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얘들 이유는 몰라도 떠돌아다니는 것 같으니까 옛날 저라고 생각하고 일 좀 시키고 보살펴줘요. 저는 잠시 돌아다니다 올테니 걱정말고 밥은 제 때 드세요.. - 베젠트]

“베젠트... 글을 아네?”
“그렇네.”

우리는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나무문-나무가 대부분이었지만 중간중간 철도 있었다-의 옆에 있는 삐쭉 튀어나온 벽 뒤에 숨어서 베젠트가 준 종이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옛날 저’라니? 이건 무슨 뜻이지?”
“글쎄. 뭐,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않을까?”

스코비아는 역시 사소한 것은 신경쓰지않는 성격이랄까 그런 느낌이다. 내가 작은 것을 보면 스코비아는 큰 것을 보고있는 것 같다. 그런것이 우리 둘의 차이일까...

“하긴 글을 알고있는 여자가 세상에 리슈넬 언니만 있는건 아닐테니까.”
 
말을 하고 난 직후에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본 리슈넬 언니의 얼굴이 떠올라 우울해졌다. 스코비아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베젠트의 종이를 뺏어 자기 주머니에 넣은 다음 내 손을 잡고 “가자”하며 마을로 이끌었다.

마을은 정말이지 한마디로 엄청나게컸다. 산 중턱에서 봤을 때도 상당한 크기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안으로 들어오니 그 크기가 주는 위압감이 실로 엄청났다. 게다가 이 곳은 모든 집들이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지붕이나 문 같은건 나무였다- 심지어 바닥까지 돌이 깔려있었다. 흙이 보이는 곳은 처마 밑의 꽃이 자라고있는 곳같은 작은 공간같은 작은곳 뿐이었다. 우리는 회색 돌길을 따라 베젠트가 말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책이 쌓여있는 곳을 단 한군데 보았다. 하지만 그 가게의 크기가 생각보다커서 우리는 마을을 빙 둘려보았지만 다른 곳은 책을 쌓아둔 곳이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길에서 적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때 가게로 들어갔다.

“여긴 여자가 올 곳이 아니야. 얼른 꺼져.”

할아버지의 첫마디였다. 할아버지는 어두컴컴한 가게안에서 촛불을 하나 밝히고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촛불의 엷은 빛으로 할아버지는 붉으스름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얼굴에 자욱한 주름과 가슴까지 오는 긴 수염 때문에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어두운 가게 모습과 사방을 꽉 채운 건조한 종이냄새 때문인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들은 할아버지의 말에 아량곳않고 가게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할아버지는 이내 얼굴을 찡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할 때, 스코비아가 앞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베젠트 언니가 보내서 왔어요.”

할아버지의 얼굴에 한순간 놀라움이 떠오르더니 곧바로 가라앉았다. 스코비아는 주머니에서 베젠트가 줬던 종이를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종이와 우리들을 번갈아보고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 써있는 내용이 그리 길지않았기 때문에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가 글을 읽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눈의 움직임이 수차례 처음부터 읽고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뭐가 의심스러워서 저렇게 꼼꼼히 살피는걸까. 하긴 나라도 처음보는 사람이 우리처럼 행동하면 저럴 것 같지만.

"집을 나왔느냐?"
 "아니요."

베젠트가 자꾸 가출소녀 가출소녀 노래를 부르던것이 생각나서 말을 듣자마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수염을 쓰다듬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따라오거라."

우리들은 말없이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춘 곳은 가게 깊은 곳의 작은 방이었다. 방은 여관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는데 한쪽에 옷장과 탁자가 갖춰져있었다.

“베젠트 방이지. 베젠트가 올 때까지 너희들이 써라.”

할아버지는 탁자 서랍을 열더니 가슴을 다 덮을 만한 두꺼운 종이를 한 장 꺼내서 스코비아에게 줬다.

“일을 하려면 이걸 써야해. 보면서 일해도되지만 외워두는게 편할 거다.”

말투한번 대게 무뚝뚝하네... 나는 스코비아가 든 종이를 흘쩍 살펴봤다. 종이에는 책 이름으로 생각되는 여러 단어들이 빼곡이 적혀있었다. 스코비아가 그 종이를 넓게펴서 훨씬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개중에는 우리가 봤던 책 이름도 적혀있었다. 우리가 그 단어들을 눈으로 흩고있으려니 할아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일단 너희 치마부터 갈아입어라. 베젠트 옛날 옷이 있을거다.”

그제서야 우리들은 서로의 치마를 내려봤다. 새빨간 산딸기 물이 아직까지 그대로 베어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옷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닌 거였네? 이거 참...






우리는 다음 날부터 서점의 보이지않는 곳에서 일을 했다. 우리는 일단 서점 뒤편에 있다가 할아버지가 와서 종이에서 어느 책의 이름을 찍어주면 그 책을 서고에서 찾아오는 역할을 맡았다. 서고에는 책들이 글자순으로 배치되어있어서 책을 찾기는 아주 쉬웠다. 하지만 스코비아와 의논한 끝에 우리는 글자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고, 그 때문에 책을 일찍 찾았으면서도 잠시동안 서고에서 시간을 죽이다 할아버지에게 책을 갖다주었다. 책을 갖다주지 않을 때는 서점 구석에서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청소를 했다. 하지만 청소는 우리가 사람들 눈에 띄인다고해서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책을 가져오라고 시킬 때 일부러 글자를 기억하는 척하면서 오랫동안 들여다보거나 서고에서 빈손으로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책을 가져오기등 나는 내가 글자를 안다는 것을 숨기기위해 노력했다. 물론 스코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가져오는 시간동안 서고의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는 수도없이 많았다. 하지만 읽어보려해도 머리 속에 자꾸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리슈넬 언니가 떠올라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리슈넬 언니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이렇게 편안히 있는것도 위태위태 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서고에서 멍하니 있다가 나오기만을 반복했다. 조용한 서고 안에 있으면 어디선가 들리는 바람소리가 무료함을 달래줬다.





할아버지가 저녁밥을 먹다가-밥은 따로 있는 할아버지 방에서 먹었다- 말했다.

“책 가져오는건 한 사람이 해도 될것같으니 내일부터 한명은 나랑 같이 밖에서 장사를 하는건 어떠냐?"

그 말에 나와 스코비아는 먹던 것을 멈추고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숟가락으로 할아버지를 가르치며 물었다.

“할아버지, 여자는 서점에 있으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질문하자마자 나온 간결한 대답에 그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한테 책을 팔 수 있어요?”
“둘 다 하라는게 아니야. 한명만 하면 돼.”
“엉뚱한 대답은 하지마세요.”

말투는 무뚝뚝해도 할아버지의 행동으로보아 정이 많은 사람이란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 며칠동안 서점에서 일해오면서 우리들과 할아버지는 나름대로 친해질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밥을 입속에 집어넣은 다음에 방금 전보다 훨씬 느긋하게 반찬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느 순간에 스코비아도 느긋하게 밥을 씹고있었다. 두 사람이 이러면 내 마음속에선 불이 일어나지!

“할-아-버-지이-!”

내가 이를 바득바득갈며 노려봐도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음식을 씹더니 드디어 목구멍 아래로 내려보냈다.

“여자가 서점에 오는 건 안되도 서점에서 일하는건 상관없어.”

이게 왠 해괴망측한 논리? 할아버지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덧붙였다.“왜냐면 내 서점이기 때문이지. 할아버지는 그 울창한 수염 사이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면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때 스코비아가 수저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으응. 뭐냐.”
“그거 긴히가 하는 게 나을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스코비아 쪽으로 손을 마구 흔들어 강한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스코비아는 내 손을 바라보면서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구맙구나. 실은 나도 긴히가 하는게 나을거라 생각했어.”

곧바로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 얼굴에 갖다댔다. 할아버지 눈과 잠시동안 일대일로 대치했는데 이상하게도 눈싸움에 진건 나였다. 얼굴이 뜨거워지는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눈을 제대로 보지못하고 밑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다. 베젠트도 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는 근처에 있던 큰 나무 밑에 앉아 잠을 잤다. 날이 밝아도 나는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에겐 계획이 없었고, 스코비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산 아래 길로 사람들이 지나다는게 드문드문 보였고, 이따끔 마을 쪽에서 말이나 개, 닭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먹을 것 좀 찾아보고 올게.”

스코비아가 대뜸 말하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스코비아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있었다. 서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거나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거나... 확실한 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않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먹을 걸 찾으러간다고말한 스코비아가 갑자기 위대해보였다. 나는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속이 쓰렸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않을만큼 의욕이 없었다. 그냥 앉아서 나무에 등을 대고 하늘을 보니 구름한점 없는게 왠지 지금의 나처럼 겉모습만 있고 속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스코비아가 멀리서 치마폭에 산딸기를 가득담고 돌아오고 있었다. 가끔 리슈넬 언니와 산 근처에 갔을 때 따먹었던 것들이었다. 왠지 걸어오는게 위태로워보여서 달려가서 내 치마폭에 반정도를 옮겨담았다. 그런데 옮겨담고보니 치마에 딸깃물이 빨갛게 물들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배려버린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단념했다.

“이거 어디서 따왔어? 이렇게 많이.”

나무 밑에 털썩 앉아 산딸기 두세개를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그냥 돌아다니다보니까 많이 있던데.”스코비아는 한 개씩 집어먹었다.

우리들은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스코비아가 내려가자고 먼저 제안했고 나역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움직이는게 나을 것 같았다. 내려가는 동안 나는 앞으로 무얼해야할지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돈이 많이 있으니 당분간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떠올랐다. 이런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밉다. 앞에 가고있는 스코비아는 뭘 생각하고 있을까?




산에서 다 내려오자 좌우로 곧게 깔린 길위를 걷게되었다. 어느 쪽으로 가던 가까운 곧에 마을로 가는 길이 이어져있었다. 우리는 보다 가까운 왼쪽길로 걷다가 마을로 이어진 꺽어진 길로 방향을 바꿨다. 마을을 둘러싸고있는 커다란 벽이 어둠속에서 서서히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가 걷고있는 길 옆에는 집들이 몇 채 서있었다. 나는 그 집들 중 한군데에 여관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책에서 읽어서 여관이 하룻밤을 묶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본것은 처음이었다. 스코비아가 더 좋은 생각이 있을것 같으니까 물어봐야지.

“여관... 들어가볼까?”

“글쎄...”

어정쩡한 대답에 짜증이 났다. 물론 나도 이렇게하자!라는 결정을 내리지못해 물어본거긴 했지만 아까전에 본 다른사람같아 보였던 스코비아였기에 명쾌한 대답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긴 그건 내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괜히 스코비아에게는 화를 내지않기로 했다. 나는 내 생각을 계속 말해봤다.

“어떻하지. 그럼 그냥 마을에 가볼까?”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단 그냥 여기 들어가보는게 낫지않을까? 흐음... 그런데 우리가 어려서 받아줄지 모르겠네.”

“아니 길바닥 말고...히익!”

말을하다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 우리 뒤에서 언제부터인가 서있던 것을 눈치채버렸다. 나는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몸이 얼어붙는것을 느껴버렸다. 우리가 했던 말을 듣고 우리가 간판을 읽었다는 걸 알아버렸으면 어떻하지?

“너희들 가출했니?”

그 사람의 목소리로 봐서 여자인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여자라면 우리를 잡아가지는 않을 거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리슈넬 언니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사이에 스코비아와 그 여자가 대화를 하고있었다.

“아, 아니요. 그냥 사연이 좀 있어서...”

“사연?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가출같은데?”

“가출은 아니예요!”

갑자기 고집을 피우는걸 보니 아무래도 스코비아는 바뀌지않은게 확실한 듯 했다. 여자는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우리를 야릇한 눈길로 관찰하듯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좋아. 그럼, 좀 비켜줄래?”

우리는 여자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 사람이 들어가자 우리는 한동안 닫혀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아아, 어른은 역시 아무렇지 않게 여관에 들어갈 수 있구나. 허탈한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려보자.”

스코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예 팔짱까지끼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황당하고 기가막혀 뭔가 한소리를 할려고 할 때 문이 다시 열리면서 내 어깨를 쳐버렸다. ‘악’소리를 내면서 문에서 몇걸음 떨어지며 방금 전 그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있는것을 볼 수 있었다.

“어머, 미안. 괜찮니?”

“괜찮아요.”라고 말은 했지만 너무 아파서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머쩍게 웃고있는 저 여자를 향해 겉으론 툴툴대고 속으론 온갖욕을 퍼부어줬다.

“어쨌든 미안하고. 들어와. 내가 방 잡았으니까.”

“예? 무슨 말이예요?”

“오늘 밤 너희들이 길바닥에서 안자도 된다는 말이란다.”

말투가 살짝 거들먹거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살았다’라는 생각에 오히려 기뻤다. 여자는 오른손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감사하라고.”

기분이 확 나빠졌다.




여관 안은 전체적으로 등불과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들로 인해서 마치 석양이 지는 오후처럼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문 바로 앞에 가로로 긴 나무 탁자가 있었고 그 앞에 의자가 5개 정도 놓여있었다. 그리고 긴 탁자 너머에는 주인인 듯한 아줌마가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서있었다. 넓은 공간에는 탁자와 의자들이 서로 한쌍을 이뤄 일고여덟개 정도 놓여있었다. 그 탁자들 위에는 방금전까지 있었던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음식이나 술병들이 놓여있었다.

우리를 재워주겠다는 여자는 여관 주인 왼쪽에 있던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니 왼쪽으로 꺽인 계단이 보였고 그 위로 붉게 타오르는 횃불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얼마가지않아 오른쪽에 문이 다섯개 정도 있는 방에 다다랗다. 나는 그 순간 그 감옥과 겹쳐보여 몸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뭐 하니?”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와 스코비아가 문들 중 하나를 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 소리 하나를 밖으로 내뱉으며 둘에게 걸어갔다. 방안은 생각보다 컸다. 적어도 5명까지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방 중앙에는 혼자 잘 수 있는 자그마한 침대가 있었고 좌우 벽에는 조그마한 책상과 서랍같은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촛불 2개에 불이 붙어있어서 방안을 은은하게 밝혀줬다. 여자가 방 중앙에 있던 침대를 창가로 밀었고, 스코비아가 한쪽에 있던 서랍에서 모포들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돈은 내가 냈으니까 침대는 내 꺼야. 불만없지?”

손으로 품속의 돈 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면서 ‘저희도 돈 있어요.’ 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려고했지만 그 직전에 스코비아가 “예, 저흰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래, 일단 지금은 자고 얘기는 내일 하자.”

얘기를 하자라는 말에 왠지 짜증이 일었다. 귀찮게 얘기는 무슨... 따지는 것도 귀찮아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스코비아 옆에 누워 그냥 모포를 몸에 둘둘말고 잠을 청했다. 이불보다는 좋지않았지만 그런대로 따듯했다.



아침을 여관 1층 많은 탁자들 중 하나에 앉아 먹으면서-물론 우리 돈을 낸 건 아니다.- 우리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대화를 나눴다.

“내 이름은 베젠트야.”

“저는 긴히예요.” 짧고 퉁명하게 대답했다.

“전 파라스코비아예요. 스코비아라고 부르시면 되요.”

“스코비아?”

“네.”

“아니, 확인차 말해본 거야. 뭐 어쨌든...”

베젠트는 말투나 행동이 시원시원한게 조금은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한줄로 낮게 묶은 머리와 살짝 검은피부 그리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나한테 베젠트라는 사람을 각인시켰다. 얼굴은 예쁘지도 못 생겼지도 않았지만 호감이 갈만한 사람이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상당히 들어보였는데 리슈넬 언니보다 겨우 한 두 살 정도 위인 느낌이었다.

“너희들 집은 어디니?”

우리들은 뭔가 통했는지 둘 다 아무런 말을 안하고 밥만 먹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어디인지를 몰랐다. 우리가 살았던 세계는 마을과 리슈넬 언니 집, 그리고 그 근처가 전부 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불리는지도 알지못했다. 베젠트가 오른손을 입근처로 갖다댔다.

“흐음... 역시 가출했구나?”

“아, 글쎄 가출은 아니라니까요.”

눈 을 부릅뜨고 말하니까 베젠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피식웃더니 손을 흔들면서 “알았어, 알았어.”라고 말했다. 거기에 스코비아까지 킥킥대고 웃는데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코비아, 너까지 그러면 안되잖아. 그 뒤로 베젠트는 말을 하지않고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밥을 먹었다. 베젠트는 계산을 하고 여관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의 표정을 살핀다음 베젠트의 뒤를 따라나갔다. 우리가 나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베젠트가 허리춤을 조이며-베젠트의 옷은 위아래가 하나로 돼있었다.- 물어봤다.

“그래, 너희들 어디로 갈거니?”

“알 필요없잖아요.”

팔짱을 끼고 나름 매서운 눈초리로 말했다. 베젠트는 놀라는 기척도 없이 또 한번 픽 웃더니 내 머리에 살짝 주먹을 댔다뗐다.

“하룻밤 재워준 사람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그러게요.”

아아, 스코비아.

"뭐 좋아. 나하고는 별 상관없으니까.“

아니 그럴거면 왜 물어봤냐고요. 내가 뾰루퉁하게 있으려니 베젠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잠깐 떨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이였고 종이에는 내가 읽을 수 있을듯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이거 가져가.”

“이, 이게 뭔가요?”

최대한 모르는 척하면서 평범하게 말해보려했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나는 최대한 티 안나게 종이를 건네받았다.

“저 마을에 가면 한쪽에 책을 엄청 많이 쌓아놓은 가게가 있거든. 거기에 있는 할아버지한테 이걸 보여주면 일을 시켜줄거야. 아마도.”

“그럼 베젠트 언니는 저 마을에 살고있던거예요?”

스코비아가 내 손에 들려진 종이를 보다가 물었다.

“응”

“그럼 왜 어제는 이 여관에서 잤어요?”

“가출했거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젠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이번엔 스코비아도 맞장구치지 않았다. 베젠트는 우리들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팔짱을 꼈다.

“같은 가출 소녀라서 동지의식을 느꼈달까?”

“몇번을 말해야... 저희는 가출....” 그것보다 당신은 소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나중에 보자.”

베젠트는 내 말을 끊더니 일방적으로 인사를하고 우리가 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지나가던 말의 발굽 소리에 정신차리고 마을로 향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인 2009-07-25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던한 문체군요.
검은바다 재미잇게 잘 보겠습니다.

이윤후 2009-07-25 22: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점심을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들이 대여섯명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들은 모두 허리춤에 긴 칼을 차고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들은 집안을 둘러보더니 리슈 언니를 바라봤다.

“남자는 없나? 여자들만...”

“무슨 일이죠?”

리슈 언니가 일어나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남자들중 맨앞에 있던 덩치가 큰 사람이 리슈 언니를 기분나쁜 표정으로 오랫동안 내려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동안은 남자들도 우리들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입을 움직여 목소릴 낸 사람은 그 남자였다. 남자의 표정은 매우 불쾌한듯 일그러졌다.

“남자가 하는 말을 끊다니...”

나와 스코비아는 그 남자의 낮고 거칠은 목소리에 위축되버렸다. 하지만 리슈 언니는 달랐다.

“남의 집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행패..”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언니의 뺨을 후려쳤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리슈 언니의 목이 순식간에 꺽이고 몸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언니는 고개를 들어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슨 표정이었을까. 남자의 얼굴이 더욱 더 일그러지더니 이번에는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 리슈 언니가 휘청거리면서 벽에 부딫혔다.
“뒤져봐!”란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남자들이 집안에 들어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조리 뒤업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엇을 찾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집안을 들쑤실수록 무언가가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리슈 언니가 처음에는 우리들에게도 숨겼고 우리가 알고나서도 항상 꼭꼭 숨겨두었것들...

“찾았다!”

그것은 책이었다. 책들은 어미 없게 물 항아리 바로 옆 항아리 옆에서 나왔다. 평소라면 절대 그런 곳에서 나오지 않을 책들이 이상하게 그 날은 그 곳에 있었다. 남자들은 그것들을 두 손에 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리슈 언니를 돌아봤다. 언니는 화를 내지도 체념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날 우리들은 남자들에게 잡혀 마을 중심에 있던 커다란 하얀 돌로 만들어진 건물로 끌려갔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돌로 만들어지고 가장 커서 언제나 들어가보고 싶어했지만 항상 입구에 경비들이 서있어 근처도 가지못했던 바로 그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이런식으로 들어가게되어 기분이 아주 착잡했다.

우리는 건물안에서 지하로 끌려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하얀 색이었던 벽이 사라지고 점점 공기가 차가워지더니 검은 벽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우리는 쇠를 일자로 여러개 엮어만든 문-중간중간 가로로 된 것도 있었다- 앞에 도착했다. 그 문 앞에는 책상하나를 덩그러니 놓고 앉아있는 살이 덕지덕지 붙은 뚱뚱한 남자가 있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소리없이 기분나쁘게 웃었다. 아까전 리슈 언니를 때렸던 남자가 그 남자에게 뭔가를 보여주더니 뚱뚱한 남자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일어나 쇠문을 열었다. 우리는 그 문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니 네갈래 길이 나타났다. 남자들이 리슈언니를 앞길로 끌고갔다. “리슈언니!” 스코비아가 소리치자마자 스코비아를 잡고있던 남자가 뺨을 후려쳤다. 스코비아가 놀란 눈으로 그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서슴없이 다시 한번 뺨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비아는 남자에게 꼬리를 내릴 기미를 보이지않았다. 남자는 계속 스코비아의 뺨을 쳤다. 앞길로 끌려가던 리슈언니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긴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않는다. 리슈 언니 제발 그러지마. 그러다가 또 맞으면 어떻해.

“그만하고 가자.”

나를 잡고있던 남자가 그 남자를 제지했다. 스코비아는 고개를 숙이고있었고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할수 있는게 없었다. 우리는 왼쪽길로 걸어갔다. 얼마쯤 걸어가니 복도 좌우에 나무로 만들어진 문들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빽빽하게 붙어있었다. 우리는 그 나무문들 중 하나에 밀쳐졌다. 문이 닫기자 얼마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축축하고 고약한 냄새가 방 안 전체에 풍기고 있었다. 바닥은 차갑고 딱딱한 것이 돌같았고, 미끌미끌하고 물기가 있어서 치마가 젖어 기분이 나빠졌다.

“스코비아, 괜찮아?”

“괜찮아...”

대답에 힘이 없었다. 하긴 그건 나도 다를게 하나 없었다. 아니. 나는 스코비아보다 더 힘이 없었다. 나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방안의 윤곽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방은 나와 스코비아가 서로 끝에 앉아있으면 발이 거의 닿을 만큼 좁았다. 게다가 벽과 바닥이 아주 차가워서 엉덩이와 등에 한기가 들 정도였다. 문 반대편 중앙에는 구멍이 나있었는데 그곳에서 지린내와 악취가 올라왔다. 그 구멍이 바로 변소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가 서로 몸을 붙였다. 그리고 그 추웠던 겨울 날 밤처럼 서로 꼭 껴안았다.

“리슈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스코비아가 힘없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동안 생각을 해야했다.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뭔가 큰 일이라도 당하고 있는게 아닐까? 이제 서로 영원히 보지못하는건 아닐까? 그 사람들이 언니를 또 때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런 대답도 찾아내지 못하고 나는 그저 스코비아를 더 세게 끌어안기만했다.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말한 나쁜 일이란 것이 대체 뭘까... 방안은 창문이 없어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었다. 완벽한 어둠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들리는것은 스코비아와 내 숨소리. 느껴지는것은 스코비아의 체온. 그리고 지독한 악취를 맡으며 우리 둘은 그 자리에 죽은듯이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무언가 안으로 던져지고 다시 닫혔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에 알 수 있었다. 리슈넬 언니였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언니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었다. 손에 닿는 느낌으로 언니 옷이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고 상처가 많이 나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언니 몸에서는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했다.

“얘들아...”

언니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작아 나는 얼굴을 언니 입에 가까이 댔다.

“미안해...”

그 한마디 말에 눈물이 터져나오더니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건지, 왜 언니가 이런 말을 해야하는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스코비아가 언니의 머리를 들어 무릎위에 올렸다. 언니는 손을 들어 스코비아의 얼굴을 쓰다듬고 내 얼굴도 쓰다듬어줬다.

“얘들아, 언니 말 잘 들어.”

리슈 언니는 숨을 고르고나서 말을 이었다.

“언니가 부탁 하나 할게.”

그제서야 눈치챈건지 그 순간 그것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느껴 오른쪽을 돌아봤고 그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온몸에서 푸르스름한 옅은 빛을 내는 거대한 동물이었다. 생긴것은 흡사 개와 비슷했지만 개보다 더 사나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온몸을 감싼 털에서는 윤기가 흘렸다. 그것은 하체를 내려 앉아있었는데 얼굴 높이가 내 얼굴 높이와 거의 일치했다. 내가 바라보자 그것이 나와 눈을 잠깐 마주치더니 리슈 언니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는 생전 처음보는 그 동물에게서 눈을 떼지못했다. 그리고 방이 넓어져있었다. 스코비아와 내가 끝에서 끝에 앉아있어도 서로 닿을 것만 같았던 방이 어느 사이엔가 그 전의 두배는 커져있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동물이 하체를 들어 네발로 서서 등을펴고 우리들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리슈 언니를 바라봤다. 동물의 몸에서 나는 약한 빛 덕분에 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언니는 얼굴에 멍이 심하게 들었고 여기저기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리고 왼쪽 눈을 감고있었는데 그 감은 자리가 심하게 붓고 피가 흘려내리고 있어서 보는 순간 머릿속이 텅비어버렸다.왜 저걸 이제 봤을까. 언니 눈은 괜찮은걸까? 하지만 그 상처 속에서도 리슈 언니는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언니... 눈이...”

스코비아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언니의 손이 스코비아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감정이 내 속안에서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언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언니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비틀거리며 한쪽 벽에 몸을 기댄채로 일어났다. 우리는 달리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리를 키워준 언니, 자주 품안에 안아주었던 언니, 우리에게 글을 가르쳐준 언니, 우리 고민을 들어주었던 언니, 요리를 해주던 언니, 같이 텃밭을 가꾸던 언니, 어머니 같았던 언니. 그 언니가 말하고 있었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들어줘.”

나와 스코비아는 동물의 등위에 올라탔다.

“몸을 낮추고 꽉 잡아.”

내가 앞에 올라타있어서 몸을 납작 업드려 동물의 목을 잡았고 스코비아는 내 허리를 잡았다. 치마가 거추장스러워 무릎 위까지 접어 올려야했다. 옆에 서있는 언니를 올려다봤다. 언니는 그 상처투성이 얼굴로 웃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언니의 양손이 나와 스코비아의 눈가를 스쳐지나갔다.

“잘 지내야된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어느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좌우로 스쳐지나갔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푸른 동물은 한참을 달리다가 겨우 멈춰섰다. 그 곳은 사방이 발목까지 오는 풀로 무성한 어느 산 중턱이었다. 동물의 등에서 내리니 산 아래에 보이는 커다란 마을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보아왔던 마을과는 크기에서 비교가 안되는 커다란 마을이었다. 마을은 커다란 원으로 된 벽에 둘러싸여 안으로는 집들이 빼곡하게 있었고, 밖으로는 마을에 이어진 길 주변으로 집들이 보였다. 나는 처음 본 몇초동안은 그 모습에 넋을 잃었지만 이내 내가 처한 상황이 떠올라 곧바로 우울해졌다.

그 때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옆에 무언가 떨어졌다. 옆에는 푸른 동물이 있었고 그 밑에는 주먹만한 주머니가 떨어져있었다. 동물과 눈을 마주치고 곧바로 주머니로 눈을 돌려 그것을 손에들고 열어보았다. 그 주머니 안에는 방금 전의 짤랑 소리를 증명해주듯 돈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것도 내가 여태까지 본 동전들 중에 가장 많은 수가, 아니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놀란 나머지 주머니를 놓칠뻔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푸른 동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채 스코비아를 찾았다. 스코비아는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대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퉁퉁불어버진 눈가를 문지르며 돈 주머니를들고 스코비아에게 다가갈려다 깜짝 놀랐다. 스코비아는 눈 앞에 보이는 커다란 마을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나이를 많이 먹은 어른이나 풍길법한 그런 분위기를 내고있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에서는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위엄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늘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갔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남자들, 좁은 감옥,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온 리슈 언니, 은빛 동물, 그리고 다른 사람같은 스코비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갑자기 비가 세차게 오기시작했다. 오늘은 마을에가서 먹을 것도 좀 사고 옷도 수선하기로 했던 날인데 비가 이렇게오면 마을 가는 길 중간의 강이 불어나서 가지못하게된다. 우리는 집에 남아있던 음식과 텃밭에서 딴 적은 수의 과일들로 얼마간 지냈지만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고민하던 리슈 언니가 옷을 챙겨입고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깜짝놀라 언니에게 달러갔다.

“리슈 언니, 이렇게 비가 오는데 나갈려고요?”

“이런 날씨 속에 나갔다오는것도 왠지 재미있을거 같지 않아?”

리슈 언니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지만 이렇게 비오는날 나갔다가 강에서 큰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언니는 내 표정을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마. 맨날 다니던 길이고 얕은 곳이 어디인지도 아니까.”“그래도...”

“리슈 언니. 저도 가면안되요?”

스코비아가 어느새 나갈 옷을 입고 리슈 언니 옆에 섰다. 언니는 스코비아를 보고 깜짝놀라더니 스코비아의 옷을 손수 벗겨주었다. 스코비아는 뚱한 표정으로 언니를 쳐다봤다.

“저도 이젠 다 컸는데...”

“그래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어요. 스코비아양!”

리슈 언니는 스코비아의 이마에 손가락을 살짝 튕기고 문 밖으로 나갔다. 언니가 나가고 스코비와 나 둘만 남게되자 내가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도 가슴도 나오고 키도 리슈 언니만큼 컸는데 왜 어른이 아니란 거지?”

스코비아는 아무말없이 그저 한숨만 쉬었다. 우리끼리 얘기해봤자 아무것도 되지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도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않고 못다 읽은 책을 펼쳤다.

저녁 늦게까지 리슈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도 스코비아도 불안해서 옷을 챙겨입고 강가로 나갔다. 강은 물이 불어나서 엄청난 기세로 흐르고 있었다. 저기에 잘못빠지면 그대로 떠내러갈꺼야. 우리는 그나마 강물이 얕은 곳을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물이 너무 불어나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머리 속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막 뛰기 시작한다.

나는 강 주변을 막 돌아다니면서 어디엔가 리슈언니 흔적이 남아있기를 빌었다. 하지만 조그만 흔적이 남아있기엔 강물이 거셌고 비도 너무 많이 왔다. 스코비아는 그저 멍하니 강을 쳐다보기만하고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도와줄 생각은 안하고 저게 뭐하는거야? 혼자서 강 이곳저것을 돌아다니다 그나마 물이 얕은 곳을 발견했다. 침을 넘기고 발을 조금 넣자마자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해서 곧바로 빼냈지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진흙이 옷에 덕지덕지 묻어 더려워졌다. 이젠 나도 아무것도 하기싫었다.

“마중나왔어?”

리슈 언니 목소리가 들려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는 강 건너편에서가 아니라 강 윗편-내 쪽에서 보기에는-에서 양손에 짐을 든채 걸어오고 있었다. 안도와 함께 눈물이 나오려는걸 애써 참아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돌아오느라고. 너무 늦어서 미안해. 그런데 너 옷이 왜 이러니?”리슈 언니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하자 나도 어쩔수 없이 언니의 표정을 따라지었다. 스코비아는 아까 서있던 그 곳에 그대로 서있었다가 우리가 걸어가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바람이 차가워져 밖에 나가기 껄끄러워 지던 날이었다. 더운 날에 입었던 얇은 옷들을 정리하고 점점 서늘해지는 날씨에 맞춰 모두 옷을 새로 갈아입었다. 어느 때부턴가 나와 스코비아만 마을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 날도 나와 스코비아 둘이서 리슈 언니에게 얘기하고 마을로 놀러 나왔었다. 우리는 마을에 사는 또래들은 가끔씩봐서 얼굴만 겨우 기억할 정도였으며 더욱이 그 애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그냥 구경하면서 시간 때우기다. 어느 때는 시장에 가서 음식재료만 보고오기도 했고 새로운 상점이 생기면 그 근처에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을 파는 서점이었다. 작은 서점이 여러 상점들의 중심 쯤에 있었기에 우리는 왔다갔다 하면서 서점에 쌓여있는 책들의 제목을 훔쳐보았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리슈 언니가 항상 ‘밖에서 글을 모르는 것처럼 해.’라고 말해뒀기 때문이다.

스코비아는 리슈 언니의 말을 아주 잘 들었지만 나는 그게 좀 마음에 들지않았다. 때문에 항상 스코비아가 뭐라 할 때까지 책 제목이나 벽에 붙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않았다. 그 날은 눈에 띄는 단어가 적인 전단지를 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의 한 쪽벽에 붙어있던 종이였는데 맨 위에 적힌 글이 [여자와 다른 점]이었다. 그 아래에 있는 글은 스쳐지나가느라 보지못했다. 스코비아는 그 종이를 아예 못본건지 무시하는건지 관심을 보이지않았지만 나는 그 글 내용이 궁금해서 머리 속이 온통 그 종이로 가득찼다.

마을에서 뭘 한건지도 모른채 스코비아에게 끌려다닌 것 같았다. 땅거미가 지기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난 그 종이를 잊을 수 없었다. 난 걸음을 멈췄다.

“스코비아, 나 잠깐 마을에 다시 갔다올게.”“어? 아까까지 계속 있었잖아.”

“그냥 갑자기 생각난게 있어가지고.” 그 말만 툭 던지고 바로 뒤돌아서 마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스코비아의 목소리가 바람에 떠밀려 날아갔다. 치마가 펄럭거려서 두 손으로 움켜잡아야했다. 벌써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종이를 보려고했지만 이미 어두워져가는 태양 아래서 보기란 무리였다. 결국 나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고 결국엔 종이 바로 앞까지 가버렸다.

난 아직도 그 종이에 써있는 내용을 잊지못하고 있다. 여자를 동물과 동급으로 여기며 여자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그 글의 내용을 난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글을 자기들끼리 돌려보면서 여자들을 비웃고 있을 남자들에 대해 미칠듯이 화가 났다. 화를 참으며 끝까지 다 읽었을 때야 나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그 종이를 보고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가려고 종이에서 시선을 떼니 그제서야 나를 보고있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되었다. 서둘러 길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이 너무 불어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 틈새를 겨우 비집고 나와 집을 향해 달렸다.

“긴히야, 너 뛰어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리슈 언니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마을에서 집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그대로 달려왔기 때문에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은 거칠대로 거칠어져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괜찮다고 표현한 다음에 항아리에서 물을 한컵 떠서 마셨다. 물은 미지근했다.

며칠 뒤 리슈 언니가 마을에 가면서 우리들을 불렸을 때 나는 가지않았다. 때문에 리슈 언니와 스코비아 둘이서 마을을 다녔다. 둘이 마을에 갔을 때 나는 집 뒤 나무 밑 그늘에서 쉬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 잘못도 없었다. 리슈 언니가 맨날 밖에서는 글을 아는척하지 말라고 해서 그걸 어긴 것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자 속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훨훨 날아가 몸이 아주 가뿐해졌다. 리슈 언니 말을 어긴 건 미안했지만 그래도 내가 죽을 죄를 지은건 아니었다. 나는 집 안에들어가서 이불밑에 숨겨두었던 예전에 읽었던 왕자의 모험 얘기 책을 들고 그 자리에 앉아서 한번에 끝까지 독파했다.





그날 밤 잠을 다가 깨보니 집안이 몰래 들어온 달빛 때문에 낮처럼 밝게보였다. 잠을 잘못 잤는지 오른쪽 어깨가 결려서 잠을 청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집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나를 환영했다. 집 주변을 한 번 돌기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공기를 몸 속 깊숙이 한번 밀어넣었을 때 큰 나무 밑에 누군가가 있는 걸 발견했다. 주변이 환해서 그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슈 언니였다. 긴 나뭇가지를 하나들고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내가 다가갈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리슈 언니?”

언니가 ‘어’ 소리를 내면서 뒤돌아 보더니 이내 평소의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언니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가갔다.

“리슈 언니, 여기서 뭐해요?”

“그냥 잠이 안와서 나와 봤더니 나뭇가지가 떨어져있네?”

리슈 언니는 손목만 움직여 나뭇가지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서 되물었다.

“그게 어쨌는데요? 그냥 떨어진 거잖아요.”

“아니야. 여길 봐.”리슈 언니는 나뭇가지를 한바퀴 돌려잡아 방금 전까지 손으로 잡고있던 부분을 내게 보여줬다. 그 부분은 가지가 줄기에 붙는 부분이었는데 아주 매끈한 모양을 하고있었고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냥 그렇다보다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충격을 받은것 같이 뭔가를 깨달았다. 그 나뭇가지는 그냥 보기에 멀쩡히 살아있는 나뭇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멀쩡한 나뭇가지가 무언가에 뜯기거나 부러져 떨어진 게 아니고 멀쩡한 모습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이건 나무가 말을 하는 거야.”

리슈 언니는 검지와 엄지로 내 쪽의 가지 끝부분을 문지르면서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이제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거지.”

“무슨 뜻이예요?”

“곧 죽는다는 거야.”

죽는다는 말에 내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지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 잠시동안 침묵이 우리 사이에 펼쳐졌다.

“그런데 이 나무 멀쩡하잖아요. 겨우 가지 하나 떨어진 것 때문에 죽거나하진 않으니까...”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이 가지는 그런게 아니야.”

리슈 언니는 다시 몸을 돌려 나무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지하나 떨어졌다고 나무가 죽는 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비록 저 나뭇가지가 아직 생생하긴 해도 언제 마를지 모를 것이고, 저 큰 나무 중에 여러개 달러있는 가지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리슈 언니가 아는게 많기는 하지만 이번 만큼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갑자기 언니가 또 다시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그런데 안자니? 이런 추운밤에 오래있으면 감기 걸려.”

“저보다 오래 나와있는 불량 어른에게 그런 말 듣긴 싫네요~”

팔장을 끼고 장난스럽게 비꼬듯 대꾸하자 리슈 언니가 피식 웃으면서 나뭇가지로 내 머리를 살짝 때렸다. 물론 하나도 아프지않았고 나도 언니도 기분좋게 웃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리슈 언니는 책을 언제나 숨겨났었다. 그 장소는 언제나 우리가 상상치 못한 곳이었다. 하루는 스코비아를 억지로 설득해서-얘는 이런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와 함께 기를 쓰고 찾아내려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리슈 언니는 우리가 책을 원할때면 항상 친절하게 꺼내주었다. 그 장소는 천장 위 일때도 있었고 주방 찬장일 때도 있었고 혹은 항아리 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장소는 항상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보통 낮에는 우리가 깨어있었고 언니도 우리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책을 옮기는 일 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밤에 책을 옮긴다고 생각하고 새벽까지 잠을 안자고 버텼던 적이 있었다. 그 날 난 아무런 소득도 없이 아침부터 머리만 어지럽다가 점심 쯤에 밥을 먹다 다음날까지 자버렸다.

 집 밖에서는 책을 읽지 못 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우리가 책 읽는 것을 보면 큰일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리슈 언니는 완벽한 이유를 원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긴히야. 세상에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일이 있어. 우리같은 여자들이 책 읽는 것도 그 중 하나야.”

“어, 그러면 전 나쁜 앤가요? 해서 안될일을 했으니까?”“아니, 긴히는 나쁜 애가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거야.”

“뭐예요. 그게. 세상은 참 이상하네요?”“

"그래, 세상은 참 이상해...”

그 렇게 말하는 리슈 언니의 얼굴은 왠지 쓸쓸해보였다. 내가 ‘어’하면서 언니를 바라보는 순간 따뜻한 두팔이 내 몸을 속에 품었다. 그 품 속은 어느 때와 다르게 미묘하게 뜨거웠다. 언제나 나를 기분좋게 해주던 따듯함이 그 순간만큼은 숨이 막힐 만큼 뜨거웠다.

 

   

집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은 상당히 주의를 기해야만 했다. 리슈 언니 집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있기는 했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 상인들도 지나가다 집을 가끔 방문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재빨리 책을 감추고 다른 일을 하는 척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해야하나 불평도 많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이 되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간이 걸려도 많은 책을 읽을수 있었다.

 “스코비아. 이거 봐라? 온 세상에 물만있는 곳이 있대.”

 “물만있어? 에이, 말도 안대.”“아니야. 여기 읽어봐. 여기 써 있잖아.”“헤에. 진짜네.”

“언제 한번 가보고 싶다아.”

 언젠가 한번 가볼 수 있겠지? 물만 있는 곳. 그 근처에 집을 옮기면 리슈 언니가 매일 물길러 다니지 않아도 되잖아.

 

 

 

몇 년이 지났다. 그 동안 나와 스코비아는 첫 생리를 경험했고 가슴도 조금 부풀어 올랐다.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올 정도로 자랐고, 키도 리슈 언니 목까지 올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우리 둘다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쓸수 있게 되었다.

집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 나는 이대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두려워졌다. 따지고보면 리슈 언니는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어릴적 추위에 떨고있는 우리가 불쌍해서 데려와 같이 살게해줬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식사나 빨래등 집안일을 셋이 놔눠서 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와 스코비아는 돈을 벌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마을에 가서 사오는 찬거리를 우리는 그냥 얻어먹기만 하는 셈이었다. 나는 몇날몇일동안 그 생각에 잠을 설치고 그래도 마음이 답답해서 하루는 텃밭을 정리한 다음 나무 그늘에서 쉴 때 리슈 언니가 자리를 비웠을 때 스코비아에게 이 얘기를 했다.

“스코비아, 우리 언제까지 리슈 언니랑 같이 살 수 있을까?”“뭔 소리야?”“우린 리슈 언니 가족이 아니잖아. 게다가 돈같은것도 한푼도 안 벌고 있고... ”무언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으음~ 그런데 긴히야. 리슈 언니도 가족이 없는 것 같잖아? 우리 여태까지 언니랑 살면서 언니 가족은 한번도 못 봤잖아. 얘기도 못 들었고.”“맞네. 그럼 우린 가족 대신인걸까?”

“그것까진 내가 알아낼 방법이 없고.”스코비아는 옆머리를 뒤로 쓸어내면서 등을 나무에 기댔다.

“그렇게 걱정되면 리슈 언니한테 한번 말해보는게 낫지않아?”

나는 딱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스코비아가 방금 한 말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잘못되서 리슈 언니와 살 수 없게되면 어떻게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난 결심했다. 괜히 말을 꺼내 언니와 함께 살 수 없을 바엔 그냥 나혼자 잠자코 있으면 계속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답이 보이지않는 혼자만의 근심이 풀리지않는채 가만히 있기란 참 어려웠다. 그럴때마다 차가운 물을 마시며 속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코비아에게 그 말을 한 뒤로 나는 스코비아가 내가 한 말에 신경을 쓰고있나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스코비아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않았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말하고 어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괜히 스코비아가 미워졌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 고민을 같이 공유하고 싶었지만 스코비아는 그럴수 없었다. 스코비아는 아무런 걱정도 없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해하려 들지않았다.

 

밤에 자다가 속이 쓰라려 잠에서 깨버렸다. 냉수를 한잔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는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잠은 안오고 쓰라림만 더 커져 참을 수 없다. 다시 냉수를 따라 마시고 스코비아와 리슈 언니가 깨지않게 조용히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검은 하늘 한켠에서 초승달이 희미한 빛을 냈고 주변으로 별들이 흩뿌러져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를 느끼면서 발목까지 올라오는 풀들을 스치며 집 주변을 크게 빙빙 돌았다.

처음에는 배가 쓰라려 인상을 쓰고 걸었는데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나중에는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달을 올려다봤다. 몽롱한 달빛을 눈에 한가득 채우면서 차가운 밤공기를 몸 깊숙이 들이삼켰다가 밖으로 내보냈다. 몸 속에 떠돌고 있던 잡스런 생각들이 몸밖으로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한참동안 달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머리 속이 완전 빌 때까지 몇십분이고 그렇게 서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춥다는 걸 느끼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서있었다. 그렇게하니 이전보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가 이불 안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침이 되고 점심이 되면 어김없이 그 생각들이 들어 계속 고민했다. 나는 잠이 안오는 밤이면 밖으로 나가 밤공기를 쐬고 돌아왔다. 그렇게하면 적어도 아침까지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않아도 되었다.

 


바람이 기분좋게 불던 날이었다. 리슈 언니가 평소에 잘 사오지않던 과일과 음식재료들을 한 무더기 사왔다. 근처 산책나간줄 알았던 언니가 밖에서 문을 쿵쿵 두드리며 부르길래 뭔일인가하면서 문을 열었더니 빵빵한 푸대자루를 가슴에 안고 서있는 것이었다. 나와 스코비아는 놀라면서 그 푸대자루를 옮겨 받았는데 무게가 정말 상당했다. 리슈 언니가 탁자옆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는 사이, 우리는 그 푸대자루 안에 있는 과일가 재료들을 주방 도구 옆에 꺼내놓았다.

“언니, 이게 다 뭐예요?”스코비아가 사과를 한아름 꺼내면서 물었다. 리슈 언니는 의자가 거의 넢어질 듯 뒤로 젖힌채 숨을 정리했다.

 "우리 동생들 생일 축하 해주려고.”

“예?”

우리 둘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억양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오히려 리슈 언니가 더 놀란듯 눈을 껌벅이더니 의자를 바로 세우고 몸을 돌려 두팔을 등받이 위에 올렸다.

“우리가 같이 산게 몇 년인데 아직까지 생일도 모르잖아? 그래서 오늘을 너희들 생일로 하려고. 가족끼리 이런것도 안하면 어떻게 하니.”나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리슈넬 언니는 우리를, 나를 이미 가족으로 받아줬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 동안 혼자서 속으로 끙끙앓던 것이 부끄럽고 속상했다. 내가 아무말 못하고 있을 때 스코비아가 재료를 계속 꺼내며 말했다.

“그럼 리슈 언니. 언니도 생일 축하 한 적 없으니까 같이해요.”“아니야. 난 생일 같은거 없어.” 리슈 언니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돼. 생일 없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하고 스코비아가 대꾸하자 언니는 그냥 살며시 웃기만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셋이 같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재료를 썰었고, 스코비아는 재료를 씼었고, 리슈언니는 실질적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수많은 음식을 만들어놓고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창가옆 탁자에 옮겼다. 자리가 부족해서 접시들을 겹쳐서 겨우 모든 음식들을 올릴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그 수많은 음식을 보면서 과연 다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무겁게 고개를 들었더니 스코비아와 리슈 언니도 나와 크게 다르지않은 고민을 하고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 우리가 정성스레 만든 요리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이 엄청 났던 지라 결국엔 다 먹지못하고 우리 셋은 뻗어버렸고-스코비아는 거의 토할 뻔 했다.- 그 음식들은 3일에 걸쳐 놔눠먹어야했다.

그 날부터 난 아무이유도 없이 리슈 언니가 어느 돈 많은 귀족집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서 돈을 계속 부쳐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이런 마을에서 떨어진 집에서 사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