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근처에 있던 큰 나무 밑에 앉아 잠을 잤다. 날이 밝아도 나는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에겐 계획이 없었고, 스코비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산 아래 길로 사람들이 지나다는게 드문드문 보였고, 이따끔 마을 쪽에서 말이나 개, 닭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먹을 것 좀 찾아보고 올게.”

스코비아가 대뜸 말하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스코비아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있었다. 서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거나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거나... 확실한 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않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먹을 걸 찾으러간다고말한 스코비아가 갑자기 위대해보였다. 나는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속이 쓰렸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않을만큼 의욕이 없었다. 그냥 앉아서 나무에 등을 대고 하늘을 보니 구름한점 없는게 왠지 지금의 나처럼 겉모습만 있고 속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스코비아가 멀리서 치마폭에 산딸기를 가득담고 돌아오고 있었다. 가끔 리슈넬 언니와 산 근처에 갔을 때 따먹었던 것들이었다. 왠지 걸어오는게 위태로워보여서 달려가서 내 치마폭에 반정도를 옮겨담았다. 그런데 옮겨담고보니 치마에 딸깃물이 빨갛게 물들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배려버린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단념했다.

“이거 어디서 따왔어? 이렇게 많이.”

나무 밑에 털썩 앉아 산딸기 두세개를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그냥 돌아다니다보니까 많이 있던데.”스코비아는 한 개씩 집어먹었다.

우리들은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스코비아가 내려가자고 먼저 제안했고 나역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움직이는게 나을 것 같았다. 내려가는 동안 나는 앞으로 무얼해야할지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돈이 많이 있으니 당분간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떠올랐다. 이런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밉다. 앞에 가고있는 스코비아는 뭘 생각하고 있을까?




산에서 다 내려오자 좌우로 곧게 깔린 길위를 걷게되었다. 어느 쪽으로 가던 가까운 곧에 마을로 가는 길이 이어져있었다. 우리는 보다 가까운 왼쪽길로 걷다가 마을로 이어진 꺽어진 길로 방향을 바꿨다. 마을을 둘러싸고있는 커다란 벽이 어둠속에서 서서히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가 걷고있는 길 옆에는 집들이 몇 채 서있었다. 나는 그 집들 중 한군데에 여관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책에서 읽어서 여관이 하룻밤을 묶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본것은 처음이었다. 스코비아가 더 좋은 생각이 있을것 같으니까 물어봐야지.

“여관... 들어가볼까?”

“글쎄...”

어정쩡한 대답에 짜증이 났다. 물론 나도 이렇게하자!라는 결정을 내리지못해 물어본거긴 했지만 아까전에 본 다른사람같아 보였던 스코비아였기에 명쾌한 대답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긴 그건 내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괜히 스코비아에게는 화를 내지않기로 했다. 나는 내 생각을 계속 말해봤다.

“어떻하지. 그럼 그냥 마을에 가볼까?”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단 그냥 여기 들어가보는게 낫지않을까? 흐음... 그런데 우리가 어려서 받아줄지 모르겠네.”

“아니 길바닥 말고...히익!”

말을하다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 우리 뒤에서 언제부터인가 서있던 것을 눈치채버렸다. 나는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몸이 얼어붙는것을 느껴버렸다. 우리가 했던 말을 듣고 우리가 간판을 읽었다는 걸 알아버렸으면 어떻하지?

“너희들 가출했니?”

그 사람의 목소리로 봐서 여자인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여자라면 우리를 잡아가지는 않을 거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리슈넬 언니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사이에 스코비아와 그 여자가 대화를 하고있었다.

“아, 아니요. 그냥 사연이 좀 있어서...”

“사연?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가출같은데?”

“가출은 아니예요!”

갑자기 고집을 피우는걸 보니 아무래도 스코비아는 바뀌지않은게 확실한 듯 했다. 여자는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우리를 야릇한 눈길로 관찰하듯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좋아. 그럼, 좀 비켜줄래?”

우리는 여자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 사람이 들어가자 우리는 한동안 닫혀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아아, 어른은 역시 아무렇지 않게 여관에 들어갈 수 있구나. 허탈한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려보자.”

스코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예 팔짱까지끼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황당하고 기가막혀 뭔가 한소리를 할려고 할 때 문이 다시 열리면서 내 어깨를 쳐버렸다. ‘악’소리를 내면서 문에서 몇걸음 떨어지며 방금 전 그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있는것을 볼 수 있었다.

“어머, 미안. 괜찮니?”

“괜찮아요.”라고 말은 했지만 너무 아파서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머쩍게 웃고있는 저 여자를 향해 겉으론 툴툴대고 속으론 온갖욕을 퍼부어줬다.

“어쨌든 미안하고. 들어와. 내가 방 잡았으니까.”

“예? 무슨 말이예요?”

“오늘 밤 너희들이 길바닥에서 안자도 된다는 말이란다.”

말투가 살짝 거들먹거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살았다’라는 생각에 오히려 기뻤다. 여자는 오른손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감사하라고.”

기분이 확 나빠졌다.




여관 안은 전체적으로 등불과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들로 인해서 마치 석양이 지는 오후처럼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문 바로 앞에 가로로 긴 나무 탁자가 있었고 그 앞에 의자가 5개 정도 놓여있었다. 그리고 긴 탁자 너머에는 주인인 듯한 아줌마가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서있었다. 넓은 공간에는 탁자와 의자들이 서로 한쌍을 이뤄 일고여덟개 정도 놓여있었다. 그 탁자들 위에는 방금전까지 있었던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음식이나 술병들이 놓여있었다.

우리를 재워주겠다는 여자는 여관 주인 왼쪽에 있던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니 왼쪽으로 꺽인 계단이 보였고 그 위로 붉게 타오르는 횃불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얼마가지않아 오른쪽에 문이 다섯개 정도 있는 방에 다다랗다. 나는 그 순간 그 감옥과 겹쳐보여 몸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뭐 하니?”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와 스코비아가 문들 중 하나를 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 소리 하나를 밖으로 내뱉으며 둘에게 걸어갔다. 방안은 생각보다 컸다. 적어도 5명까지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방 중앙에는 혼자 잘 수 있는 자그마한 침대가 있었고 좌우 벽에는 조그마한 책상과 서랍같은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촛불 2개에 불이 붙어있어서 방안을 은은하게 밝혀줬다. 여자가 방 중앙에 있던 침대를 창가로 밀었고, 스코비아가 한쪽에 있던 서랍에서 모포들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돈은 내가 냈으니까 침대는 내 꺼야. 불만없지?”

손으로 품속의 돈 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면서 ‘저희도 돈 있어요.’ 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려고했지만 그 직전에 스코비아가 “예, 저흰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래, 일단 지금은 자고 얘기는 내일 하자.”

얘기를 하자라는 말에 왠지 짜증이 일었다. 귀찮게 얘기는 무슨... 따지는 것도 귀찮아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스코비아 옆에 누워 그냥 모포를 몸에 둘둘말고 잠을 청했다. 이불보다는 좋지않았지만 그런대로 따듯했다.



아침을 여관 1층 많은 탁자들 중 하나에 앉아 먹으면서-물론 우리 돈을 낸 건 아니다.- 우리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대화를 나눴다.

“내 이름은 베젠트야.”

“저는 긴히예요.” 짧고 퉁명하게 대답했다.

“전 파라스코비아예요. 스코비아라고 부르시면 되요.”

“스코비아?”

“네.”

“아니, 확인차 말해본 거야. 뭐 어쨌든...”

베젠트는 말투나 행동이 시원시원한게 조금은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한줄로 낮게 묶은 머리와 살짝 검은피부 그리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나한테 베젠트라는 사람을 각인시켰다. 얼굴은 예쁘지도 못 생겼지도 않았지만 호감이 갈만한 사람이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상당히 들어보였는데 리슈넬 언니보다 겨우 한 두 살 정도 위인 느낌이었다.

“너희들 집은 어디니?”

우리들은 뭔가 통했는지 둘 다 아무런 말을 안하고 밥만 먹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어디인지를 몰랐다. 우리가 살았던 세계는 마을과 리슈넬 언니 집, 그리고 그 근처가 전부 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불리는지도 알지못했다. 베젠트가 오른손을 입근처로 갖다댔다.

“흐음... 역시 가출했구나?”

“아, 글쎄 가출은 아니라니까요.”

눈 을 부릅뜨고 말하니까 베젠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피식웃더니 손을 흔들면서 “알았어, 알았어.”라고 말했다. 거기에 스코비아까지 킥킥대고 웃는데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코비아, 너까지 그러면 안되잖아. 그 뒤로 베젠트는 말을 하지않고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밥을 먹었다. 베젠트는 계산을 하고 여관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의 표정을 살핀다음 베젠트의 뒤를 따라나갔다. 우리가 나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베젠트가 허리춤을 조이며-베젠트의 옷은 위아래가 하나로 돼있었다.- 물어봤다.

“그래, 너희들 어디로 갈거니?”

“알 필요없잖아요.”

팔짱을 끼고 나름 매서운 눈초리로 말했다. 베젠트는 놀라는 기척도 없이 또 한번 픽 웃더니 내 머리에 살짝 주먹을 댔다뗐다.

“하룻밤 재워준 사람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그러게요.”

아아, 스코비아.

"뭐 좋아. 나하고는 별 상관없으니까.“

아니 그럴거면 왜 물어봤냐고요. 내가 뾰루퉁하게 있으려니 베젠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잠깐 떨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이였고 종이에는 내가 읽을 수 있을듯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이거 가져가.”

“이, 이게 뭔가요?”

최대한 모르는 척하면서 평범하게 말해보려했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나는 최대한 티 안나게 종이를 건네받았다.

“저 마을에 가면 한쪽에 책을 엄청 많이 쌓아놓은 가게가 있거든. 거기에 있는 할아버지한테 이걸 보여주면 일을 시켜줄거야. 아마도.”

“그럼 베젠트 언니는 저 마을에 살고있던거예요?”

스코비아가 내 손에 들려진 종이를 보다가 물었다.

“응”

“그럼 왜 어제는 이 여관에서 잤어요?”

“가출했거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젠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이번엔 스코비아도 맞장구치지 않았다. 베젠트는 우리들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팔짱을 꼈다.

“같은 가출 소녀라서 동지의식을 느꼈달까?”

“몇번을 말해야... 저희는 가출....” 그것보다 당신은 소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나중에 보자.”

베젠트는 내 말을 끊더니 일방적으로 인사를하고 우리가 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지나가던 말의 발굽 소리에 정신차리고 마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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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25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던한 문체군요.
검은바다 재미잇게 잘 보겠습니다.

이윤후 2009-07-25 22: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