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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네가 책을 펴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너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이
모험이 얼마나 길어질지, 또 얼마나 깊어질지 하는 것에 대하여, 잠실역의 저 익숙한 환승 통로에서, 계단을 오르고 둘로 나뉜 양 갈래 길을
지나, 네가 수백 번을 지나다녔기에,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도, 단지 네 기억만으로 방향을 알아낼 수 있는 그곳에서, 코끝을 쨍하게 하는 아저씨
특유의 애프터 쉐이브 향이, 아직 덜 말라 촉촉한 어느 여인의 머리카락 끝에서 올라오는 샴푸 내음이, 퇴근길이었다면, 달달하게 풍겨왔을 델리
만주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그러나, 결국은 재빠르게 지나칠 것이 또한 분명한, 너의 눈꺼풀은 마치 2호선 모든 직장인들의 피로를 짊어진
사람처럼 무거우나, 한 손에는 아까 말한 그 한 권의 책을 쥐고서, 책이란 본래 네모난 것이기에 쉽게 손에서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때마침 도착한 텅 빈 열차에 올라타, 방금 전까지 누군가 따스하게 달궈놓은 자리에 엉덩이를 딱 붙인 채로, 어젯밤 책갈피를 꼽아
두었던 장의, 그러니까 <잠자는 남자>의 삼십팔, 혹은, 사십오나, 칠십삼 페이지의 문장을, 글자들을 눈으로 흡입하려는 찰나에,
페렉의 텍스트가 안겨줄 무력감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어쩌면 반복되는 수면부족 탓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그때마다 매번,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 같이, 아주 완벽한 타이밍에 기억의 흐름을 끊는다, 오늘도 너의 앞자리에 앉은 여자는, 또는 대학생은, 사실은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만,
어쨌건, <잠자는 남자>를 손에 쥔 채로 잠자는 남자를 눈 앞에 마주하게 된다.
문장에 쉼표가 많다. 끊어질 듯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다. 쉼표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다. 단언컨대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도 쉼표가 많다. 쉼표를 따라 정직하게 호흡을
멈춰가며 책을 읽었다. 자연스레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출퇴근길 지하철의 독서. 그 1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읽을 수 있는 페이지는 길어야 네댓
페이지 정도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읽거나, 자거나, 호흡을 멈추거나, 다시 들이마시거나의 반복. 그 모든 행위가 전부 <잠자는
남자>를 읽는 방법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는 OO 한다"로 풀어가는 2인칭 시점의 소설. 여기서 '너'라고 불리는 주인공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목소리는 '너'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너'를 혼자라 부를 뿐이다. 목소리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혼자인 '너'를 만들어 내고 싶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모두 로그아웃 해주세요. 하던 그 우스갯소리처럼 말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단계를
필요로 한다. '너'는 시험을 보러 가지 않는 것부터 시작한다. 찾아오는 친구를 모른 척하고, 만들어진 습관을 제거한 다음, 떠오르는 이미지를
버리고, 모든 생각들은 멈추기로 한다. 몸의 감각 또한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연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만을 남겨둔 채 모든 것을 해체한다.
사회가 떨어져 나가고, 무리가 흩어졌으며, 모든 의미에 의미를 두지 않는 단계. 핸드폰 공장 초기화의 그 상태보다 더 초기화된 인간으로 '너'는
돌아간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실험 노트를 작성해 나간다.
나는 계속해서 목소리의 기록을 읽어
나간다. 처음에는 그저 난해하기만 했던 '너'의 이야기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 시간만큼은 지하철 2호선도 실험실이 된다. 나는 장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너'와 같이 해체해나간다. 나의 일상을, 명함을, 나의 생각들을 해체한다. 같이 침잠한다. 하지만 책 속의 '너'와는 다르게
나에게는 한계가 존재한다. 잠실에서 갈아탔으면 시청에서는 내려야 한다. 해체했던 뭉탱이들을 덕지덕지 다시 붙여야 한다. 그렇다. 책 속의
'너'는 단 한 번도 곤히 잠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잠자는 남자다.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진정한 무(無)의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을 자는 남자다. 무(無)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질문의 답을 '너'를 통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목소리와 '너'의 입장을 번갈아 가며 읽는다. 노트에 몇몇 구절을 따라 끄적여 보기도 한다. 어쩌면 이제 나는 <잠자는 남자>속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것도 같다. 실제로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