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할 거야 - 십대,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것들
강신주 외 지음 / 우리학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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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러 명이 한 가지 주제로 짧게 쓴 글들을 모은 책은 기획자나 대표 저자가 책의 기획 의도와 책이 나오기 까지 과정 등을 서문에 실기 마련인데 이 책은 아예 서문이 없다. 마음에 두고 있는 주 독자인 청소년들에게 서문은 항상 꼰대들의 말처럼 들리기 때문일까? 지금 이런 이런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러니 잘 듣고 이런 말을 하는 나의 수고스러움도 알아주기 바란다....

그러니 서문은 없는 것이 낫다. 글쓴이들은 아마 3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까지일까? 다른 사람들은 십대들에게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했다. 최소한 위안은 나이와 성별, 살아온 모습도 모두 다르지만 어른 된 지금은 이렇게 후회할거야라면서 겁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나중에 아이들이 이 책을 읽게 되면, 길은 도처에 있고 제각각 다른 길을 걸어도 나중에는 이렇게 건강한 꼰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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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로운 사람들아 - 강명관 잡문집
강명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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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강명관 교수의 책은 아예 강명관 잡문집이라고 부제가 붙어있다. 지난번 책 시비를 던지다를 읽고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이번 책에서 받은 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도 금방 읽은 책이어서 인지 세 권의 소위 잡문집 중에서는 이번 책(‘이 외로운 사람들아’)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느낀다. 보통 이렇게 같은 저자가 비슷한 분위기의 책을 이어 펴내면 뒤로 갈수록 좀 재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읽는 재미가 더해지는 것을 보면 강명관 교수의 내공이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책의 내용과 별 관계없는 사진들이 불쑥 불쑥 끼여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가 한 일이겠지만, 차라리 화가와 함께 책의 내용과 부합하는 그림을 넣는 것이 훨씬 나았지 싶다.)

 

책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조선시대의 인물이나 글 등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반성하게 하는 글이 많다. 조선 500여 년 동안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역모아니면 사문난적이라는 말로 국가를 통치했으니, 저자가 자주 언급한 정약용이나 홍대용, 박지원 등의 당시 지식인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반공과 멸공에 이어 등장한 종북경제성장이니 하는 말들도 500년이 아니라 한 50년만 들었는데도 이젠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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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정복 - 상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천재과학자들이 써 내려간 창조의 역사
데릭 청.에릭 브랙 지음, 홍성완 옮김, 배영철 감수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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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공학의 역사를 이렇게 충실히 잘 써 내려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비교적 짧은, 불과 수 십 년의 기간에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속도로 수십만, 수백만 배의 성능이 향상된 기술 분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데릭 청)는 스탠퍼드 학부시절 쇼클리에게서 직접 3과목이나 수강한 전기공학 박사일 뿐 아니라 1969년부터는 페어차일드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다. 이런 저자의 배경 때문인지 비슷한 책들의 흔한 서술방식인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과 인물묘사보다는 새로운 기술들이 가능하게 된 기술적 배경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니까 어떤 혁신적인 기술에 앞서 어떤 선행 연구가 있었고, 그 혁신적인 기술은 추후 새롭게 출현한 기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비교적 상세히 드러나 있다. 이런 내용들은 비전공자나 전자산업의 기술적 부문에 별 관심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크게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결국 직업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한편의 잘 짜인 대하소설을 읽는 감동을 준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전자를 정복하는 과정이 수많은 과학자와 공학자가 일관된 노력으로 묘사할 수 있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어느 날 어떤 계기로 과거의 기억을 갑자기 되찾듯 실험실에서 우연찮게 발견된 사실들이 오래 묻혀 있다가 어느 날 혁신을 이루는 중요기술의 바탕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출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공학이나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자본전쟁이 개인적인 노력과 비전 외에 혁신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 사회적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씁쓸하다. 물론 이 두 사회적 원인을 구성원들에게 가장 적절하게 행사한 국가가 바로 미국이고 따라서 현재 전자를 정복함으로써 가장 많은 부를 이룬 국가가 미국이다. 개인적으론 과학과 공학기술이 더 이상 자본전쟁에 의해 휘둘리기보다는 인류지성의 순수한 호기심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발전하길 기대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이.

저자가 중국계 미국인이라 우선 중화권에서 중국어로 먼저 출간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전자산업이 발달했다는 한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점은 참으로 아쉽다. 얼마 전에는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책이 알라딘 중고샆에서 거의 반값으로 나온 것을 보고 더욱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안 팔렸으면.....

비전공자로서 번역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텐데 많이 팔리지도 않을 책을 기꺼이 번역한 번역자에게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생긴다.

 

번역상에 사소한 부분을 괜히 트집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반도체에서 hole을 양공(陽孔)이라 번역했는데 전자공학 책에서는 정공(正孔)이라 한다. 정공이라는 말을 워낙 오래 전 부터 써 왔지만 사실 양공이 더 잘 된 번역인 것 같다. 책에는 대부분 양공이라 했지만 한두 군데에서는 정공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2) 폰 노이만을 때로 폰 뉴만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는데 인명은 책의 뒷부분에 정리된 인물란의 표기법으로 통일하면 좋을 것이다. 3) ‘반도체 장비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아마 semiconductor device 를 번역한 말일 것이다. 전자공학 종사자들에게 반도체 장비는 반도체 칩을 생산하기 위한 장치라는 의미이고 semiconductor device반도체 소자라고 부른다.

 

참고로 책의 뒷부분에서 설명한 청색 LED는 일본인 슈지 나카무라가 거의 혼자서 개발하였는데 슈지 나카무라는 그 공로로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책을 쓸 당시에는 그의 노벨상 수상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다시 한 번 저자와 번역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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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증보판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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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이다. 따라서 각 연장이 모두 사람에 관한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일부는 다른 동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의 글은 다른 매체에서도 가끔 읽은 것 같은데 우리의 본성을 진화의 렌즈로 들여 보게 해주니 당연 흥미를 돋우기도 하지만, 필자의 글솜씨도 대단해서 흥미를 더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재미있게 쓴다는 사실을 매 주제(연장통)마다 느낀다.

 

추천사를 쓴 최재천교수에 의하면 저자는 한국에서 최재천교수의 지도아래, 미국에서는 욕망의 진화등을 쓴 데이비드 버스 교수의 제자였다고 한다.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중의 하나는 진화심리학 또는 진화생물학이 단지 심리학이나 생물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뿐 아니라 인지과학, 인류학 등을 포함하여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범학문적 분야라는 것이다. 다른 분야의 학자들은 얼마나 동의하는지 모르겠다.

 

일반인들은 흥미위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내용임에도 학자들이 진화적 가설들을 과학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여러 실험을 고안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아마 이 새롭다는 분야도 선행연구와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에서 주도하게 될 것이다.(참고문헌이 모두 영어로 작성된 것이고, 아시아인 저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약간 게름직하게 느낀 것은, 최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역시 신생학문 분야 중의 하나인 뇌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진화심리학 역시 그 열매는 어쩌면 상품을 더 많이 팔기를 희망하는 기업이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저자가 맺음말 진화는 토대이다에서 길게 소개한 것이 바로 대중의 상품 소비행태를 진화적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며 그 내용은 마케팅 연구 저널에 발표된 내용이라고 한다. 진화심리학과 뇌과학이 자본주의 체제내의 우리모습 중 일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이 발달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자본 앞에서는 모든 것이 흡수되어 버리는둣하다. 뇌과학이던 진화심리학이던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늘이고, 고통은 줄이는 데 이바지해야 마땅하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열여덟 번째 연장 도덕의 주기율표는 희망을 준다. 저자는 도덕적 분류체계에서 조너선 하이트(‘바른 마음의 저자이다.)가 분류한 도덕성의 요소를 들고 인류가 서로 이해하고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상대(예로, 진보는 보수, 보수는 진보가)가 어떤 도덕적 요소를 더 중요시하는지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동양에서 집단에 대한 충성이 더 서양보다 더 강조된 까닭은 동양에서 전염성 병원균이 더 득세했다는 환경적 차이라고 설명한다. (동서양의 차이를 설명하는 생각의 지도’(리처드 니스벳 저)에서는 동양이 주로 한중일 3국을 가리키는데 동양은 쌀농사가 발달하여 집단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기억된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드는 느낌은 진화심리학 또는 진화 생물학이 흥미는 있지만 너무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내가 아는 만큼 다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 일 것이다. 2층 창가에 앉아 거리의 사람들을 보는 것은 좋지만, 그들도 역시 나를 관찰하며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다 짐작한다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겠지.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하는 예의를 발달시켜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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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과 수리공 - 과학을 뛰어넘은 엔지니어링 이야기
권오상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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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이 책 저자의 표현대로는 엔지니어링)과 과학 사이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굳이 의미가 있을까?

최근에는 물리학과, 수학과 같은 자연과학을 대표하는 학과들이 없어지는 대학들도 늘어나고 있고, 반면 공학 분야는 학령인구가 줄어듦에도 정원을 늘린다느니 하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데 이런 이공계내에서의 우열 다툼이 할 일없어 보인다. 1부의 제목은 과학이 엔지니어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링이 과학을 이끈다 인데 이런 순서가 인류 역사에 항상 지켜졌고 앞으로도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면서 공학이 과학을 이끈 부분이 분명히 있으나, 이 후에는 과학의 이론이 공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부분도 많았으리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이루어온 과학 업적이란 정확한 힘의 단위나 속도, 물질의 변환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업적이므로 수많은 손기술들의 노하우가 축적된 공학 업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2부의 제목, 내용을 포함한 그 제목에도 썩 동의하기 어려운데 과학이란 어떤 최종적인 답을 내려 신과 같이 절대적으로 행사(行使)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를 인류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해한 성실한 노력의 결과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우리 인류의 정성을 전 우주에(또는 신에게) 나타내 보이는 정도일 것이다. 장하석 교수의 말처럼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란 풍선과 같아서 풍선이 팽창하듯이 과학적 지식이 늘어날수록 풍선이 이루는 표면적도 넓어져 미지의 영역 역시 넓어진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 풍선을 불어 우리가 이해하는 범위를 계속 넓혀야 할 것이다. 3,4,5부에서는 제목 자체부터가 아예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굳이 공학이 과학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부의 한국인들 외에는 주장의 타당성뿐 아니라 주장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공학계열 내에서도 서열을 따지고 대학입시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 더 안타깝지 않은가? 이미 선진국에서는 공학이 좋아 공학자로 열심히 살다가 의외로 노벨상을 받기도 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계속 실험실에서 근무하기를 좋아하고 이런 것이 아무런 이상한 일이 아닌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가? 저자도 소위 한국에서 최고의 학벌의 지닌 공학도였지만 결국은 끝까지 공학자의 길을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공학이 좋았던, 남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가 좋았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있고 적당한 생활수준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학과 과학의 서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업적에 대해 충분히, 그야말로 충분히 인정(appreciate)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땀과 노력과 지성에 대한 appreciation이 없이, 그 분야를 누가 공학이나 과학이라고 이름 붙였든 과학이 서열이 더 높은지 공학이 더 높은지 따진다는 것은 잘 차려진 음식을 가만히 앉아 받아먹으면서 좋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재료가 좋아야 된다느니, 요리사가 훌륭해야 된다느니 하고 따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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