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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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를 지운지 반년은 된 것 같다. 신혼여행 중에 인스타에 왜 결혼사진을 올리지 않느냐는 것으로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그게 또 요상하게 발전해서 왜 팔로워에 남자는 별로 없고, 여자 지인들만 넘쳐나는 것인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고, 다소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어차피 업로드 자체를 많이 하지도 않는 SNS기도 했으니) 서로의 갤럭시에서 인스타 App을 삭제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가끔 힙한 식당에 DM으로 예약 해야 하거나, 주요 행사 일정 등을 확인해야 할 때, 인스타가 필요하긴 한데, 그럴 때는 웹브라우저를 통해 접속한다. 웹스타그램은 들어가 볼 때마다 UI/UX가 참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다시 App을 설치할 생각은 없다. 폰에서 App이 사라지니, 인스타에서 괜한 시간을 보내는 일 자체가 줄어들었다. 릴스를 볼 일이 사라지게 되었다. 유행하는 밈에 대해 남들보다 조금 늦게 알게 되었지만,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이 다소 줄어들었다. 업무의 집중력, 여가시간의 집중력이 조금은 향상된 기분이었다. 막상 싸울 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그런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다음은 트위터 App, 그리고 끝판왕인 유튜브 App이 남았는데... 이것들까지 다 지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내 집중력은 더더욱 올라올 수 있을까?

집중력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은 역시 책을 못 읽겠다는 것 때문이었다. 한창 많이 읽던 트레바리 시절에는 많이 읽기도 읽었고, 책이 정말 재밌었고, 독후감 한 번 쓰려고 책을 2회독, 3회독도 했었는데, 요즘의 나는 그런 시절과는 정 반대 면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게 점점 강해지다가, 올 초 관리부서로 적을 옮기고 부터는 심각할 정도로 책을 읽기 힘들어하는 나를 마주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도 보고서 생각이 아른아른하고, 사무실 생각이 아른아른하다. 공감이 필요한 소설 읽기는 너무도 힘든 작업이라, 비문학 위주로 읽어보고자 했지만, 일하는 방식이 그대로 투영되어서 목차를 읽고, 소제목을 읽고, 어느 순간 핀트가 아니다 싶으면 영 눈길이 가지 않게 되었다. 읽다 만 책들이 더 많아졌다.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책모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느끼는 시간들이 늘어갔다. 그러던 중 지난번 책모임에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약화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 나누게 되었고, 너무나 와닿게 되었다. 어찌 됐든 집중력의 약화를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고, 스스로 극복해야겠다 싶던 나날 중... 산책 겸 방문했던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도둑맞은 집중력』, 트위터에서는 '집중맞은 도둑력'으로 불리는 잘나가는 베스트셀러였다. 책의 저자인 요한 하리 또한 집중력 저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현대인이라면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느냐마는, 이 사람은 좀 더 과격하고 대단했다. 폰에서 App을 삭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폰을 인터넷이 되지 않는 기종으로 아주 바꿔버리고, 외부와의 연결을 끊어버린 채 프로빈스 타운이라는 한적한 마을로 떠나 버린다. 그곳에서 산책하고, 독서하고, 오프라인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휴가 기간을 통해 점점 집중력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일탈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이고, 현세로 복귀하고, 머지않아 다시 거대한 초연결 사회에 굴복하게 되었다. 프로빈스 타운에서 힘겹게 쌓아 올린 집중력은 파도 앞 모래성처럼 시원하게 다시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요한 하리는 집요했다. (그러니까 책도 쓰는 것 같은데) 그는 집중력 저하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사례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기자라는 직업에 걸맞게 발로 뛰고 생생한 의견들을 듣는 과정이 이 책에 쭉 담겨 있었다. 구글과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실리콘 밸리의 IT 기업들이 어떻게 사용자를 묶어두게 만드는지에 대해 '감시 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런 기술의 파도 앞에 개인 차원에서의 대응이 유의미한 일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업무환경, 음식, 교육 등 다수의 분야에서, 사회가 개인의 집중력을 앗아가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덧붙인다. 해결책 또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된다. 충분히 생각해 봄직한 흥미로운 의견들이 챕터 내내 이어지는데, 물 흐르듯 읽다 멈추게 되면, '그래서 나는 어떤 의견에 동의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를 들자면 페이스북 같은 SNS를 국영으로 만들자! 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데?)

에필로그까지 다다르게 되면, 역시 집중력 저하가 내 탓만은 아니지 하는 안도감과 동시에,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라는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은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긴 책이나, 글은 잘 읽지 않을 게 분명하다. 다만 조금 더 앞선 독자들이 이 책을 쇼츠나, 릴스나, 틱톡이나, 뭐 그런 걸로 잘 요약해 만들고 다듬어 알고리즘에 실어 나르기를 응원해 볼 수는 있겠다. 간만에 완독이었다. 탈탈 털린 집중력으로도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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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지돈 지음, 윤예지 그림 / 마음산책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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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 인생의 별점은 1점일지라도... 이 책은, 정지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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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택시 - 매 순간 우리는 원하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지점들을 지난다 아무튼 시리즈 9
금정연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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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택시를 타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구체적인 횟수까진 적어두지 않아 모르겠지만,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택시를 부른 건 아니었다. 보통은 택시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느긋하게 나를 밀어 넣는 패턴이었다. 금요일 밤 독서 모임에서 늦은 수다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이어지는 토요일 이른 아침 일본어 과외를 위해, 때로는 집에서 걸어가면 20분 거리인 업체로의 외근을 위해서도 택시를 불렀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충분히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이고 거리였지만 굳이 꾸물거렸다. 성남에서 서울 혹은 그 반대의 코스, 구체적으로는 삼성, 압구정, 안국, 건대 같은 곳들. 적게는 1만 5천 원에서 많게는 할증 붙어 3만 원 정도, 우리 집이 잘 살거나 돈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택시 드라이버였거나 내 스스로가 택시 덕후인 것은 더더욱 아니고, 뭐랄까... 요즘의 나는 어쩌다 보니 모든 일들을 그렇게 처리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시간이라는 적을 향해 날리는 섀도 복싱 같이.


- 쉬익. 쉬이익.


이 소리는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이 소리는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는 택시 뒷좌석의 창틈으로 불어올 바람의 소리다. 그것도 아니면 내 통장 잔고에 뚫려있을 작은 구멍에서 나는 소리라든가. 하지만 까짓것, 택시비야 다시 벌면 그만 아닌가? 나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그렇게 흥청망청 마시는 편도 아니니 말이다.(스튜핏(!)한 지출은 책 값 정도?) 자칭 생계형 서평가라는 금정연 씨의 사례를 살펴보면 나 정도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될 것이다. 그는 택시, 담배, 술 등(책 값은 말할 필요조차...) 모든 수치에서 나를 앞서고 있었다. 적어도 이번 생에 내가 그를 추월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택시』를 읽은 건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택시는 내게 다리나 마찬가지'라는 대책 없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그야말로 택시의, 택시에 의한, 택시를 위한 에세이집이었다. 심지어 이 책의 인세 수익 대부분은 택시요금으로 쓰일 것이라는데... 처음엔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었지만 역시 금정연이었다. 이 얼마나 소설 같은 일상인가? 아니면 일상 같은 소설인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물음표는 느낌표로 변해갔다. 피식거리게 되었다. 책을 펼친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만약 택시 뒷좌석이었다면 나는 기사님께, 부탁이니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조금만 더 돌아가 달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다.


미터기 대신 탁상시계를 흘끔 본 순간, 세븐 세그먼트로 표시되는 숫자는 어느새 약속 시간인 6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확히 딱 그때까지는 여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부르기에는 어딘지 아쉬운 시간이었고, 그래서 조금 더 꾸물거릴 수 있었다. 그 후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나도 정말 지긋지긋한 인간이더라. 변명을 위한 변명 같은 것들이 이제는 일종의 패턴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서울시가 택시비 인상을 계획하고 있다는 뉴스를 읽었던 게 기억난다. 큰일이다. 금정연 씨에게도, 내게도... 사실이라면 올해도 기록은 다시 쓰여질 것이다.


- 쉬익. 쉬이익. 쉬이이익.


이 소리는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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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택시 - 매 순간 우리는 원하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지점들을 지난다 아무튼 시리즈 9
금정연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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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친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만약 택시 뒷좌석이었다면 나는 기사님께 부탁이니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조금만 더 돌아가 달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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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가들
정영수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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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빨간 날이 검은 날보다 좋은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쉬지 않고 한 시간은 너끈히 이야기할 수 있다. 입에서 나가는 대로 모든 문장이 타당한 이유가 된다. 빨간 날에는 푹 잘 수 있다. 빨간 날에는 떠날 수 있다. 빨간 날에는 진탕 마실 수 있다. 빨간 날에는 늦은 밥을 먹을 수 있다. 한쪽으로 미뤄둔 『2666』을 꺼내 읽을 수 있다. 읽다 말고 다시 잠들 수 있다. 깨어나서 온종일 게임할 수 있다. 빈둥댈 수 있다. 굳이 원한다면 쌓아둔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다. 신구대 운동장을 빙 둘러 달리거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거나, 빈속에 아메리카노를 1리터씩 들이붓는다거나.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쨌든 빨간 날은 끝내준다. 검은 날의 루틴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의외성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검은 날의 숫자는 빨간 날에 비해 압도적이다. 일상이라는 단어 앞에 붙는 수식어는 보통 '새로운', '신나는'이 아닌 '지루한', '지긋지긋한'이다. 금토일이 붉게 타고난 자리에 월화수목금이 검게 그을려 있다.

그렇다. 생(生)은 기본적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각자의 속도로 죽음을 향해 떠내려간다. 무얼 타고 내려가도 목적지가 달라지는 일은 없다.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무기력해진다. 허무한듸! 하고 읊어보기도 한다. 채워질 독 같은 것이 내게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말이다. 검은 시간의 망망대해 위에 떠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멍해진다. 멍해지고 멍해져서 다음에는 멍청해진다. 결국 지루함과 싸우는 게 평생의 과업이 된다.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패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일. 우리는 지루함을 견뎌내기 위해 '뭐'라도 되어보려 하거나. '뭐'라도 나타나길 기도한다. 진짜 '뭐'같아도 그나마 '뭐'때문에 산다. 정말로 하늘 위에 신이 존재한다면 내려다 보기는 할까? 이런 인간들의 눈물겨운 아등바등을. 빨간 날이 아닌 검은 날을 위한 아등바등을. 

소설집 『애호가들』속의 인물들 역시 각자의 '뭐'에 의지하며 생을 이어나간다. 번역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현실을 자위하는 번역가(「애호가들」), 수면제와 낭독 모임으로 숙면을 청하는 편집자(「하나의 미래」), 로큰롤 스타를 꿈꾸었던 왕년의 음악 청년(「음악의 즐거움」), 그리스 비극을 줄줄 외우는 단순 반복 업무 노동자(「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 그리고 기타 등등. 이들이 가진 '뭐'에 대해 타인들은 관심이 없다. 이들도 잘 안다. '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자신이 만들어낸 '뭐'를 믿고 따르는 것도 온전히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소설집이 재미있는 것은 '뭐'가 정확히 뭔지도 잘 모르고, 그놈의 '뭐'때문에 웃픈 상황으로 내몰리는 주인공들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서만큼은 신이 존재했다손 치고) 신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인공들을 크나큰 손으로 '탁!' 쳐서 "억!" 하게 만든다. 신보다 '뭐'의 존재를 더 믿는 이들의 괘씸함에 실력을 행사한다. 주인공들은 마지막에 이르게 되기까지 누구 하나 각자의 '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믿기로 했으니 그저 믿고 행한다. '뭐'가 지루함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것임을. '뭐'를 만나면 비어 있던 삶의 연결 고리가 채워질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뭐'?

결과적으로 '뭐'가 뭔지에 대한 질문은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소설을 읽는 이에게 오롯이 떠넘겨진다. 소설집 『애호가들』은 말하자면 '뭐' 그런 이야기들이다. 너무나 재밌어서 아등바등 읽어버린. 그게 '뭐' 대단한 이야기였나... 하고 생각했었음에도 내게는 '뭐'처럼 다가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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