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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평점 :
바람을 피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나를,
그리고 나와 바람이 난 여자를 찾아내 제거하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녀의 말이 진담 반 농담 반인 것처럼 그냥 웃어넘기려 시도해보지만, 역시
CR도 먹히지 않는다. 그녀는 콕 집어 말한다.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거든. " 그녀의 진담에 진땀만 삐질 흘러내린다. 딱히 죄진 것도
없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김연수의 소설 제목 『세상의 끝 여자친구』가 떠오른다. 조금 이따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지갑이라도 한 번
살펴봐야겠다. 제임스 본드가 지니고 있는 살인면허를, 사랑스러운 그녀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확인해봐야겠다. 짐작건대 그녀는 아마 1종
보통일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배우만 바꿔서 친구 배씨에게도 듣고, 먼저 결혼한 형들한테도
듣는다. 임자 있는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들 그러고 사는가 보다. 그렇다면 이게 바로 세상의 법칙일 터. 물론 남과 여의 입장이 정확히 반대인
경우도 있겠지만, 아무튼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그만큼 큰 위험 부담을 안고 가는 일이다. 시작은 일시적인 문제였겠지만, 끝은 반영구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운다. 몰래 숨어 불장난을 한다. 하지 말라면 더 한다.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말이다.
서울이든, 보스턴이든, 아니면 저 아래 캘커타가 되든 간에 이런 유의 이야기는 만국 공통이다.
얼마나 많은 커플이 소설 속에서 바람을 피우고, 걸리고, 파국을 맞이했던가. 배경이 다르다 해서 굳이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줄거리다. 대게는 욕을 하며 읽고, 몇몇은 뜨끔하면서 읽는다. 『축복받은 집』에 담긴 줌파 라히리의 단편 「섹시」 역시 다르지 않다.
등장인물도 정석대로다. 미랜더(어리숙한 젊은 여자), 데브(능글맞은 유부남), 데브의 아내(부재중인 아내)가 등장한다. 미랜더의 일상 속으로
데브가 끼어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신 이름의 일부는 인도식 이름이군요.
(중략) 아니, 뒤의 몇 글자를 빼고 '미라'가요. 제 이모 이름이 미라에요." - 145 p.
"난 외롭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요. (중략) 내가 만난 여자 중에 이렇게 다리가 긴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 147 p.
작업은 순조로웠다. 느끼한 작업 멘트 몇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여자가 넘어왔다.(역시나 멘트의
완성은 얼굴이었을지도) 미랜더의 눈에 콩깎지가 붙어버렸다. 늘 그렇듯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시작부터 그가
유부남임을 알았던 미랜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불타는 나날들이 두 남녀 앞에 펼쳐졌다. 그러던 어느 날. 데브는 다년간의 답사로
보장된 데이트 코스, 마파리움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같은 장소, 같은 남자, 그리고 몇 명의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데브의 데이트는 늘 그런
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은 미랜더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데브는 속삭였다. 아무 말이나 해보라던 그녀에게. 이렇게.
"당신은 섹시해요." - 150
p.
생각없이 던진 돌에도 개구리는 죽는다. 아무렇게나 던진 한 마디가 미랜더의 이성을 완전히
끝내버렸다. 그날 이후 미랜더의 귀에는 데브의 "섹시해요(영어였을 테니, You are sexy.)"가 환청이 되어 울려 퍼진다.
여기까지 오는데 딱 다섯 페이지. 매끄러운 진행이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전개도 마찬가지. 데브의 아내가 돌아오면서 미랜더와 데브의 불장난은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 둘의 만남을 그저 낮잠 정도로 여겼던 데브와, 운명적
사랑이라 믿고 싶었던 미랜더 사이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애당초 둘의 만남은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었다. 미랜더만 빼고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독자들도, 심지어는 백화점 화장품 코너의 직원도 말이다.
"모든 주름은 스물다섯까지 생겨요. 이후론
주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일 뿐이랍니다." - 143 p.
갈라진 틈이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둘의 만남은 미랜더의 실크 가운처럼 계속해서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만약 단편이 여기서 끝났다면 구질구질한 이 글도 굳이 작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쇼 타임이다. 불장난
소설들이 저마다의 불을 뿜는 것은 대부분 이 지점부터다. 복수, 광기, 집착.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섹시」의 선택은 그런 요소들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느낌이랄까? 줌파 라히리는 미랜더를 훈육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우리 어머니들이 늘 하시는 말씀. "나중에 너랑 똑같은 딸(혹은 아들) 한 번 키워봐"가 그것이다. 어릴 땐 칭찬인 줄 알았는데,
결국 저주로 밝혀진 그 무시무시한 시추에이션을 미랜더에게 선사한다. 일곱 살 사내 아이, 로힌의 모습을 한 채로 말이다.
"토요일에 바쁜 일 있어?" - 163
p.
그렇게 피곤한 주말이 시작됐다. 하는 짓이 정말 미랜더의 사랑 방식과 쏙 빼닮았다. 로힌은
나라 수도 이름 맞추기를 통해 끊임없이 지식을 확인하고자 한다. 마시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커피를 조른다. 계속해서 생 떼를 쓴다. 지겹도록
보챈다. 요구가 관철될 때마다, 금기를 깰 때마다, 아이는 더 큰 것을 넘본다. 그림을 그리게도 하고, 종국에는 미랜더의 옷을 갈아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까?(미랜더가 눈치가 없기는 하다.) 이어서 라히리는 로힌의 입을 빌려 미랜더를 깨우치기
시작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다. 일곱 살의 입으로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데브를 연상시키는 능글맞은 멘트부터, 순진한 듯 섬뜩한
멘트들까지. 적어도 내가 아는 일곱 살 중에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없다. 특히 그중에서도 로힌이 말하는 '섹시'의 정의는 이 단편
전체를 관통한다. 책을 읽던 내게도 강한 한 방이 되어 돌아온 부분이다. 나조차도 앞으로 어디 가서 '섹시하다' 소리를 쉽게 내뱉지
못할 것만 같다.
"아줌마는
섹시해요.(중략)
그 말 말이야. 섹시, 무슨
뜻이니?(중략)
아이가 입가에 손나발을 만들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건
○○ ○○○ 사람을 ○○한다는 뜻이에요." - 172 ~ 173
p.
(충격으로 인해 그 구절을 온전히 옮겨 적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섹시함은 정말 그런 것일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 까지는 아니지만 일순간 소설이 정리되어
버렸다. 이 소설이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할 건덕지도 없을 만큼 말이다. 당사자인 미랜더의 마음도 일순간 정리되어 버렸다. 그녀는 아마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훈육이었다. 잠깐, 그런데 데브는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음... 내 생각에는
아마 평생 저러고 살 것 같다. 작업 멘트와 콧수염이 통하는 동안에는 말이다. 대신 언제 한 번 크게 걸리기는 할 것 같다. 유심히 지켜봤는데
맺고 끊는 스킬이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쿨하지 못하게 말이야...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자는 줄만 알았던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1시였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뭘 하고 있느냐고 말했다. 아까 분명 잔다고 하지 않았냐고. 내일은 월요일이라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까지는 아니지만 일순간 감상이 정리되어 버렸다. 글은 여기서 급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법칙일 터.
그러니 다들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나는 아직 읽고 싶은 책이 많다.
PS. 감상만으로 아쉬운 분들은 거미의 노래 <어른
아이>를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미랜더의 18번 곡으로 손색이 없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