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동네 사람들 ★
책표지를 넣어주세요 분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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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연장통
저자 양해남 사진집
역자  
출간일 2003/11/27
금액 \20,000
페이지 296
판형 A5 변형
ISBN 89-954647-0-4



책  의    줄  거  리  ( 머 리 말 )
그들에게서 훔쳐온 시간과 공간
양해남 사진집 『우리 동네 사람들』은 금산 사람들의 삶의 표정을 담고 있다. 금산에서 태어나 줄곧 금산에서 살아온 작가에게 금산 사람들은 아주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을 엿보는 것은 한 동네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가지는 애정어린 관심이다. 이것이 이웃의 정이고, 도리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들여다본 우리 동네 사람들의 삶은 편안하고 푸근하게 우리 앞에 다가온다. 한낮 농사꾼이고, 장사꾼인 금산 사람들의 일상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로 하여금 향수에 젖어들게 한다.
다정한 불희와 정하, 멋쟁이 준모, 금강민속축제에서 만난 상준이 형, 천렵하는 필섭씨, 따스한 봄날의 오수를 즐기는 아주머니, 펜싱선수 미주의 땀과 웃음 등 이 책에는 앞니 빠진 개구쟁이 아이부터 노인당 앞에서 웃음 짓는 노인까지 다양한 금산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맑은 눈동자의 철부지 어린 아이든, 쑥스러움을 타는 사춘기 청소년이든, 난전의 고단한 상인들이든, 잔주름 깊게 패인 노인이든, 작가에게 삶의 한 조각씩을 고스란히 도둑맞았다. 그들은 작가가 작업해온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걸쳤던 두꺼운 옷을 벗고는 얇은 옷차림으로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작가와 공범자가 되어 독자들에게 또다른 웃음을 내보인다.
작가는 사진을 통해 그들에게서 훔쳐온 시간과 공간을 돌려주고자 한다. 쉽게 잊고 사는 일상의 한 단면을 뚝 떼어다가 현재, 혹은 미래의 어느 시간에 내어놓으며, 우리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 사진이며, 이야기이다. 이 작업은 과거와 미래,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마치 가족사진첩을 펼쳐든 아이와 엄마가 지난 시간을 넘나들며 미소짓듯이…….



웃음, 웃음? 웃음!
작가는 여러가지 표정 중에서도 ‘웃음’을 통해 금산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고된 삶의 활력소이자, 대화의 윤활유인 웃음이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이어진다.
웃음이 담긴 100여 장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면 금세, 금산이라는 한정된 지역을 뛰어넘어, ‘우리 동네’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삶이 이와 닮지 않았을까. 바로 내 이웃의 얼굴이자, 고향의 얼굴인 것이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선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고, 시장 상인들의 모습에서는 활력이, 어린아이의 해맑은 얼굴에서 순수함이 느껴진다. 고향의 향수가 아련한 이 시대에 내 이웃사람, 내 고향 사람의 밝은 웃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는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웃음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잠시 잊었던 웃음을 되찾아주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웃음과 웃음이 제공하는 긍정적인 생각과 삶이야말로 ‘우리 동네 사람들’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인 것이다.



여백과 그들의 빈자리
이 책은 여백이 많다. 뒷부분에는 아예 여러 장 빈페이지가 연속하기도 한다. 마치 독자들은 잘못된 책을 구입했구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큰맘 먹고 산 책이 왜 이렇지’ 하는 독자들의 배신감을 해소해줄 재미가 바로 그 여백에 숨어있다. 작가는 그동안 작업해온 사진을 정리하면서 금산에도 3,40대의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거나, 타향살이로 자리를 비운 것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금산만의 일도 아니다. 그들의 빈자리는 늘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신 채워지고 있다. 이러한 빈자리를 이 책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빈자리는 ‘나’의 자리일 수도 있고, ‘우리’의 자리일 수도 있다. 그 빈자리를 지켜주는 어머니 마음 같은 고향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너그럽기도 하다.

이 책의 기획자이자 북디자이너는, ‘편안한 사진을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객관적인 사실이 객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사진과 사진이, 사진과 독자가 대화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양해남의 사진들은 편안하다. 보라고 강요하거나 독촉하지 않는다. 그냥 스쳐보아도, 여러 번 다시 보아도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주는 사진이다. 이것은 사진 속에 진실한 삶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흔적들이 모여앉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묻어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보면, 어느새 그 대화에 끼어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 시장 난전에서의 흥정과 변화에 민감한 아이들의 낯선 대답들, 새로운 변화가 난감한 어른들의 걱정 따위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차한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한 대화는 독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소박하지만 우리 동네는 건강하게 살아있다. 그 힘이 우리 동네를 지켜가는 힘이며, 우리 동네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진정, ‘우리’가 존재하는 동네는 ‘우리’로 하여금 힘을 가진다. 우리 동네, 우리 나라…… 힘내라 대한민국!

이 책은 사진과 여백 그리고 대화로 구성된다. 사진과 사진은 두서없는 듯하면서도 나름대로의 흐름을 가지고 자유롭게 늘어서고, 그들의 대화가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넘나들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는 다시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더욱 발전한다. 이처럼 이책은 개입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유는 얼마나 즐겁고 흥분되는 일인가. 최근 광고문구로 사용된 말처럼 “상상초월”인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의 서시 격인 「꽃」은 작가가 1993년에 쓴 시로, 장사익이 노래로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그러나 장사익을 아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여러 방면에 드러나 있지만, 한꺼풀 가려져 있다. 사진작가 양해남은 1965년 금산에서 태어나 줄곧 금산에서 살고 있다. 영화, 문학, 음악 등 예술에 대한 애착으로 끊임없이 그에 따른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동안 그가 해온 금산의 자연과 문화에 관한 사진 작업이 여러 권의 책으로 묶여지기도 했다. 현재, 금산문화의 집 운영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금산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문화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작품집으로 『공간의 발견』(1997)이 있다.
‘매일매일 물을 주고 항상 바라봐줘야 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한순간이라도 놓칠 수 없는, 승산없는 짝사랑을 그는 오래도록 해오고 있다.



벗기고 만져보는 책
이 책은 순백색의 고급 인쇄용지(스노우화이트)를 사용했으며, 장정은 ‘누드양장제책’으로, 숨겨져왔던 책등의 신비감을 노출시켜 북아트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였다. 겉표지는 포장용지로 사용되는 팬시크라프트를 사용하여 보다 안전하게 책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펼쳐서 볼 수 있는 감각적인 재미를 더하였다.
목      차
 
서      평  /   편 집 부 의 견
작가의 말 중에서

(중략)

나는 사진을 찍는다.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또한 내가 보았든 보지 못했든, 사진에는 많은 시간이 담겨진다. 그 시간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또 다른 시간 속으로 흘려보낸다. 그리움이 담긴 병처럼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중략)

2000년부터 2003년의 금산을 나는 기억한다. 이른 아침부터 숨찬 자리다툼과 입에 붙어버린 외침들로 시작되는 정겨운 금산장을 중심으로 나의 기억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땅을 일구며, 땅과 함께 사는 사람들. 물건을 사고 팔며, 신용으로 사는 사람들.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급변하는 아이들. 그리고…….

(중략)

나는 웃음에 골몰하였다. 슬픔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웃음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웃음에 골몰할수록 세상에는 온통 웃음 밖에 보이질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라고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에게 웃음이 많아진 것이다. 웃음은 전염병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번져갔다. 도처에 웃음꽃이 만발하였다.

“이렇게 다른 세상도 있었구나!”
(중략)

2003년, 현정이를 다시 만났다.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처음 만났던 현정이는 내가 못 알아볼 만큼 변해 있었다.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현정이를 보는 순간, 마치 시간을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현정이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와! 언제 찍은 사진이에요?”
현정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4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현정이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현정이는 그때의 상황을 기억해내며 더욱 재밌어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둑맞은 시간을 즐겁게 돌려주고자 한다.
“많이 변했지?”
현정이는 많이 쑥스러워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피부가 고왔다고 하면서 얼굴을 어루만졌다. 시간이 스쳐가는 모양이었다.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그들의 마음이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자연미인이라 부른다. 금산의 자연미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해설 중에서

울고 웃는다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 두 마디의 짧은 말 속에서, 심오한 논리구조로 무장한 어떤 선언적 문구보다, 또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포장한 시적 표현보다, 삶 자체를 꿰뚫어보는 명쾌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그러하듯 인생은 수많은 사연과 사건들이 웃음과 울음 사이를 넘나들며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그 결과는 결국 또 울고 웃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삶은 흔적들은 그들의 표정 위에 그대로 새겨지면서, 시간의 지형을 그려냅니다. 울거나 웃거나, 거기에는 감각이 살아있고 감동이 배여 있으며 고착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표정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무표정은 바로 무감각을 의미하는 것이니, 무표정에서는 어떤 생명력이나 감동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중략)

무표정한 사람만큼이나 재미없는 것이 바로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도시일 것입니다. 온갖 공업물질로 뒤덮인 지표면은 더 이상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울 여유를 주지 않고, 물이 흘러들어 생명이 지속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생명력이 사라진 땅은 무감각한 땅이며 거기에는 건강한 표정이 없습니다. 물질화된 대도시는 이미 표정을 짓지 못할 만큼 단단한 외피들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공간들이 그러하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경영방식도 그러합니다. 그들의 웃음은 울음을 가장하고 있으며 울음 역시 웃음을 저 깊은 곳에 숨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수가 이탈된 자리에는 가식과 위선이 들어찹니다.
삭막한 풍경은 삭막한 인심을 낳고, 굳어진 표정은 또한 무표정한 풍경과 닿아 있습니다.

웃음은 가벼운 재치가 아니라 삶의 애환을 승화시키는 고귀한 인격입니다. 양해남의 사진은 그래서 표정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소중한 삶의 기록이자 풍경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금산엘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통해 금산의 밝은 풍경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애버리지니들의 표정에서 황무지 바위산의 풍광을 읽었듯이, 금산 사람들의 건강한 웃음에는 그들의 건강한 삶터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동네 개구쟁이들의 사과볼에서, 어린 여학생의 수줍은 미소를 넘어, 장터 노인들의 파안대소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역동적인 삶의 풍경들은, 오래전 대도시에서 잃어버린 우리들의 익숙한 일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넘겨보며 잔잔한 감동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웃음 속에 새겨진 삶의 풍경」- 박승진(조경가, 서안조경(주) 실장, 서울시립대학교 출강)
저 ( 역 ) 자    약     력
『우리 동네 사람들』의 서시 격인 「꽃」은 작가가 1993년에 쓴 시로, 장사익이 노래로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그러나 장사익을 아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여러 방면에 드러나 있지만, 한꺼풀 가려져 있다. 사진작가 양해남은 1965년 금산에서 태어나 줄곧 금산에서 살고 있다. 영화, 문학, 음악 등 예술에 대한 애착으로 끊임없이 그에 따른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동안 그가 해온 금산의 자연과 문화에 관한 사진 작업이 여러 권의 책으로 묶여지기도 했다. 현재, 금산문화의 집 운영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금산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문화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작품집으로 『공간의 발견』(1997)이 있다.
‘매일매일 물을 주고 항상 바라봐줘야 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한순간이라도 놓칠 수 없는, 승산없는 짝사랑을 그는 오래도록 해오고 있다.


양해남 사진전 “우리 동네 사람들”

서울전시
기간 : 2003년 11월 29일부터 2003년 12월 16일까지
장소 : 선유도공원 내 한강전시관 2층 기획전시실
주최 : 도서출판 연장통
기획 : 도서출판 연장통
행사 : 오프닝(2003년 11월 29일 오후 4시, 전시실), 작가와의 대화(2003년 12월 14일 오후 2시, 전시실)

금산전시
기간 : 2003년 12월 6일 부터 2004년 1월 10일까지
장소 : 금산문화의 집 1층 전시실
주최 : 금산군
주관 : 금산문화의 집, 도서출판 연장통
행사 : 오프닝(2003년 12월 6일, 전시실)


“우리 동네 사람들”사진전은 사진작가 양해남의 개인전으로 작가가 그동안 금산에 살면서 웃음을 소재로 작업해 온 결과물이다. 그동안 금산의 자연과 문화를 사진에 담아왔던 작가가 그곳에 삶을 풀어놓은 사람들의 모습과 푸근한 이야기에 감각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고된 삶의 활력소이자, 대화의 윤활유인 웃음을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하면서,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이 사진들은 금산이라는 지역성을 넘어서 대한민국이라는 큰 동네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선 삶의 평온함이 배어나오고, 시장 상인들의 밝은 웃음에선 활력이,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에선 순수함이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내 이웃사람들의 얼굴이자 내 고향사람들의 얼굴인 것이다. 요즘처럼 이웃과 이웃이 얼굴도 모르는 시대, 고향의 향수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내 이웃사람, 내 고향 사람의 밝은 웃음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는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섬이라는 특별한 공간, 공원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열리는 “우리 동네 사람들” 사진전은 잠시 복잡한 삶으로부터 벗어나와 자신과 우리를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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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hy311 2009-01-03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장 통 / 우리 동네 사람들

yonjangtong@korea.com

출판사이름 연장통
전문분야 종합
대표자성명 최훈
주 소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287-3(4층)
전 화 02-2057-9495
FAX
E-mail yonjangtong@korea.com

emhy311 2009-01-0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해남 - 1965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에서 시를 쓰는 모임인 「좌도시(左道詩)」의 동인으로 20여 년째 활동해왔다. 자연과 사람을 담는 사진작업도 꾸준히 하여 네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몇 편의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으며, 현재는 오디오 전문잡지 「하이파이저널」에서 재즈와 월드뮤직 평론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공간의 발견>, <우리 동네 사람들> 등의 사진집이 있고, 엮은 책으로 <포스터로 읽는 우리 영화 삼십 년 - 1950-1980 한국영화포스터 사전>이 있다.
 


내내가 만난 동백아가씨


항상 어긋나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깨를 부딪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면서
그래도 아버지와 같이 듣는 동백아가씨
같은 자리에서 다른 귀로 노래를 듣는다
지금까지 어떤 의견 하나 일치하지 않게 애썼음에도
동백아가씨는 어버지도 나도 좋아하는 노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날들을 갈등 속에서 지내면서도
애간장 녹이는 동백아가씨는 아직도 건재하다
낡은 전축판에서 들려오는 잡음들
껄끄러웠던 사이를 대신해주며
무언가 한가지쯤은 같은 것도 있다는 가능성을 들려준다
항시 큰아들이라는 굴레를 부담으로 안겨주며
철들 줄 모르는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
아버지의 한숨소리
나의 한숨소리가
동시에 새어나온 순간
서로 놀란 눈빛을 피하며 노래를 들었다
동백아가씨 만큼만 맘이 맞았더라면 하는 바램으로
노래를 듣고
다시 또 듣는다


1999년 좌도시 동인시 15집 “일어라 일어라 바람이여” 에 수록된 저의 졸시입니다.
지금 저의 아버지는 저를 거의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냥 저 알아서 살라고...
물론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잠깐 아버지와 듣던 동백아가씨가 생각나서 주절거려 봤습니다.
 

 *  양해남 님의 시 이야기 입니다. (불펌 ,했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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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남 2010-07-0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항상 감사드립니다. 제블로그에 놀러오세요^^http://blog.daum.net/mrswing
 


필름 2.0

어느 수집가의 영화 유산 답사기 인물 특집 | 수집가 양해남


기사입력 2005-04-21 19:50 |최종수정2005-04-21 19:50





양해남은 한국영화 수집가로서는 '동급 최강'이다. 자료의 양과 질 모두에서 그렇다. 더욱 주목할 건 그가 개미처럼 모으는 데만 매진하는 게 아니라 지식과 이론이 받쳐 주는 '진정한 수집가'라는 사실이다. 정보와는 당최 거리가 멀어보이는 촌마을 금산에서 이 많은 자료를 모은 비결은 뭘까?

1997년 광주비엔날레를 앞두고 큐레이터 김진송은 속이 탔다. 비엔날레 기획 전시 행사 중 하나였던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展에 필요한 자료를 구할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 사회의 일상적 풍경을 통해 당대를 살았던 대중들의 기억을 환기하려는 취지로 마련된 이 전시회에서 김진송은 60년대 말 극장 풍경을 재현하려 했다. 60년대 대중문화의 첨병인 영화와 그 소비 공간이었던 극장을 통해 동시대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려는 취지의 프로젝트였다. 그가 필요했던 건 당시 '고무신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최루성 신파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오리지널 포스터 한 장. 시대를 풍미한 히트작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터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난다 긴다 하는 영화 수집가들을 모두 만났지만 모두 허사였다. 난망한 처지의 그에게 한 줄기 서광이 비춘 건 평소 친분이 있었던 영화감독 육상효(<아이언 팜> <달마야, 서울가자>)를 만나면서다. 육상효는 그에게 자신의 고향 금산에 "진짜 수집의 고수가 있다"며 한 남자를 소개하게 된다. 김진송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심정이 되어 금산으로 향했다. 금산에서 만난 그 사내는 "<미워도 다시 한 번>? 그거 나한테 속편까지 있는데"라고 퉁명스럽게 말해 그를 놀라게 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이가 모은 수천 점의 자료들은 어느 수집가의 컬렉션에서도 보지 못한 희귀본들이었다. 수집가 양해남의 진귀한 영화 자료들은 그렇게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촌마을의 시네마 천국

양해남을 만나면 두 번 놀란다. 영화는 물론, 사진, 음악, 문학, 미술, AV 등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그의 문화적 잡식 취향에 먼저 놀라고, 방대한 컬렉션과 희귀한 자료들에 두 번째로 놀란다. 우표와 음반, 프라모델 등, 일반적인 컬렉터의 수집 편력 수순을 밟아오던 그가 최종 안착한 곳은 영화. 유년기, 고향 금산의 시골 극장에서 살았던 영화광 꼬마는 세상의 모든 걸 극장에서 배웠다. "<시네마 천국>을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토토는 완전히 내 이야기더라고요" 친구들이 고기 잡고 산과 들을 쏘다닐 때, 어두컴컴한 극장을 놀이터 삼았던 별종 소년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세상을 그곳에서 보았다. 아침 먹고 극장에 가서 그곳에서 잠이 들어 극장 청소부에게 업혀 집에 오는 게 소년 양해남의 일과였다. 에로영화를 보면서 '아기가 태어나는 이치'를 깨달았고 스크린을 수놓는 영상을 통해 손바닥만한 시골 마을 너머에 있는 거대한 세상을 상상했다.

양해남은 인삼으로 유명한 고장, 금산에 산다. 그 곳에서 5년째 그가 하고 있는 지역 문화 창달에 힘쓰는 '금산문화의 집' 운영실장. 쉽게 말해, 공무원이다. 해마다 열리는 '인삼 축제'를 기획하는 것도 그가 하는 일 중 하나다. 그 외에도 그는 사진을 찍고(<우리 동네 사람들>이라는 사진집을 낸 정식 사진 작가다) 시를 쓰고(장사익의 곡 <꽃>이 그가 쓴 시다), 오디오 평론(한때 그의 집은 각종 오디오 기기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을 한다. 이 정도면 '문화 게릴라'라는 직함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 뿐인가. 영화 자료 수집가로서 그는 약 4백~5백 편의 35mm 필름과 5백~6백편의 16mm 필름, 1천여 점의 유일본을 포함한 2천4백여 점의 영화 포스터, 영화 관련 음반, 영사기, 렌즈 등 방대한 영화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1998년, 창고에서 뭉텅이로 도둑맞은 1만여 점의 포스터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애써 모은 자료(그는 도난당한 포스터가 자료로서 가치가 떨어져 따로 창고에 보관해둔 것들이라고 했다)를 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 것도 도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중 발군은 50~70년대 기라성 같은 한국영화 작품들의 오리저널 포스터. 시중에 돌아다니는 <양산도> <자유부인> <마부> 등 한국영화 걸작 포스터는 모두 그의 자료 창고에서 나온 복사본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터. 금산, 그의 집에서 직접 본 그 진귀한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와 사이즈뿐 아니라 퇴적된 시간의 흔적이 물씬 밴 진품의 아우라를 풍겼다.

양해남은 자신을 '변태'라고 부른다. 관람-연구-창작으로 진화하는 일반적인 영화광의 진화 궤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화 소비 취향은 꽤나 특이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극장에 가지 않는다. 이유는 극장에선 영화를 다시 되돌려 보여 주지 않기 때문에. "옛날부터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그걸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상적인 장면은 정지시켜서 계속 보고 싶은데 극장에 가면 그게 안 되잖아요." 이 같은 이상 기호는 '되돌릴 수 있는' 비디오 수집으로 이어졌고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한 '변태' 남자는 급기야 필름을 모으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필름을 세울 수는 없는 법이지만, 변태에게 불가능은 없다! 영사기를 구해 필름을 돌리다가 보고 싶은 장면에서 영사기를 세우고 필름 위에 종이로 표시를 하는 극악스러운 만행(?)까지 저질렀다. 기괴한 이 행태를 보고 "당신은 염색체 배열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하튼, 양해남에겐 뭔가 특별한 기질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대전에서 귀인을 만나다

'영화를 갖고 싶다'는 소유욕에 불탔던 양해남이 본격적으로 영화 자료 수집에 나선 건 한국 영화사에 자료가 부재한 현실을 깨달으면서부터다. 영화 전래, 100년을 바라보는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과 30~40년 전 필름, 포스터를 구할 수 없다는 건 충격이었다. "농부들이 옛날 영화 필름을 잘라서 밀짚 모자 띠로 썼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그것만이 아니더라구요. 필름을 녹이면 구두약이 된다누만요. 그걸로도 많이 썼대요. 귀중한 필름이 누군가의 발에 칠해져 있겠구나 생각하니까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즈음 영화 자료의 보고라는 프랑스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대한 이야기를 듣었고 프랑스를 동경하기도 했다. 필요할 때 언제나 영화와 자료를 볼 수 있는 '컬렉션'에 대한 욕망은 이 순간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다.

공공기관도 하기 힘든 자료 수집을 개인이 한다는 건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던 수집 작업에 물꼬를 튼 결정적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양해남은 고교 시절부터 드나들던 대전의 한 다방에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된다. 군대를 제대한 후, 처음 찾은 그곳에는 꽤 많은 한국영화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양해남은 즉시 사장님을 찾았다. 다방인 줄 알았던 그곳은 영화 자료 전시장이었고 다방 사장님인 줄 알았던 그 분은 대전, 충청 지역 극장 흥행업을 주무르던 거물급 배급 업자였던 것. "그 어른이 이 포스터를 갖고 싶으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주신다면, 여부가 있습니까. 젊은 놈이 옛날 영화 자료에 관심을 보이니까 신기하셨는지, 넌 나이도 젊으니까 꾸준히 이런 걸 수집해서 가치 있는 일을 해 볼 수 있겠다고 길을 열어주셨죠."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대전의 베테랑 흥행사에게 첫 자료를 구입한 후, 양해남은 헤어날 수 없는 수집가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대전에서 만난 귀인은 양해남에게 전국의 지방 흥행사들을 하나둘 연결시켜줬다. 그 후로 자료 수집은 일사천리. " 그분들 조직이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흥행사들이 필름이나 포스터를 가지고 있는 건 자기가 그 영화를 통해서 돈을 벌었거나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죠." 그 때부터 전국 곳곳에 흩어진 극장주들의 라인을 통해 숨어 있던 '보물'들의 존재가 그의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구에 무슨 영화 필름이 있대, 춘천에 무슨 영화 포스터가 있대라는 정보를 듣는 즉시, 양해남은 버선 발로 달려갔다. 자료로 한 번 연결된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면부지의 천둥벌거숭이 청년이 자료를 달라고 하면 선뜻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에게는 불굴의 의지와 넉살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지방 흥행사들을 구워 삼기 위해 한 손에는 막걸리, 한 손엔 쇠고기를 들고 찾아가, 친화력을 발휘해 인간적인 정에 호소하거나, 사례를 원하는 이에게는 돈을 안겼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에게는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료가 있다면 아무리 멀고 험한 오지도 가리지 않았다. "포스터 한 장 구해서 집에 걸어 놓으면 그날 밤 잠이 안 와요. 거의 하늘을 날죠." 남의 집에 걸려 있는 포스터를 보면 그걸 떼어 오고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걸 떼어오면 설레어서 잠을 이루지 못한 시간만, 어언 10여 년이다.

고통과 환희의 나날

지방 배급 라인을 통한 영화 자료 수집은 양해남 만의 노하우다. 개별적으로 지방 극장들을 찾아 발품을 파는 수집가들이 있지만 그처럼 체계적으로(?) 배급 라인을 가동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사동에서 전국의 나카마(골동품 중간 상인을 부르는 은어)들에게 오더를 내린 적이 있어요. 고물상이든 어디든 털어서 양해남이 가진 물건과 같은 걸 가져오라고. 포스터가 장독대야, 도자기야? 그렇게 해선 한 장도 못 구해요." 과거 그 영화를 가지고 장사를 했던 지방 극장주들만큼 확실한 자료의 보고는 없었다. 그가 어디에도 없는 1천여 점의 유일본 포스터를 수집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라인의 차별화 때문이다. 흥행사에게 물건 주문이 들어가면 그가 부리던 당시 영사 기사, 극장 직원, 포스터 붙이는 사람에게까지 수소문이 갔다.

방대한 수집망을 거느릴(?) 수 있었던 건 그의 '젊음'과 '진정성' 때문이었다. 씨알이 먹히지 않는 어른들께는 개인의 욕심을 위해서 자료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치 있는 일에 쓸 것이라는 다짐을 수없이 했고 수십 년간 애착을 가지고 보관하고 있는 물건 때문에 갈등하는 분들에겐 성의껏 사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돈을 주고 자료를 구한다는 점에서도 양해남은 달랐다. 더러 수집가들이 극장주들을 찾아가 무상으로 자료를 얻는 경우가 있었지만 가격을 매겨서 구입하는 건 거의 유일했다. "그러니까 흥행사들 사이에서 양해남이는 이걸 산다는 소문이 퍼진 거예요. 그 때부터 갑자기 전화가 폭주, 우리 극장에 어떤 영화 있다. 나 어떤 포스터 가지고 있다 하면서." 어느 지방 흥행사의 애지중지하던 유품을 얻은 건 지금도 잊지 못할 사건이다. 미망인이 유품으로 가지고 있던 30여 점의 자료를 얻기 위해 양해남은 할 일 못할 일 다 해봤다. 삼고초려도 모자라 사고초려, 오고초려를 거듭했고 미망인이 좋아하는 게 뭔지를 파악해 선물 공세까지, 남들이 보면 스토커로 오해할 만큼 끈질기게 매달렸다. 결국 "큰 뜻이 있다"는 젊은 청년에게 미망인은 두 손을 들었다. 강대진 감독의 <마부>는 선배 소개로 만난 사람의 집에 걸려 있는 걸 기어이 떼어 왔다.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그 영화의 오리지널 포스터가 액자로 거실에 걸려 있는 걸 봤을 때의 흥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녕 모르리. "안절부절하다가 다음날 만사 제쳐두고 쫓아갔어요. 갖고 싶다 그랬더니, 안 준다. 세 번 가니까 주더라고요. 그런 걸 얻을 땐, 진짜 감격이에요."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그것이 필요해서 쫓아다니고 얻을 때는 가격으로 환산을 하는 컬렉터라는 점에서 양해남은 전문 수집가였다. 가끔 이를 악용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야 했다. "거절하면 그것으로 거래 라인 하나가 끊기거든요. 꼭 필요한 자료라면 거금을 주고라도 삽니다." 소문이 나고 물건 구하기가 쉬워지면서 생활은 곤궁해졌다. 카메라, 오디오를 처분했고, 남들 집살 때 받는 은행 대출을 받고 급기야 집까지 팔았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료로 인한 설레임 때문에 잠 못 잔 거 말고는, 누적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무거운 필름통을 들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사 비용은 몇 배가 되기 일쑤였고 무거운 자료 때문에 아파트 무너진다며 항의를 들은 적도 있다. 이사를 갈 때도 사람 보다 자료가 먼저다. 햇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꼭대기층은 사절이고 습도 없는 집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이해심 많은 아내가 흘린 눈물만 얼마던가. 어떤 어려움과 시련도 자료에 대한 그의 흥분과 열정을 이기지는 못했다.

모은다고 수집가가 아니다

양해남의 주종목은 포스터. 한때 외화 포스터도 모았지만 지금은 한국영화 포스터, 그중에서도 50~70년대 포스터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포스터를 주력 종목으로 삼은 건 보존 가치가 확실한 '진짜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스터가 영화 사료의 가치 외에도 당대 유행과 트렌드, 복식, 생활 문화, 예술 양식 등이 녹아있는 연구할 만한 '물건'이라고 믿는다. '물건'의 가치를 매기는 잣대는 다양하다. 한국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가장 먼저 고려하지만 당대의 생활, 문화사적인 흔적이 묻어 있는 자료도 수집 대상이다. 제목이 웃겨서 수집한 작품들도 있다. <살사리 몰랐지>나 <지옥은 만원이다> 이런 이유로 수집 목록에 올랐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나 <신사는 미녀를 좋아한다>처럼 패러디 유형을 통해서는 당대 유행했던 세계영화의 기류들을 읽을 수 있다. 포스터 자체의 완성도도 판단 기준 중의 하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는 포스터 디자인이나 그림, 카피 따위의 변천사도 그에겐 흥미로운 연구 거리다. 후일 소장 자료들로 전시회를 열 경우를 대비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기획 전시 과정까지 따로 공부했을 만큼 자료에 대한 그의 집념은 끝이 없다.

무작정 시작한 수집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옥석을 가리는 그의 감식안은 날카로워졌다. 웬만한 한국 영화사 연구자를 능가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의 소유자가 된 것도 제대로 된 수집가가 되기 위해서다.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고 손전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 책 어디에도 안 나와요. 포스터는 나한테 있는데, 희한하죠? <검사와 여선생>도 48년도에 윤대룡 감독이 만든 무성영화 말고 58년 경에 토키로 리메이크된 작품이 있거든요. 그런데 기록이 없어요. 아마 누구도 모를 거예요. 그런 거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무슨 소리! 포스터가 있는 걸." 작곡가로 알려진 박시춘이 60년대 많은 히트작을 냈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다는 사실, 정창화 감독이 쇼브라더스에서 활약하던 시절 성룡과 임청하가 한국에 와서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브이> 제작자가 유현목 감독이라는 사실까지, 그냥 두면 밤을 샐 기세다.

양해남은 자신이 소장한 수천 점의 영화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시대별로 정리해 자료화해 놓았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사진 자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도 만들어 놓은 상태. 10여 년 간 독학한 한국 영화사 공부의 결과로 지금 당장 전시회를 한다고 해도 큐레이팅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지식도 쌓았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모으기만 한다고 수집가가 되는 건 아니고 학습만 한다고 지식인이 되는 건 아니다." 진정한 수집가의 완성은 자료를 자기 지식화하고 가치 있게 재활용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자료는 공유돼야 한다

양해남은 선조들이 남긴 문화 유산의 개념으로 영화 자료를 다룬다. 설령, 한국영화 포스터가 일본의 디자인을 그대로 베꼈다 해도 거기에는 영화의 역사, 문화사, 민속사, 풍물사 등이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수집을 하면서 그는 한국 사람이 영화의 수준을 더 폄하하는 현실을 느꼈다. 그는 "하물며 반공영화나 선전영화라 할지라도 자료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다"(실제로 그의 자료 중엔 '대한뉴스'도 있다)고 말한다. 신파 영화, 호스티스 영화, 에로영화도 마찬가지다. "신파 영화에서 눈물의 의미에 대한 탁월한 연구가 있다면 조금 다르겠죠. 그래서 연구가 중요합니다. 최근 감독들을 '작가'라고 부르면서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 감독들을 연구하지 않는 건 이해가 안 가요. 그 감독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영화가 가능했을까요?" 그에게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나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포스터를 볼 수 없는 건, 신라 시대 불상이나 고려 청자를 볼 수 없는 아픔이나 진배 없다.

수집가로서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자평하는 양해남은 지금 이 방대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피땀 어린 자료들을 처분하려는 이유는, 맹목적인 집착으로 오해되는 영화에 대한 애정의 끝을 보고 싶다는 게 하나요, '자료는 공유돼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가 둘이요, 본업인 사진에 충실하기 위해서가 셋이다. 그의 자료들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쓸 수 있는 기관은 영상자료원일 것이다. 하지만 영상자료원도 예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 영상자료원에서는 그에게 '무상 기증 의사'를 타진해 왔다. "지난 20년간 자료에 쏟은 젊음과 열정을 생각하면, 한 푼도 받지 않고 자료를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재를 노리고 자료를 모은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비난도 들었고, 실제로 거액을 제시하며 물건을 넘기라는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몇 번 제안이 왔었어요. 자기들 스타일하고 비슷하니까 좋아하나본데, 일본에 넘기면 돈은 많이 받겠죠.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될까요. 난 영원히 매국노예요." 거액의 제안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한 데 모여 있어야 자료로서의 가치를 발하는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영상자료원과 같은 공적 기관에 관리를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확실한 건, 한국 영화사의 한순간을 증언할 이 역사적인 유산들이 찢어지고 상처나고 사라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이 원칙을, 양해남은 '수집가의 윤리'라고 부른다.

사진 김춘호 기자

장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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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hy311 2009-01-03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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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검은 음반들을 대충 살펴보니 단일 품목? 으로는 팝부문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압도적이군요. 거의 40타이틀에 육박을 합니다.
이렇게 엘비스가 많은 이유가 있지요.^^

전에 일본으로 집사람이랑 여행을 갔습니다.
저의 주된 목표지점은 우에노와 진보초였습니다.
진보초는 서점가로 유명하지요? 책도 책이지만 음반가게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목표물 검은 비닐.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레코드 가게에 들러 음반을 고르는데, 아내의 눈길이 곱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얼른 엘비스 음반을 꺼내 들었지요. 순간 아내의 표정이 확 바뀝니다.
물론 다른 음반들과 함께 구입을 했습니다.

가끔씩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음반을 구입합니다. 택배로 받아 보는데,
이렇게 주문한 음반들 속에는 엘비스가 한두 장씩 들어 있습니다.
아내의 눈초리가 아주 곱게 변하지요.
“생활의 지혜”입니다.

저 없이 아내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엘비스를 듣더군요.
여러 곡 중에서 저도 아내도 좋아하는 곡은 “SOMETHING BLUE"라는 곡입니다.
제가 물어 보았지요.
“엘비스 참 노래 잘하지! 그런데 어디가 그렇게 좋아?”
“나 원 참! 잘~생겼잖아!”
아주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ㅋㅋㅋㅋㅋ
또 아내만 좋아하는 한 곡은 “DON'T”라는 곡입니다.
이 노래를 들어보면 돈트에서 거의 트자는 들리지 않습니다.
돈~ 돈~ 돈~ 어휴!!! 저는 이 노래가 나오면 확 꺼버립니다.
(사실 확 꺼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위 사진의 가운데 보이는 엘비스 사진집을 보면 젊었을 때 엘비스의 잘 생긴 모습을
확연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책도 제가 선물로 구입해서 주었지요.
(보이는 페이지는 RCA정규 음반 재킷입니다.)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엘비스를 듣습니다.
듣기 싫어도 듣습니다.
마구마구 듣습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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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hy311 2009-01-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해남 님의 글입니다.
장사익의 노래 꽃을 지은 시인 입니다.

emhy311 2009-01-0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해남
엘비스의 소속사가 RCA였죠? 혹, 다른 음반사가 있다면 모르겠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정확히 정규앨범은 52타이틀이 발매되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편집반까지는 100타이틀이 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 정규앨범 중 절반 이상은 가지고 있군요.^^
그리고 남진 앨범은 9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좋아하거들랑요.^^

http://www.youlhwadang.co.kr/frame.htm
 






 

 

 

 






포스터로 읽는 우리 영화 삼십 년

 


1950-1980 한국영화포스터 사전



양해남 역음




2007년 11월 1일




B5 변형/ 양장




336면




50,000원




올컬러 2000여 컷




978-89-301-0286-5


 



 




 

한국영화자료 수집가 양해남(梁海南)이 오랜 기간 수집해 온, 1950년부터 1980년까지의 한국영화포스터 2,000여 점을 담았다. 그 동안 수집가로서 매체를 통해 간간이 소개된 적은 있었지만, 그 실체가 전면적으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이 책에 실린 포스터들은 모두 해당 영화의 정규 포스터들로서 우리 영화사 자료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료적 가치 살린 방대한 수집의 집념-김종원

 

1950-1960

1961-1970

1971-1980

 

한 장의 영화포스터로 꿈꾸는 새로운 만남-양해남

 

찾아보기 -영화 -영화인 -영화사

 


 


    





 


 

한국영화자료 수집가 양해남(梁海南, 1965- )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시를 쓰는 모임인 『좌도시(左道詩)』의 동인으로 20여 년째 활동하면서 올해로 스물두번째 동인시집에 참여하고 있으며, 자연과 사람을 담는 사진작업도 꾸준히 하여 네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몇 편의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으며, 오디오 전문잡지  『하이파이저널』에서 재즈와 월드뮤직 평론을 하고 있다. 사진집으로 『공간의 발견』(1997), 『우리 동네 사람들』(2003)이 있다.

 


 


 




 


 

숨어 있던 2,000여 점의 한국영화포스터 공개

우리 영화계를 들썩이게 할 대규모 컬렉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실체는 1950년부터 1980년까지의 한국영화포스터 2,000여 점. 이 중 1,000여 점이 유일본이며, 그 이상의 수가  해당 영화 필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자료다. 이 엄청난 컬렉션의 주인공은  한국영화자료 수집가 양해남(梁海南, 1965- ). 그 동안 수집가로서 매체를 통해 간간이 소개된 적은 있었지만,  그 실체가 전면적으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지금까지 몇몇 정규포스터나 전단지 형태의 영화선전물들이 선보인 적은 있지만, 이 책에 실린 포스터들은 모두 해당 영화의 정규포스터들이며,  지금까지 공개된 정규포스터들도 그 대부분이 양해남 컬렉션의 일부가 대여, 카피된 것들이었다. 더불어 이 책에 실린 대형포스터들은 더욱 희소가치가 높은 귀중한 자료들이다. 일반 포스터(약 50×70cm)의 2-4배에 이르는 크기의 대형포스터들은  영화사에서 특별제작한 개봉관용으로 추정되는데, 홍보매체가 부족했던 시절 이러한 대형포스터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우리 영화계는 다른 분야와는 달리 자료의 보존이 잘 되지  않아, 영화필름은 말할 것도 없고 스틸사진이나 포스터도 구해 보기 힘든 상황이며, 심지어는  광고 전단지마저 소중한 자료로 취급되어 온 게 현실이다. 영화사 연구를 위한 1차사료가 사실상 태부족인 셈이다.  이런 현실에서, 열화당에서는 지난 1997년에 『자료로  본 한국 영화사』 1·2(열화당 미술문고 503·504)와 1998년에 『궁핍한 시대의 희망, 영화』(열화당 미술문고 505)를  선보여 우리 영화사 관련 자료를 한층 풍성하게 한 바 있었는데, 이번에 1950년부터 30년간의 영화포스터 2,000여 점을 『포스터로 읽는 우리 영화 삼십 년』으로 묶어 선보인다.

 





 



<검사와 여선생> 1958 . 감독 윤대룡.


 

<마부> 1961 . 감독 강대진.


 

1950년대―눈을 끈 리메이크작 〈검사와 여선생〉

이 책에 실린 1950년대 영화포스터는 〈바다의 정열〉(1950), 〈과부의 눈물〉(1955), 〈자유부인〉(1956), 〈천지유정〉(1957), 〈돈〉(1958), 〈오! 내 고향〉(1959) 등  161점에 이른다. 이는 해당연대의 총 영화제작 편수 219편의 70퍼센트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 중 눈을 끄는 것은 1958년에 제작된 윤대룡 감독의  〈검사와 여선생〉이다. 우수 국산영화에  대한 보상 특혜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운명의 손〉(1954, 한형모 감독)이라는 영화에서 윤인자와 처음 키스신을 시도하여 장안에 화제를 모았던 이향과, 새롭게 김근자 등을 캐스팅해 만든 이 작품은, 1948년 같은 감독인 윤대룡에 의해 먼저 무성영화로 만들어졌었다. 하지만 먼저  만든 무성판은 잘 보존된 대신 나중에 나온 발성판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관련 기록까지 부실했었는데, 다행히도 이 영화포스터 한 장이 남아 그 존재를 환기시켜 주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미망인〉이라는 영화로 알려져 있었던 한국 최초의 여감독 박남옥의 작품 제목이 실제로는 〈과부의  눈물〉(1955)이었음도 밝혀졌다.(포스터에 ‘일명  미망인’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원제는 〈과부의 눈물〉이었고, ‘미망인’은 ‘일명’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박시춘이 1958년에 〈삼등호텔〉 〈딸 칠형제〉 등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는 이색적인 사실도 포스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1960년대―베를린국제영화제 특별은곰상 수상에 빛나는 〈마부〉

1960년대 영화포스터로는   〈철조망〉(1960), 〈에밀레종〉(1961),  〈밤에  찾아온 여인〉(1962), 〈성난 능금〉(1963), 〈혈맥〉(1963),  〈잉여인간〉(1964), 〈흑맥〉(1965),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1965), 〈역마〉(1967),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등 1,000여 점에 이르며,  이 시기에 제작된 1,503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양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포스터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수량이 거의 없다시피한  점을 감안하면, 게다가 태반의 영화필름이 존재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우리 영화의  새로운 발굴’이라 할 수 있다.이 시기의 포스터 중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강대진  감독의 1961년작 〈마부〉로, 이 영화는 1961년 제1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프랑스의 거장  장 뤽 고다르의 〈여자는  여자다〉와 함께 특별은곰상(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 외에도, 파격적인 스토리 설정,  카메라 워크, 삽입음악 등으로 60년대  젊은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 개봉 당시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린 김수용 감독의 최대 흥행작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첩보물이었던 〈스타베리  김〉(1966),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만화영화인 신동헌 감독(만화가 신동우 화백의 친형)의 〈홍길동〉(1967), 한국영화사상 속편이 가장 많이  만들어진 정소영 감독의 멜로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1968), 아역스타 김정훈의 영원한 별명이 된 이규웅 감독의 〈꼬마신랑〉(1970) 등이 이 시대를 장식하고 있다.

 



1970년대―유현목의 〈분례기〉,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

1970년대의 포스터들 역시  풍성하기 그지없다. 1972년에  톱스타 신성일이  만든 〈연애교실〉 〈어느 사랑의 이야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등 세 편이 모두 실려 있으며, 〈임자 없는 나룻배〉(1932)로  유명한 이규환 감독이  어렵게 말년에 만든  유작 〈배따라기〉(1973)는 두말할 것 없고,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서의 정치사회 현상을 엿볼 수 있는 〈아내들의 행진〉(1974, 임권택 감독),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이만희 감독),  〈태백산맥〉(1975, 권영순 감독), 〈잔류 첩자〉(1975, 김시헌 감독)와 같은 새마을, 반공 소재의 국책영화 포스터들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주제가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국내 유력 영화제에서 소외되었던 유현목 감독의 〈분례기〉(1971),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주목을 받은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  요절한 학구파 감독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등이 빛을 발하고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 1975. 감독 김호선.

 

8편의 〈춘향전〉이 한자리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동안 14편에 걸쳐 영화화된 바 있는  〈춘향전〉의 절반이 넘는 8편의 포스터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끈 조미령의 〈춘향전〉(1955, 이규환 감독),  고유미의 〈춘향전〉(1958, 안종화 감독),  김지미의 〈춘향전〉(1961, 홍성기 감독), 최은희의 〈성춘향〉(1961, 신상옥 감독), 서양희의 〈한양에 온 성춘향〉(1963, 이동훈 감독), 문희의 70밀리 영화 〈춘향전〉(1968, 이성구 감독), 홍세미의 〈춘향〉(1968, 김수용 감독), 장미희의 〈성춘향전〉(1976, 박태원 감독) 등이 그 모습들이다. 이 중 절반가량은 필름이 사라졌다. 그래서 포스터의 존재가 값지다.이 외에도 이 책에는 〈놀부와 흥부〉(1950), 〈청춘극장〉(195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빨간 마후라〉(1964), 〈산불〉(1967), 〈사격장의   아이들〉(1967), 〈장군의  수염〉(1968),  〈독짓는 늙은이〉(1969), 〈소나기〉(1978),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등  수많은 흘러간 명화 포스터들로 빼곡하다.

 

근 20년간의 결실이 ‘한국영화포스터 사전’으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영화포스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영화, 산업, 출판, 인쇄, 디자인 등 전문 분야는 물론 우리의 생활사 전반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포스터들을 통한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연구와 분석, 자료화의 의미는 크다. 나는 이 책으로 이와 같이 진지한 소통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밑바탕이 되고자 한다. 영화 연구자, 생활사 연구자를 비롯하여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까지 다양한 분야,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여기 빛나고  있는 한국영화포스터들은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양해남, 「한 장의 영화포스터로 꿈꾸는 새로운 만남」이 책의 엮은이 양해남이 한국영화포스터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이다. 햇수로 19년 만에 2,000여 점을 모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엄청난 결실인데, 그 동안 있었던  수집과 관련한 뒷이야기를 말한다면 책 한  권 분량일 거라 한다. 그런  그가 포스터들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 바로 이 책 『포스터로 읽는 우리 영화 삼십 년』을 통해서인데, 그는 이 모든 자료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우리 영화사를 더욱 풍성하게 할 영화사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포스터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 그리고 지난 시대를 규명해내는  생활사 연구자들까지, 이 포스터 한 점 한 점을 통해  우리의 문화사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한국영화사 연구의 귀중한 1차사료

이 책은 영화평론가 김종원의 서문에 해당하는 「사료적 가치  살린 방대한 수집의 집념」, 그리고 ‘1950-1960’ ‘1961-1970’ ‘1971-1980’ 세  파트로 나눠 시대순으로 영화포스터가 수록돼 있는 본문, 양해남의 후기 「한 장의  영화포스터로 꿈꾸는 새로운 만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귀중한 자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책은 ‘사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태어났다. 해당  영화마다 ‘영화제목’ ‘제작연도’  ‘영화사’ ‘감독’ ‘각본’ ‘촬영’ ‘출연’ ‘선전문구’ 순으로 해당  포스터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는데, 여기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정보뿐만  아니라 기존의 잘못된 정보를 정정해  줄 정보도 많다. 또한 ‘영화’ ‘영화인’ ‘영화사’ 별로 작성한 25페이지에 달하는 ‘찾아보기’는 이 책의 사전 기능을 한층 높여 줄  것이며, 앞으로 한국영화사 연구의 1차사료로서 큰 몫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거 사진 인터넷에 올려도 될련지 모르겠습니다만
양해남선생님이 그간 모아오신 수많은 영화 포스터 중 일부를 올려보겠습니다.
물론 원본입니다.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한국영화의 자료지요.
자세한 설명은 양선생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Perception of the do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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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종 2017-10-0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양해남포스터를 구매할려면 어떻게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