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정복 - 상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천재과학자들이 써 내려간 창조의 역사
데릭 청.에릭 브랙 지음, 홍성완 옮김, 배영철 감수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자공학의 역사를 이렇게 충실히 잘 써 내려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비교적 짧은, 불과 수 십 년의 기간에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속도로 수십만, 수백만 배의 성능이 향상된 기술 분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데릭 청)는 스탠퍼드 학부시절 쇼클리에게서 직접 3과목이나 수강한 전기공학 박사일 뿐 아니라 1969년부터는 페어차일드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다. 이런 저자의 배경 때문인지 비슷한 책들의 흔한 서술방식인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과 인물묘사보다는 새로운 기술들이 가능하게 된 기술적 배경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니까 어떤 혁신적인 기술에 앞서 어떤 선행 연구가 있었고, 그 혁신적인 기술은 추후 새롭게 출현한 기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비교적 상세히 드러나 있다. 이런 내용들은 비전공자나 전자산업의 기술적 부문에 별 관심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크게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결국 직업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한편의 잘 짜인 대하소설을 읽는 감동을 준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전자를 정복하는 과정이 수많은 과학자와 공학자가 일관된 노력으로 묘사할 수 있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어느 날 어떤 계기로 과거의 기억을 갑자기 되찾듯 실험실에서 우연찮게 발견된 사실들이 오래 묻혀 있다가 어느 날 혁신을 이루는 중요기술의 바탕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출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공학이나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자본전쟁이 개인적인 노력과 비전 외에 혁신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 사회적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씁쓸하다. 물론 이 두 사회적 원인을 구성원들에게 가장 적절하게 행사한 국가가 바로 미국이고 따라서 현재 전자를 정복함으로써 가장 많은 부를 이룬 국가가 미국이다. 개인적으론 과학과 공학기술이 더 이상 자본전쟁에 의해 휘둘리기보다는 인류지성의 순수한 호기심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발전하길 기대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이.

저자가 중국계 미국인이라 우선 중화권에서 중국어로 먼저 출간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전자산업이 발달했다는 한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점은 참으로 아쉽다. 얼마 전에는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책이 알라딘 중고샆에서 거의 반값으로 나온 것을 보고 더욱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안 팔렸으면.....

비전공자로서 번역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텐데 많이 팔리지도 않을 책을 기꺼이 번역한 번역자에게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생긴다.

 

번역상에 사소한 부분을 괜히 트집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반도체에서 hole을 양공(陽孔)이라 번역했는데 전자공학 책에서는 정공(正孔)이라 한다. 정공이라는 말을 워낙 오래 전 부터 써 왔지만 사실 양공이 더 잘 된 번역인 것 같다. 책에는 대부분 양공이라 했지만 한두 군데에서는 정공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2) 폰 노이만을 때로 폰 뉴만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는데 인명은 책의 뒷부분에 정리된 인물란의 표기법으로 통일하면 좋을 것이다. 3) ‘반도체 장비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아마 semiconductor device 를 번역한 말일 것이다. 전자공학 종사자들에게 반도체 장비는 반도체 칩을 생산하기 위한 장치라는 의미이고 semiconductor device반도체 소자라고 부른다.

 

참고로 책의 뒷부분에서 설명한 청색 LED는 일본인 슈지 나카무라가 거의 혼자서 개발하였는데 슈지 나카무라는 그 공로로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책을 쓸 당시에는 그의 노벨상 수상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다시 한 번 저자와 번역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