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2.0

어느 수집가의 영화 유산 답사기 인물 특집 | 수집가 양해남


기사입력 2005-04-21 19:50 |최종수정2005-04-21 19:50





양해남은 한국영화 수집가로서는 '동급 최강'이다. 자료의 양과 질 모두에서 그렇다. 더욱 주목할 건 그가 개미처럼 모으는 데만 매진하는 게 아니라 지식과 이론이 받쳐 주는 '진정한 수집가'라는 사실이다. 정보와는 당최 거리가 멀어보이는 촌마을 금산에서 이 많은 자료를 모은 비결은 뭘까?

1997년 광주비엔날레를 앞두고 큐레이터 김진송은 속이 탔다. 비엔날레 기획 전시 행사 중 하나였던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展에 필요한 자료를 구할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 사회의 일상적 풍경을 통해 당대를 살았던 대중들의 기억을 환기하려는 취지로 마련된 이 전시회에서 김진송은 60년대 말 극장 풍경을 재현하려 했다. 60년대 대중문화의 첨병인 영화와 그 소비 공간이었던 극장을 통해 동시대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려는 취지의 프로젝트였다. 그가 필요했던 건 당시 '고무신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최루성 신파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오리지널 포스터 한 장. 시대를 풍미한 히트작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터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난다 긴다 하는 영화 수집가들을 모두 만났지만 모두 허사였다. 난망한 처지의 그에게 한 줄기 서광이 비춘 건 평소 친분이 있었던 영화감독 육상효(<아이언 팜> <달마야, 서울가자>)를 만나면서다. 육상효는 그에게 자신의 고향 금산에 "진짜 수집의 고수가 있다"며 한 남자를 소개하게 된다. 김진송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심정이 되어 금산으로 향했다. 금산에서 만난 그 사내는 "<미워도 다시 한 번>? 그거 나한테 속편까지 있는데"라고 퉁명스럽게 말해 그를 놀라게 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이가 모은 수천 점의 자료들은 어느 수집가의 컬렉션에서도 보지 못한 희귀본들이었다. 수집가 양해남의 진귀한 영화 자료들은 그렇게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촌마을의 시네마 천국

양해남을 만나면 두 번 놀란다. 영화는 물론, 사진, 음악, 문학, 미술, AV 등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그의 문화적 잡식 취향에 먼저 놀라고, 방대한 컬렉션과 희귀한 자료들에 두 번째로 놀란다. 우표와 음반, 프라모델 등, 일반적인 컬렉터의 수집 편력 수순을 밟아오던 그가 최종 안착한 곳은 영화. 유년기, 고향 금산의 시골 극장에서 살았던 영화광 꼬마는 세상의 모든 걸 극장에서 배웠다. "<시네마 천국>을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토토는 완전히 내 이야기더라고요" 친구들이 고기 잡고 산과 들을 쏘다닐 때, 어두컴컴한 극장을 놀이터 삼았던 별종 소년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세상을 그곳에서 보았다. 아침 먹고 극장에 가서 그곳에서 잠이 들어 극장 청소부에게 업혀 집에 오는 게 소년 양해남의 일과였다. 에로영화를 보면서 '아기가 태어나는 이치'를 깨달았고 스크린을 수놓는 영상을 통해 손바닥만한 시골 마을 너머에 있는 거대한 세상을 상상했다.

양해남은 인삼으로 유명한 고장, 금산에 산다. 그 곳에서 5년째 그가 하고 있는 지역 문화 창달에 힘쓰는 '금산문화의 집' 운영실장. 쉽게 말해, 공무원이다. 해마다 열리는 '인삼 축제'를 기획하는 것도 그가 하는 일 중 하나다. 그 외에도 그는 사진을 찍고(<우리 동네 사람들>이라는 사진집을 낸 정식 사진 작가다) 시를 쓰고(장사익의 곡 <꽃>이 그가 쓴 시다), 오디오 평론(한때 그의 집은 각종 오디오 기기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을 한다. 이 정도면 '문화 게릴라'라는 직함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 뿐인가. 영화 자료 수집가로서 그는 약 4백~5백 편의 35mm 필름과 5백~6백편의 16mm 필름, 1천여 점의 유일본을 포함한 2천4백여 점의 영화 포스터, 영화 관련 음반, 영사기, 렌즈 등 방대한 영화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1998년, 창고에서 뭉텅이로 도둑맞은 1만여 점의 포스터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애써 모은 자료(그는 도난당한 포스터가 자료로서 가치가 떨어져 따로 창고에 보관해둔 것들이라고 했다)를 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 것도 도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중 발군은 50~70년대 기라성 같은 한국영화 작품들의 오리저널 포스터. 시중에 돌아다니는 <양산도> <자유부인> <마부> 등 한국영화 걸작 포스터는 모두 그의 자료 창고에서 나온 복사본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터. 금산, 그의 집에서 직접 본 그 진귀한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와 사이즈뿐 아니라 퇴적된 시간의 흔적이 물씬 밴 진품의 아우라를 풍겼다.

양해남은 자신을 '변태'라고 부른다. 관람-연구-창작으로 진화하는 일반적인 영화광의 진화 궤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화 소비 취향은 꽤나 특이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극장에 가지 않는다. 이유는 극장에선 영화를 다시 되돌려 보여 주지 않기 때문에. "옛날부터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그걸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상적인 장면은 정지시켜서 계속 보고 싶은데 극장에 가면 그게 안 되잖아요." 이 같은 이상 기호는 '되돌릴 수 있는' 비디오 수집으로 이어졌고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한 '변태' 남자는 급기야 필름을 모으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필름을 세울 수는 없는 법이지만, 변태에게 불가능은 없다! 영사기를 구해 필름을 돌리다가 보고 싶은 장면에서 영사기를 세우고 필름 위에 종이로 표시를 하는 극악스러운 만행(?)까지 저질렀다. 기괴한 이 행태를 보고 "당신은 염색체 배열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하튼, 양해남에겐 뭔가 특별한 기질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대전에서 귀인을 만나다

'영화를 갖고 싶다'는 소유욕에 불탔던 양해남이 본격적으로 영화 자료 수집에 나선 건 한국 영화사에 자료가 부재한 현실을 깨달으면서부터다. 영화 전래, 100년을 바라보는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과 30~40년 전 필름, 포스터를 구할 수 없다는 건 충격이었다. "농부들이 옛날 영화 필름을 잘라서 밀짚 모자 띠로 썼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그것만이 아니더라구요. 필름을 녹이면 구두약이 된다누만요. 그걸로도 많이 썼대요. 귀중한 필름이 누군가의 발에 칠해져 있겠구나 생각하니까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즈음 영화 자료의 보고라는 프랑스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대한 이야기를 듣었고 프랑스를 동경하기도 했다. 필요할 때 언제나 영화와 자료를 볼 수 있는 '컬렉션'에 대한 욕망은 이 순간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다.

공공기관도 하기 힘든 자료 수집을 개인이 한다는 건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던 수집 작업에 물꼬를 튼 결정적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양해남은 고교 시절부터 드나들던 대전의 한 다방에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된다. 군대를 제대한 후, 처음 찾은 그곳에는 꽤 많은 한국영화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양해남은 즉시 사장님을 찾았다. 다방인 줄 알았던 그곳은 영화 자료 전시장이었고 다방 사장님인 줄 알았던 그 분은 대전, 충청 지역 극장 흥행업을 주무르던 거물급 배급 업자였던 것. "그 어른이 이 포스터를 갖고 싶으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주신다면, 여부가 있습니까. 젊은 놈이 옛날 영화 자료에 관심을 보이니까 신기하셨는지, 넌 나이도 젊으니까 꾸준히 이런 걸 수집해서 가치 있는 일을 해 볼 수 있겠다고 길을 열어주셨죠."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대전의 베테랑 흥행사에게 첫 자료를 구입한 후, 양해남은 헤어날 수 없는 수집가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대전에서 만난 귀인은 양해남에게 전국의 지방 흥행사들을 하나둘 연결시켜줬다. 그 후로 자료 수집은 일사천리. " 그분들 조직이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흥행사들이 필름이나 포스터를 가지고 있는 건 자기가 그 영화를 통해서 돈을 벌었거나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죠." 그 때부터 전국 곳곳에 흩어진 극장주들의 라인을 통해 숨어 있던 '보물'들의 존재가 그의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구에 무슨 영화 필름이 있대, 춘천에 무슨 영화 포스터가 있대라는 정보를 듣는 즉시, 양해남은 버선 발로 달려갔다. 자료로 한 번 연결된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면부지의 천둥벌거숭이 청년이 자료를 달라고 하면 선뜻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에게는 불굴의 의지와 넉살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지방 흥행사들을 구워 삼기 위해 한 손에는 막걸리, 한 손엔 쇠고기를 들고 찾아가, 친화력을 발휘해 인간적인 정에 호소하거나, 사례를 원하는 이에게는 돈을 안겼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에게는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료가 있다면 아무리 멀고 험한 오지도 가리지 않았다. "포스터 한 장 구해서 집에 걸어 놓으면 그날 밤 잠이 안 와요. 거의 하늘을 날죠." 남의 집에 걸려 있는 포스터를 보면 그걸 떼어 오고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걸 떼어오면 설레어서 잠을 이루지 못한 시간만, 어언 10여 년이다.

고통과 환희의 나날

지방 배급 라인을 통한 영화 자료 수집은 양해남 만의 노하우다. 개별적으로 지방 극장들을 찾아 발품을 파는 수집가들이 있지만 그처럼 체계적으로(?) 배급 라인을 가동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사동에서 전국의 나카마(골동품 중간 상인을 부르는 은어)들에게 오더를 내린 적이 있어요. 고물상이든 어디든 털어서 양해남이 가진 물건과 같은 걸 가져오라고. 포스터가 장독대야, 도자기야? 그렇게 해선 한 장도 못 구해요." 과거 그 영화를 가지고 장사를 했던 지방 극장주들만큼 확실한 자료의 보고는 없었다. 그가 어디에도 없는 1천여 점의 유일본 포스터를 수집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라인의 차별화 때문이다. 흥행사에게 물건 주문이 들어가면 그가 부리던 당시 영사 기사, 극장 직원, 포스터 붙이는 사람에게까지 수소문이 갔다.

방대한 수집망을 거느릴(?) 수 있었던 건 그의 '젊음'과 '진정성' 때문이었다. 씨알이 먹히지 않는 어른들께는 개인의 욕심을 위해서 자료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치 있는 일에 쓸 것이라는 다짐을 수없이 했고 수십 년간 애착을 가지고 보관하고 있는 물건 때문에 갈등하는 분들에겐 성의껏 사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돈을 주고 자료를 구한다는 점에서도 양해남은 달랐다. 더러 수집가들이 극장주들을 찾아가 무상으로 자료를 얻는 경우가 있었지만 가격을 매겨서 구입하는 건 거의 유일했다. "그러니까 흥행사들 사이에서 양해남이는 이걸 산다는 소문이 퍼진 거예요. 그 때부터 갑자기 전화가 폭주, 우리 극장에 어떤 영화 있다. 나 어떤 포스터 가지고 있다 하면서." 어느 지방 흥행사의 애지중지하던 유품을 얻은 건 지금도 잊지 못할 사건이다. 미망인이 유품으로 가지고 있던 30여 점의 자료를 얻기 위해 양해남은 할 일 못할 일 다 해봤다. 삼고초려도 모자라 사고초려, 오고초려를 거듭했고 미망인이 좋아하는 게 뭔지를 파악해 선물 공세까지, 남들이 보면 스토커로 오해할 만큼 끈질기게 매달렸다. 결국 "큰 뜻이 있다"는 젊은 청년에게 미망인은 두 손을 들었다. 강대진 감독의 <마부>는 선배 소개로 만난 사람의 집에 걸려 있는 걸 기어이 떼어 왔다.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그 영화의 오리지널 포스터가 액자로 거실에 걸려 있는 걸 봤을 때의 흥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녕 모르리. "안절부절하다가 다음날 만사 제쳐두고 쫓아갔어요. 갖고 싶다 그랬더니, 안 준다. 세 번 가니까 주더라고요. 그런 걸 얻을 땐, 진짜 감격이에요."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그것이 필요해서 쫓아다니고 얻을 때는 가격으로 환산을 하는 컬렉터라는 점에서 양해남은 전문 수집가였다. 가끔 이를 악용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야 했다. "거절하면 그것으로 거래 라인 하나가 끊기거든요. 꼭 필요한 자료라면 거금을 주고라도 삽니다." 소문이 나고 물건 구하기가 쉬워지면서 생활은 곤궁해졌다. 카메라, 오디오를 처분했고, 남들 집살 때 받는 은행 대출을 받고 급기야 집까지 팔았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료로 인한 설레임 때문에 잠 못 잔 거 말고는, 누적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무거운 필름통을 들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사 비용은 몇 배가 되기 일쑤였고 무거운 자료 때문에 아파트 무너진다며 항의를 들은 적도 있다. 이사를 갈 때도 사람 보다 자료가 먼저다. 햇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꼭대기층은 사절이고 습도 없는 집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이해심 많은 아내가 흘린 눈물만 얼마던가. 어떤 어려움과 시련도 자료에 대한 그의 흥분과 열정을 이기지는 못했다.

모은다고 수집가가 아니다

양해남의 주종목은 포스터. 한때 외화 포스터도 모았지만 지금은 한국영화 포스터, 그중에서도 50~70년대 포스터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포스터를 주력 종목으로 삼은 건 보존 가치가 확실한 '진짜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스터가 영화 사료의 가치 외에도 당대 유행과 트렌드, 복식, 생활 문화, 예술 양식 등이 녹아있는 연구할 만한 '물건'이라고 믿는다. '물건'의 가치를 매기는 잣대는 다양하다. 한국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가장 먼저 고려하지만 당대의 생활, 문화사적인 흔적이 묻어 있는 자료도 수집 대상이다. 제목이 웃겨서 수집한 작품들도 있다. <살사리 몰랐지>나 <지옥은 만원이다> 이런 이유로 수집 목록에 올랐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나 <신사는 미녀를 좋아한다>처럼 패러디 유형을 통해서는 당대 유행했던 세계영화의 기류들을 읽을 수 있다. 포스터 자체의 완성도도 판단 기준 중의 하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는 포스터 디자인이나 그림, 카피 따위의 변천사도 그에겐 흥미로운 연구 거리다. 후일 소장 자료들로 전시회를 열 경우를 대비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기획 전시 과정까지 따로 공부했을 만큼 자료에 대한 그의 집념은 끝이 없다.

무작정 시작한 수집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옥석을 가리는 그의 감식안은 날카로워졌다. 웬만한 한국 영화사 연구자를 능가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의 소유자가 된 것도 제대로 된 수집가가 되기 위해서다.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고 손전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 책 어디에도 안 나와요. 포스터는 나한테 있는데, 희한하죠? <검사와 여선생>도 48년도에 윤대룡 감독이 만든 무성영화 말고 58년 경에 토키로 리메이크된 작품이 있거든요. 그런데 기록이 없어요. 아마 누구도 모를 거예요. 그런 거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무슨 소리! 포스터가 있는 걸." 작곡가로 알려진 박시춘이 60년대 많은 히트작을 냈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다는 사실, 정창화 감독이 쇼브라더스에서 활약하던 시절 성룡과 임청하가 한국에 와서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브이> 제작자가 유현목 감독이라는 사실까지, 그냥 두면 밤을 샐 기세다.

양해남은 자신이 소장한 수천 점의 영화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시대별로 정리해 자료화해 놓았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사진 자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도 만들어 놓은 상태. 10여 년 간 독학한 한국 영화사 공부의 결과로 지금 당장 전시회를 한다고 해도 큐레이팅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지식도 쌓았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모으기만 한다고 수집가가 되는 건 아니고 학습만 한다고 지식인이 되는 건 아니다." 진정한 수집가의 완성은 자료를 자기 지식화하고 가치 있게 재활용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자료는 공유돼야 한다

양해남은 선조들이 남긴 문화 유산의 개념으로 영화 자료를 다룬다. 설령, 한국영화 포스터가 일본의 디자인을 그대로 베꼈다 해도 거기에는 영화의 역사, 문화사, 민속사, 풍물사 등이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수집을 하면서 그는 한국 사람이 영화의 수준을 더 폄하하는 현실을 느꼈다. 그는 "하물며 반공영화나 선전영화라 할지라도 자료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다"(실제로 그의 자료 중엔 '대한뉴스'도 있다)고 말한다. 신파 영화, 호스티스 영화, 에로영화도 마찬가지다. "신파 영화에서 눈물의 의미에 대한 탁월한 연구가 있다면 조금 다르겠죠. 그래서 연구가 중요합니다. 최근 감독들을 '작가'라고 부르면서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 감독들을 연구하지 않는 건 이해가 안 가요. 그 감독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영화가 가능했을까요?" 그에게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나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포스터를 볼 수 없는 건, 신라 시대 불상이나 고려 청자를 볼 수 없는 아픔이나 진배 없다.

수집가로서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자평하는 양해남은 지금 이 방대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피땀 어린 자료들을 처분하려는 이유는, 맹목적인 집착으로 오해되는 영화에 대한 애정의 끝을 보고 싶다는 게 하나요, '자료는 공유돼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가 둘이요, 본업인 사진에 충실하기 위해서가 셋이다. 그의 자료들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쓸 수 있는 기관은 영상자료원일 것이다. 하지만 영상자료원도 예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 영상자료원에서는 그에게 '무상 기증 의사'를 타진해 왔다. "지난 20년간 자료에 쏟은 젊음과 열정을 생각하면, 한 푼도 받지 않고 자료를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재를 노리고 자료를 모은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비난도 들었고, 실제로 거액을 제시하며 물건을 넘기라는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몇 번 제안이 왔었어요. 자기들 스타일하고 비슷하니까 좋아하나본데, 일본에 넘기면 돈은 많이 받겠죠.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될까요. 난 영원히 매국노예요." 거액의 제안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한 데 모여 있어야 자료로서의 가치를 발하는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영상자료원과 같은 공적 기관에 관리를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확실한 건, 한국 영화사의 한순간을 증언할 이 역사적인 유산들이 찢어지고 상처나고 사라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이 원칙을, 양해남은 '수집가의 윤리'라고 부른다.

사진 김춘호 기자

장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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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hy311 2009-01-03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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