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이런저런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오페라 레퍼토리로 정착되어갔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면 새로운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일은 드물었고, 기본 레퍼토리가 잔 세계적으로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이 작품들과 오페라라는 매체 자체가 엘리트를 위한 음악이 되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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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적인 고전 레퍼토리의 형성은 1820년대에 막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온전한 효과는 다음장들에서 살펴보게 될 19세기 후반 작곡가들에게서 나타났다. 물론 1850년 이전에도 관현악음악 작곡가들은 옛 걸작의 존재를 강하게 느꼈다. 무엇보다 베토벤이 가장 중요했다. 그의 관현악 작품은 이전 시대 많은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여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작곡가의 예술적 발언으로 해석되었다. 후대의 모든 관현악 작곡가는 베토벤의 그림자로 인해 괴로워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베토벤의 것과 분명히 비교될 것임을, 따라서 그의 수준에 도달하면서도 뭔가 그와는 다른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19세기 관현악 음악의 역사는 베토벤에 대한 다양한 대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 작곡가는 베토벤이 이룩해놓은 형식 안에서 뭔가 새로우면서 개성적인 것을 나타낼 방법을 탐색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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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은, 비록 시장경쟁에 의해 조장되고 낭만주의적인 천재 개념으로 채색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후 모든 작곡가의 필수 요건이 되었고, 이후 두 세기 동안 대중음악이든 예술음악이든 음악 양식의 급격한 변화에 자극제가 되었다. 실제로 음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부분 낭만 시대의 산물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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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음악가와 청중은 베토벤 이전 작곡가들도 영감을 받거나 자신의 감정을 음악 속에 담고자 할 때 곡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전 작곡가들 대부분이 즉각적인 필요에따라, 혹은 그들의 고용주나 청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창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란다. 베토벤, 특히 베토벤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응은 작곡가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가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베토벤이 불러일으키는 작곡가의 이미지는 오로지 영감이 일어날 때에만 작곡하며 자기 표현을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작곡가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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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대중에게까지 개방된 것은 17세기의 일이며, 이때에도 책은 여전히 성직자나 지식계층, 귀족 등 특정 집단만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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