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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봤던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등장인물이 비슷하지도, 배경이 비슷하지도 않은 책과 영화가 어쩐일인지 오버랩되고 말았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저렇게 사랑할 수도 있구나하고 한동안 마음이 먹먹해졌던 기억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도, 그 흔한 키스신도 하나 없는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렸고 그 어떤 애정영화보다 절절한 감정을 느꼈었다. 철저하게 절제된 감정처리와 영화다운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그 영화에 한동안 매료당했었는데 <채굴장으로>에서도 그런 절제된 감정을 만났다. 반갑기보다 쓸쓸했다.
섬의 초등학교 양호선생님인 세이는 화가인 남편 요스케와 평온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어릴적 함께 섬에서 자랐지만 사춘기시절 섬을 떠났던 둘은 성인이 되어 우연히 재회하고 결혼해서 함께 섬으로 돌아온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의 부재를 허전해하는 세이와 세이를 따뜻하게 사랑해주는 요스케는 아름다워 보인다. 같은 초등학교에 음악교사로 이사와가 부임해 오면서 세이의 마음에는 잔잔한 파문이 인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채 이사와를 향한 감정이 서서히 자라게된다.
<채굴장으로>에는 세이와 요스케, 이사와 이외의 사랑도 등장한다. 세이가 돌봐드리는 일찍이 혼자가 된 이웃집 할머니의 숨겨놓은 사랑, 유부남 본토와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연애하는 쓰키에의 사랑. 하지만 그 어떤 사랑도 작가가 드러내놓고 설명해주지 않아 담담하게 서술되는 일상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읽어내야만 한다. 쓰키에가 세이에게 내뱉는 아리송한 말들이나 이사와의 기묘한 태도 속에서 그들의 감정을 미루어 짐작 할 뿐이다. 흔들리는 세이를 조용히 지켜봐주는 요스케의 감정은 더욱 감추어 놓았다. 작가의 설명이 아니라 내가 찾아낸 그들의 감정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작은 돌이 일으키는 파문을 조용히 삼켜버리는 호수처럼 세이와 요스케의 평온한 일상은 세이의 흔들림을 조용히 삼켜버린다. 어떠한 뜨거운 속삭임도, 손짓도, 눈짓도 없던 세이와 이사와지만 그렇게 사랑했구나 느껴진다. 그들을 조용히 잔잔한 눈길로 바라보았을 요스케도 눈에 보이는듯하다. 오늘은 오랜만에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봐야겠다. 한석규의 조용한 나레이션이 절실히 그리워진다.
스산한 초겨울 바다에 혼자 쓸쓸히 서있는 기분이 드는 소설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나를 담담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철저하게 감추어놓고 절제한 그들의 감정들이 내게도 영향을 끼쳤나보다. 나도 자꾸만 가라앉고 만다. 그 어떤 자극적인 향수보다 질리지 않고 오래 남는 들꽃의 향기처럼 오랜동안 잔향이 남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