 '미라'가요. 제 이모 이름이 미라에요." - 145 p.


"난 외롭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요. (중략) 내가 만난 여자 중에 이렇게 다리가 긴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 147 p.

 

작업은 순조로웠다. 느끼한 작업 멘트 몇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여자가 넘어왔다.(역시나 멘트의 완성은 얼굴이었을지도) 미랜더의 눈에 콩깎지가 붙어버렸다. 늘 그렇듯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시작부터 그가 유부남임을 알았던 미랜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불타는 나날들이 두 남녀 앞에 펼쳐졌다. 그러던 어느 날. 데브는 다년간의 답사로 보장된 데이트 코스, 마파리움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같은 장소, 같은 남자, 그리고 몇 명의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데브의 데이트는 늘 그런 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은 미랜더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데브는 속삭였다. 아무 말이나 해보라던 그녀에게. 이렇게.

 

"당신은 섹시해요." - 150 p.

 

생각없이 던진 돌에도 개구리는 죽는다. 아무렇게나 던진 한 마디가 미랜더의 이성을 완전히 끝내버렸다. 그날 이후 미랜더의 귀에는 데브의 "섹시해요(영어였을 테니, You are sexy.)"가 환청이 되어 울려 퍼진다.

여기까지 오는데 딱 다섯 페이지. 매끄러운 진행이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전개도 마찬가지. 데브의 아내가 돌아오면서 미랜더와 데브의 불장난은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 둘의 만남을 그저 낮잠 정도로 여겼던 데브와, 운명적 사랑이라 믿고 싶었던 미랜더 사이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애당초 둘의 만남은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었다. 미랜더만 빼고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독자들도, 심지어는 백화점 화장품 코너의 직원도 말이다.

 

"모든 주름은 스물다섯까지 생겨요. 이후론 주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일 뿐이랍니다." - 143 p.

 

갈라진 틈이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둘의 만남은 미랜더의 실크 가운처럼 계속해서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만약 단편이 여기서 끝났다면 구질구질한 이 글도 굳이 작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쇼 타임이다. 불장난 소설들이 저마다의 불을 뿜는 것은 대부분 이 지점부터다. 복수, 광기, 집착.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섹시」의 선택은 그런 요소들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느낌이랄까? 줌파 라히리는 미랜더를 훈육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우리 어머니들이 늘 하시는 말씀. "나중에 너랑 똑같은 딸(혹은 아들) 한 번 키워봐"가 그것이다. 어릴 땐 칭찬인 줄 알았는데, 결국 저주로 밝혀진 그 무시무시한 시추에이션을 미랜더에게 선사한다. 일곱 살 사내 아이, 로힌의 모습을 한 채로 말이다.

 

"토요일에 바쁜 일 있어?" - 163 p.

 

그렇게 피곤한 주말이 시작됐다. 하는 짓이 정말 미랜더의 사랑 방식과 쏙 빼닮았다. 로힌은 나라 수도 이름 맞추기를 통해 끊임없이 지식을 확인하고자 한다. 마시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커피를 조른다. 계속해서 생 떼를 쓴다. 지겹도록 보챈다. 요구가 관철될 때마다, 금기를 깰 때마다, 아이는 더 큰 것을 넘본다. 그림을 그리게도 하고, 종국에는 미랜더의 옷을 갈아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까?(미랜더가 눈치가 없기는 하다.) 이어서 라히리는 로힌의 입을 빌려 미랜더를 깨우치기 시작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다. 일곱 살의 입으로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데브를 연상시키는 능글맞은 멘트부터, 순진한 듯 섬뜩한 멘트들까지. 적어도 내가 아는 일곱 살 중에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없다. 특히 그중에서도 로힌이 말하는 '섹시'의 정의는 이 단편 전체를 관통한다. 책을 읽던 내게도 강한 한 방이 되어 돌아온 부분이다. 나조차도 앞으로 어디 가서 '섹시하다' 소리를 쉽게 내뱉지 못할 것만 같다.

 

"아줌마는 섹시해요.(중략)
그 말 말이야. 섹시, 무슨 뜻이니?(중략)
아이가 입가에 손나발을 만들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건 ○○ ○○○ 사람을 ○○한다는 뜻이에요." - 172 ~ 173 p.

 

(충격으로 인해 그 구절을 온전히 옮겨 적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섹시함은 정말 그런 것일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 까지는 아니지만 일순간 소설이 정리되어 버렸다. 이 소설이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할 건덕지도 없을 만큼 말이다. 당사자인 미랜더의 마음도 일순간 정리되어 버렸다. 그녀는 아마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훈육이었다. 잠깐, 그런데 데브는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음... 내 생각에는 아마 평생 저러고 살 것 같다. 작업 멘트와 콧수염이 통하는 동안에는 말이다. 대신 언제 한 번 크게 걸리기는 할 것 같다. 유심히 지켜봤는데 맺고 끊는 스킬이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쿨하지 못하게 말이야...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자는 줄만 알았던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1시였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뭘 하고 있느냐고 말했다. 아까 분명 잔다고 하지 않았냐고. 내일은 월요일이라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까지는 아니지만 일순간 감상이 정리되어 버렸다. 글은 여기서 급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법칙일 터. 그러니 다들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나는 아직 읽고 싶은 책이 많다.

 

PS. 감상만으로 아쉬운 분들은 거미의 노래 <어른 아이>를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미랜더의 18번 곡으로 손색이 없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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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정치발전소 강의노트 1
조성주 지음 / 후마니타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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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의 선택은 탈당이었다.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더 이상 혁신을 이뤄낼 수 없다면서 말이다. 안에서 도저히 안 된다면, 밖에서라도 강한 충격으로 변화를 이끌어내겠다고 그는 말했다. 야권이 또 한 차례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여당에게는 나쁠 것이 없는 장면이었다. 평소라면 서프라이즈가 책임졌을 일요일 아침 11시. 오늘은 안철수의 기자회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프로그램 시청 소감보다 더 많은 네티즌 의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철수에 대한 실망과 성토의 의견이 주를 이뤘고, 간간이 안철수를 응원하겠다는 의견도 나타나기는 했다. 실제 국민 다수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그랬다.

 

기자회견의 전문을 재차 읽어보았다. 안철수, 그가 바랐던 혁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완벽한 백신이자 드라마틱한 한 방. 그의 머릿속에 있던 혁신 한 방이면 정말로 다음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을까? 답을 확인할 길은 사라졌다. 적어도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는 말이다. 대신 이것만은 확실하게 남았다. 문재인 당 대표는 안철수를 설득하지 못했고, 안철수는 당을 설득해보려는 의지 자체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갈등이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든 집단과 계층은 자기 이익을 우선시한다. 파이는 한정되어 있다. 어떻게든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타협해야 한다.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 안에서 서로를 직시하고, 타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 책,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에서는 위와 같이 민주주의를 정의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안철수의 이번 탈당 행보는 그다지 노련해 보이지 않는다. 명분도, 실리도 모두. 그는 링 위의 룰을 무시한 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에게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절대적 교리나 이론이 세상을 모두 설명해준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고 알린스키는 끊임없이 말한다. 그렇게 믿고 있을 때 현실의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받아들이고 변화의 대상으로 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상을 바꿔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비록 자신의 주장이 '1백 퍼센트 천사의 편'에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되, 반대로 문제 해결의 순간에는 50퍼센트, 때로는 10퍼센트의 정당성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략) 그렇지 않은 경우 많은 사람들이, 1백 퍼센트의 정당성과 진리가 있다고 믿는 바로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너무나도 쉽게 냉소와 환멸로 빠져들게 된다." - 109p

 

발췌한 내용대로다. 안철수가 똑똑한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조금 더, 아니, 아직 한참 더 영리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국민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말뿐인 혁신 대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구태의연, 호남당 이미지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질적인 그 무언가를 말이다.(아직까진 그 스텝이 불분명하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의 정치 인생도 이대로 끝이다. 안철수 신드롬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총선을 넉 달 앞두고 벌어진 이번 탈당 사태의 후폭풍으로 인해, 야권의 월요일은 어느 때보다 분주할 것이다. 부디 당과 각 개인들의 현명한 처신이 있기를 바란다. 공통의 목표를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하면서 말이다.

 

PS. 책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 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없어서 덧붙여 본다. 이 책은 진보 진영의 정치인, 약자 진영의 정치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 진보 진영의 아버지 알린스키의 사상을 담은 책,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규칙』으로 들어가는 입문서 격으로 읽히기도 한다. 뜨거운 심장보다는 차가운 머리의 정치를 강조한다. 꼭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하다. 갈등이 있는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게다가 쉽고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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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법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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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햄버거였다. 목요일. 가족들이 모두 저녁 늦게 들어오는 날이다. 낮 시간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진이 기억이 났다. 한 남자가 햄버거 속 치즈를 베어 물고 길게 늘리는 사진이었다.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같이 바람을 쐬던 직장동료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며 빵 터져버렸고, 나는 도무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어느 커뮤니티 유저의 댓글은 사진 속 상황을 '누에고치의 현현'이라고 명명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발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버거의 이름은 '모짜렐라 인 더 버거'라고 했다. 이름 한 번 괴상하지 않은가? Mozzarella in the burger 라니. 맞는 영문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예문으로 Fire in the hole, Deep in the night. 등이 자연스레 떠오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보통의 목요일이었다면 퇴근 후 시청역 근처 버거킹으로 향했겠지만, 그날만큼은 단대오거리역 근처 롯데리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모짜렐라 인 더 버거 속 패티의 정체가 정말로 치즈인지, 누에고치의 실인지 확인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나는 하얗고 길쭉하고 늘어나는 그것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버거킹부터 롯데리아까지, 회사 근처에서부터 동네까지, 그러니까 이건 2호선 시청역에서부터 8호선 단대오거리까지의 한 시간여. 나는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책을 읽는다. 그 길 위에서 볼라뇨를 읽었고, 부코스키를 읽었으며, 종종 페렉이나 타부키, 금정연을 읽었다. 근래 구입한 도서 목록이  『난폭한 독서』, 『analrealism vol.1』, 『의인법』 인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최근에는(이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후장사실주의자'들에 대한 끌림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날은 햄버거 이전에 오한기의 『의인법』을 읽은 날이었다. 마침 수록된 단편들 중에는 「햄버거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햄버거 속에 문학의 원천이 있다고 집착하는 작가와 그 친구의 이야기. 더 줄이면 그냥 '기승전햄버거'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그렇다. 나로서는 다르게 풀어서 정의내리기 어려웠다. 그것은 『의인법』 속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재미있기는 하다. 대체 어디서 온 소설들인가? 심지어 알라딘의 한 100자 평에서는 이 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 중 한 명이 김기덕이라고 한다. 나는 오한기의 단편들, 그것들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단대오거리에 도착했다. 모짜렐라 인 더 버거를 주문하자, 치즈스틱을 얹어줬다. 행사라고 했다. 버거의 실물은 아담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지만 낮에 본 사진처럼 하얀 물체는 길게 늘어나지 않았다. 뜨겁긴 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허여멀건한 물체가 누에고치의 실인지 치즈인지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만 한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추가로 생각하게 되었다. 관점을 바꿔보는 것이다. 문제는 버거가 아니라 사진 속 사람이 아니었을까? 실은 그가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가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 맛이 나지 않는 버거를 와그작 씹어 먹으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손님을 맞으며 웃고 있는 저 아르바이트생만큼은 그 답을 알고 있으리라. 물론 이 같은 질문들을 아르바이트생에게 한다 해도 순순히 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정신병자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리고 한상경이라면 내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는 테이블 위에 『의인법』을 놓아둔 채 혼자 중얼거렸고, 아무리 기다려도 한상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한기의 단편들은 햄버거와 닮았다. 햄버거는 번과 번 사이에 어떤 패티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어떤 버거인지 결정된다. 납작한 번이지만 그 안에 세계를 담을 수 있다. 꾹꾹 눌러 넣으면 모든 것이 들어간다. 우리는 그것을 버거라 부른다. 오한기의 번에서는 볼라뇨의 향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의인법』에서 느낀 재미에도 지분이 존재한다면, 볼라뇨에게도 최소 26.6% 정도는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맛 좋은 번 위에 오한기는 '단대오거리'를 집어넣었고, '소설가'를 집어넣었다. '총기'들을 집어넣었고, '여자'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집어넣었다. 오한기는 그 모든 것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은 그 책을 『의인법』이라 부른다. 1만 3천원이다. 롯데리아에서는 팔지 않는다.

 

그날 내가 머물렀던 장소는 롯데리아였고, 단대오거리역이었다. 길 건너 언덕 위에는 볼링장이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된 그 동네가 우리 동네였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 본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만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단대오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내가 먼저 쓰고 싶었다. 나는 소설가도 소설가 지망생도 아니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다시는 모짜렐라 인 더 버거를 먹지 않겠다는 생각도 같이. 버거도, 소설도, 사람 따라 취향을 타는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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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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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책을 펴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너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이 모험이 얼마나 길어질지, 또 얼마나 깊어질지 하는 것에 대하여, 잠실역의 저 익숙한 환승 통로에서, 계단을 오르고 둘로 나뉜 양 갈래 길을 지나, 네가 수백 번을 지나다녔기에,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도, 단지 네 기억만으로 방향을 알아낼 수 있는 그곳에서, 코끝을 쨍하게 하는 아저씨 특유의 애프터 쉐이브 향이, 아직 덜 말라 촉촉한 어느 여인의 머리카락 끝에서 올라오는 샴푸 내음이, 퇴근길이었다면, 달달하게 풍겨왔을 델리 만주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그러나, 결국은 재빠르게 지나칠 것이 또한 분명한, 너의 눈꺼풀은 마치 2호선 모든 직장인들의 피로를 짊어진 사람처럼 무거우나, 한 손에는 아까 말한 그 한 권의 책을 쥐고서, 책이란 본래 네모난 것이기에 쉽게 손에서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때마침 도착한 텅 빈 열차에 올라타, 방금 전까지 누군가 따스하게 달궈놓은 자리에 엉덩이를 딱 붙인 채로, 어젯밤 책갈피를 꼽아 두었던 장의, 그러니까 <잠자는 남자>의 삼십팔, 혹은, 사십오나, 칠십삼 페이지의 문장을, 글자들을 눈으로 흡입하려는 찰나에, 페렉의 텍스트가 안겨줄 무력감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어쩌면 반복되는 수면부족 탓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그때마다 매번,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 같이, 아주 완벽한 타이밍에 기억의 흐름을 끊는다, 오늘도 너의 앞자리에 앉은 여자는, 또는 대학생은, 사실은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만, 어쨌건, <잠자는 남자>를 손에 쥔 채로 잠자는 남자를 눈 앞에 마주하게 된다.

 

 

문장에 쉼표가 많다. 끊어질 듯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다. 쉼표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다. 단언컨대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도 쉼표가 많다. 쉼표를 따라 정직하게 호흡을 멈춰가며 책을 읽었다. 자연스레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출퇴근길 지하철의 독서. 그 1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읽을 수 있는 페이지는 길어야 네댓 페이지 정도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읽거나, 자거나, 호흡을 멈추거나, 다시 들이마시거나의 반복. 그 모든 행위가 전부 <잠자는 남자>를 읽는 방법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는 OO 한다"로 풀어가는 2인칭 시점의 소설. 여기서 '너'라고 불리는 주인공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목소리는 '너'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너'를 혼자라 부를 뿐이다. 목소리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혼자인 '너'를 만들어 내고 싶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모두 로그아웃 해주세요. 하던 그 우스갯소리처럼 말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단계를 필요로 한다. '너'는 시험을 보러 가지 않는 것부터 시작한다. 찾아오는 친구를 모른 척하고, 만들어진 습관을 제거한 다음, 떠오르는 이미지를 버리고, 모든 생각들은 멈추기로 한다. 몸의 감각 또한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연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만을 남겨둔 채 모든 것을 해체한다. 사회가 떨어져 나가고, 무리가 흩어졌으며, 모든 의미에 의미를 두지 않는 단계. 핸드폰 공장 초기화의 그 상태보다 더 초기화된 인간으로 '너'는 돌아간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실험 노트를 작성해 나간다.

 

 

나는 계속해서 목소리의 기록을 읽어 나간다. 처음에는 그저 난해하기만 했던 '너'의 이야기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 시간만큼은 지하철 2호선도 실험실이 된다. 나는 장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너'와 같이 해체해나간다. 나의 일상을, 명함을, 나의 생각들을 해체한다. 같이 침잠한다. 하지만 책 속의 '너'와는 다르게 나에게는 한계가 존재한다. 잠실에서 갈아탔으면 시청에서는 내려야 한다. 해체했던 뭉탱이들을 덕지덕지 다시 붙여야 한다. 그렇다. 책 속의 '너'는 단 한 번도 곤히 잠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잠자는 남자다.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진정한 무(無)의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을 자는 남자다. 무(無)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질문의 답을 '너'를 통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목소리와 '너'의 입장을 번갈아 가며 읽는다. 노트에 몇몇 구절을 따라 끄적여 보기도 한다. 어쩌면 이제 나는 <잠자는 남자>속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것도 같다. 실제로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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