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수년 전에 꼼꼼히 읽고 주까지 이리저리 달아놓은 책들을 마치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최신 저작인양 다시 손에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기억력의 그러한 배반과 극심한 결함을 어느정도 보완하기 위해서, 얼마 전부터 의례적으로 모든 책(한 번만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의 말미에 그 책을 다 읽은 때와 그 책에 대한 개략적인 판단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품게 된 저자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과 그 분위기만이라도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 P81
어떤 책에 관한 대화는 겉보기와는 달리 대부분 그 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어떤 앙상블, 즉 특정 순간 특정 교양이 의거하는 결정적인 모든 책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 P32
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으로서의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의 원숙한 조각 솜씨와 오묘한 해화를 이루어주는 데에 있다. (중략) 인자스럽다, 슬프다, 너그럽다, 슬기롭다 하는 어휘들이 모두 하나의 화음으로 빚어진 듯 머릿속이 저절로 맑아오는 것 같은 심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처님이 중생에게 내리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