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동굴안은 불씨하나 보이지않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앞에서 나를 이끌고있는 스코비아는 이곳이 처음오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망설이지않고 앞으로 나가고있었지만 방면 나는 스코비아가 방향을 틀때마다 앞에 있던 벽과 부딫히거나 스치기를 반복했다. 오랜시간 같이 살아온 스코비아가 이럴때는 엄청나게 낯설다. 얘는 내가 모르는 걸 얼마나 알고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밤눈이 좋아서 그런걸지도 모르지만.

동굴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서 얼마동안 그 안에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걸었어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차가운 공기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여름이라면 시원해서 좋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고 스코비아는 감기까지 걸려있었다.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않은 곳이다. 우리는 지금 브리크테나 벽밖에 나와있다. 저 쪽으로 우리가 이 도시를 처음봤었던 산이 보였다. 우리가 나온곳은 밖에서 보면 어느 하수도로 보인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왜 이런 비밀통로를 서고에 만들어났을까? 이런걸 알고있는 아수씨도 신기하고.

“스코비아.”

스 코비아를 불렸지만 대답 대신에 스코비아는 내 손을 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왜 그래!” 내가 외쳤지만 금방 스코비아의 대답을 들을 이유가 없어졌다. 뒤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내게 뭔가 특별한 능력같은게 없다고해도 확실히 알수있는 것은 한두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아니 나는 브리크테나 밖을 돌아다녀본적이 거의 없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있는지 알지못했다. 그냥 뒤를 쫓아오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칠 뿐이다. 스코비아가 힘들어하는게 확실히 보였다. 감기가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달리니 당연하지. 나도 이렇게 달린 적이 거의 없어서 숨쉬기도 힘든데. 하지만 우린 여전히 멈출수 없었다. 나는 스코비아가 이끄는 대로 그냥 달리기만 하는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않는다. 종아리를 스치는 풀잎에 자잘한 상처가 나 따끔한걸로 우리가 달리는 곳은 이미 길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덕을 몇 개넘고 주변에는 어느새 나무들이 꽉 들어차기 시작했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는 전혀 줄어들거나 멈추지 않았다.

난 바보인걸까? 이제야 저 사람들이 우리를 확실하게 목표로 삼고 오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거의 전력질주를 하다시피 달리는 우리를 쫓아올 이유가 뭔지 알수없었다. 밤공기는 차가운데 몸에서 땀이 조금 흐르는 걸 느낄수있었다. 숨이 가빠 가슴 속이 말로 할 수 없을만큼 아프다. 하지만 멈추면 안된다.

우리는 지금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풀들 사이를 걷고있다. 한참동안 뛰면서 나나 스코비아나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밖에서 봤을때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있어서 마치 벽같았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사람이 걸어다닐 정도는 되게끔 나무들이 일정한 관격으로 불규칙하게 자라고있었다. 나뭇잎들이 이 안을 거의 가리고있어서 하늘이 전혀 보이지않았는데 낮에도 이런건지 어디를 가나 상당히 습하고 발밑이 추적추적한것이 기분나쁘다. 뒤에서 들리던 발자국 소리들이 지금은 들리지않는다. 아마도 이 안이 나무들 때문에 복잡해서 추적을 떨쳐버린 것일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있는 것일까. 지금도 내 손은 스코비아의 손에 잡혀있고 스코비아는 앞장서서 걷고있다.

“스코비아?” 하고 나지막히 불러본다. “응?” 스코비아가 고개를 살짝 돌린다. 얼굴이 한눈에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심하게 빨갛다. 열이 올라온게 분명하다. 스코비아가 날 보더니 그냥 씩하고 웃어보인다. ‘난 괜찮아’ 뭐 이런걸 표현하고 싶었던걸까, 아니면 말하기조차 싫을 정도로 아파서 말대신 그런걸까. 후자라면 말을 거는것 자체가 스코비아에겐 짜증나는 일이니까 말하지 않는게 낫지않을까...하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었나보다. 스코비아는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빤히봤다.

“우리 지금 어디로가는거야?”
“어? 모르겠는데... 나도 여기는 처음와서.”

여기는 처음와서라고 하는 걸 보니까 이 근처까지 온 적은 있었는 것 같다. 스코비아가 다시 걸으려고 할 때 발을 빨리 움직여 스코비아보다 앞으로 나갔다.

“모르는거면 내가 앞장설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이젠 내가 스코비아 앞에 서서 걷고있다. 자리가 바뀐다고해서 풀밑의 축축한 땅이 해결되는것도 아니고 목적지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병걸린 스코비아에게 너무 미안하다.

“긴히야.”
“응?” 금방 걷기시작한 발을 멈추고 스코비아를 돌아봤다.
“고마워.”

스코비아는 그러면서 맨날 하던대로 입을 가볍게 벌려 한번 웃었다. 열 때문에 새빨게진 얼굴로. 난 곧장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게 다 고맙댄다.”스코비아가 작은 소리로 실없이 웃는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은지 꽤 됐다. 그 점을 스코비아에게 말하니 바닥에 풀이 있고 축축해서 그럴것이라고 답해줬다. 그건 나도 알고있었지만 그 외에 사람의 기척이나 그런걸 느껴본지가 꽤 지났다. 스코비아는 조심해야하고 빨리 움직여야한다고 주기적으로 말했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를 쫓는걸 포기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아, 할아버지와 베젠트는 잡혔댔지.


뭐야, 이게. 뭐야.....


“무슨 소리?”

가만히있던 스코비아가 갑자기 한 말에 반사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뭔가 벌판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으면서 물을 버리는 듯한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스코비아와 시선을 맞춰봤다. 얼굴은 아직도 새빨간 상태지만 방금 들린 소리에 흥미가 생겨서 그런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가볼까?”하는 한마디에 스코비아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천천히 그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이 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목적지가 생겨서 그런지 이제까지보다 속도가 붙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나무와 풀과 축축한 바닥이 사라지고 브리크테나 성밖의 길옆같은 곳을 걷고있었다.

“와, 이게 뭐야?”

스코비아가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것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말도 하지않고 가만히 서있으니 어디선가 이런 장소를 들었던것 같다. 우리는 오직 물. 물만 보이고, 물만 있는 그런 곳 앞에 서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얼마가지못했다. 우리 앞에서 땅이 사라지고 없었다. 절벽이었다. 절벽 끝에서 아래를 유심히 쳐다보고있으니 처음에는 한치앞도 안 보이다가 나무 뿌리가 보였다가 툭 튀어나온 돌들이 보이더니 마지막으로 절벽을 치고있는 커다란 물들이 보였다. 그 물들은 절벽쪽으로 엄청나게 크거나 작은-하지만 우리가 봐왔던 것보다는 훨씬 큰- 물결을 일으키며 오다가 이내 벽에 부딫혀 모습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있을 물의 끝을 보려고했지만 아무리 눈을 찡그려봐도 끝에있을 땅이 보이지않았다.

“이거... 바다 맞지?” 스코비아가 나직이 말한다.

“바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단어인데 잘 기억나지 않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아, 옛날에 어디서 봤던거 같다.”
“보는건 이게 처음아니야?”
“맞아. 책에서 봤어.”
“그런데 바다는 파랗다고 한거 같았는데 검정색이네?”
“밤이라서 그런가?”

넌시지 말해봤는데 스코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잠시나마 잊었던 열기운을 다시 느낀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잠시동안 이 검은바다를 보고만 있기로 암묵적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검정색이라니. 다음번엔 반드시 파란색을 볼거야.




다시 숲으로 들어오고 얼마되지 않아 스코비아의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호홉이 점점 가빠지고 그냥 서있는 것도 힘들어보였다. 아까보다 더 추워진것같아서 옷을 좀 더 끌어당겨 입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여전히 춥다. 이제는 나까지 머리가 어질어질하기 시작했다.

“이픈!”

갑자기 왠 고함소리가 귀를 찌르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리는 꽤 정확하게 그리고 크게 들렸다.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린 것을 느끼면서 스코비아를 쳐다봤다. 스코비아는 옆에 있던 나무에 의지해 겨우 서있었다.

난 왜 이런거지. 스코비아 말을 좀 더 귀담아듣고 어떻게든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었는데. 그 놈의 바다같은거 나중에 얼마든지 보면 됐었는데. 잠깐 그 때는 스코비아도 아무말 없었잖아. 아니지, 그냥 상태가 안좋아서 가만히 있었을 수도 있어. 그냥 물어보기라도 했어야했는데. 뭐야 이거. 이제와서 이렇게되면 어떻게해야돼? 아, 할아버지, 베젠트.... 리슈... 리슈넬 언니...

스코비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라거나 뭔가 말을하거나 그런 걸 하고있을 틈이 없었다. 돈주머니 스코비아가 가지고왔었지. 스코비아 허리춤의 돈주머니를 확인하고 내 웃옷을 벗어 스코비아에게 덮어줬다. 스코비아는 미동도하지 않고 간신히 숨만 내쉬고있었다. 갑자기 얼마전에 스코비아가 한 얘기가 생각난다.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나만 들을수있을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려본다.

“아무래도 나같은 애보단 스코비아가 낫겠지...”

나는 근처에 잔뜩있는 긴 풀들을 뿌리째 뽑아 재빨리 스코비아 주변에 어색하지 않게 옮겼다. 별빛이고 달빛이고 나무가 가리고있어서 깜깜할 뿐인 여기서는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는 이걸 발견하지 못할 거야. 그럴거야. 아니 그래야해.

그리고나서 바로 뛰었다. 시간이 없다. 얼마뒤면 사람들이 이 근처까지 올 것이 확실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야한다. 멀리서 스코비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내가 잘 알고있다.




도착했다. 새까만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 여기까지 멈추지않고 달려오느라 숨이 차다.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정말 아쉽다. 책에 쓰여진 바다는 하늘같이 파란색인데 지금 내가 보고있는건 밤하늘같은 검은색이다. 바다도 하늘과 같이 색이 두 종류인 걸까.

바다를 향해 힘껏 소리쳤다. 이 소리를 내기위해서 내가 상상한 건 리슈넬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때 내지를 수 없었던 비명. 그걸 지금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리를 한번 지를 때마다 머리 속이 점점 멍해져간다. 절벽 끝에서 소리를 다 지르고 엎드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계속 눈물을 훔쳐보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이러긴 싫다. 그런데 멈출수가 없다. 몸에 힘이 빠지고있지만 나는 쓰러지지않을거다. 절대 쓰러지지 않고 마지막을 겸허하게 장식할 거다.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은 어떻지? 별의별 생각이 마구든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을 계속 상상하면서 계속 후회한다. 그러다가 어렸을 때 일들을, 리슈넬 언니와 스코비아와 같이 그 집에서 살았을 때... 그 때를 계속 회상한다.

얼마동안 이 상태로 있었을까? 발소리가 나길래 뒤를 돌아봤다. 아까전 소리로 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다. 남자들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5명이 조금 넘어보인다. 아직도 내 얼굴은 눈물로 넘쳐흐르고 있다. 아직도 내 마음은 어렸을 때를 회상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감상적이 된 시간이 너무너무 짧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맨 앞에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기분이 나쁘다.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내 왼쪽발은 허공에 떠있었다. 점점 몸이 뒤로 넘어질때 그 남자가 갑자기 다가가 내 웃옷을 잡았다. 아마도 내 손을 잡으려했던 걸테지. 아주 잠시 내 몸이 쓰러지는 것이 멈췄다. 하지만 내 옷의 아주 작은 부분만 잡았던 남자의 손에서 옷이 빠져나온다. 밤하늘이 보이다가, 검은 바다가 보인다.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작은 단층 집 뒤에는 이제는 죽어버려 말라가고있는 나무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있었다. 살아있을 적엔 그 커다란 몸과 팔로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며 멀리서 지나가던 이도 집과의 조화에 감탄했었던 그 나무 밑에는 이전에 살고있던 사람들이 만들었었던 텃밭의 모습이 조금 남아있었다. 집은 사람의 모습을 본지 오래라 많이 낡았고 주변에는 풀들이 제각각으로 자라있었다.

그 나무와 집으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다. 그녀는 문득 걸어오던 걸음을 멈추고 집을 지긋이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직 그대로 있었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oute 2009-08-1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운 여름 동안, 좋은 글 올려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

이윤후 2009-08-19 00:11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을 끝까지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할아버지와 베젠트가 떠난날부터 오늘까지 시간이 꽤 지났다. 이쯤이면 돌아올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스코비아와 함께 대충 청소를하고 서고로 들어왔다. 밖의 날씨가 꽤 추워진것을 서고의 차가운 공기로 알 수 있었다.

베젠트의 원고가 있었던 책상 위는 지금은 깨끗하게 치워져있다. 요근래 나나 스코비아나 서고를 들어오지 않았더니 책상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있다. 일단 베젠트 책상위를 입으로 바람을 불어 먼지를 날려보내고 손으로 남아있던 먼지를 깨끗하지는 않지만 보기좋게 치웠다. 책상 밑에 있던 의자를 꺼내 앉아 봤다가 다시 일어나 책장에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옛날에 읽었던 한 책의 제목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그 책이 이 책장에 있을지 알 수없지만 일단 찾기 시작했다. 책장의 책들은 제목 순으로 가지런하게 정돈되어있다.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스코비아의 손길이 여기에 미쳤을것이다. 손으로 책들을 흩으면서 제목들을 읽었다. 한참 동안 여러 책장들을 뒤지다가 어느 한 책장의 맨 아래 중간쯤에서 손이 멈췄다.

“찾았다.”

어느 왕자님의 여행. 어릴 때 자주 읽었던 그 책이다. 책을 들고 베젠트 책상으로 걸어갔다.




스 코비아가 감기에 걸렸다. 며칠전부터 기침을 하고 밤이되면 멍해지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열이 펄펄 끓는다. 스코비아를 눕혀놓고 아침으로 매일 먹던 밥대신 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장작불에 신경써가면서 죽을 젓고있자니 어릴때 감기에 걸렸던 일이 생각난다. 스코비아하고 리슈넬 언니가 걱정가득한 표정으로 간병을 해줬었다. 그때는 몸도 아프고 정신도 몽롱해서 그저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마운 일이었다.

죽을 두 그릇에 담아 손에 각각 한 개씩 잡고 몸으로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스코비아가 윗몸을 일으켜서 벽에 기댔다. 스코비아 옆에 앉아서 한 그릇을 내밀었다. 죽을 건네받은 스코비아는 머리를 한번 휘저은 다음에 천천히 죽을 떠 먹었다.

“할아버지하고 베젠트 언니는 감기에 걸리면 안될텐데.”
“아이고, 스코비아씨. 자기 몸이나 잘 관리하세요.”

스 코비아가 죽을 떠 먹으며 힘없이 웃었다. 말은 그렇게했어도 나도 할아버지와 베젠트가 걱정이 되긴한다. 우리야 여기서 편히 쉬고있지만 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어디하나 아프면 고생이 심할텐데... 갑자기 스코비아가 나오는 기침을 입을 꾹 막고 참는 바람에 사래가 걸렸는지 켁켁대며 눈물을 찔끔 흘린다. 나는 황급히 물을 한컵 떠오기위해 일어섰다.




잠 을 자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잠이 깼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번 만져보고 다시 잠자리에 누우려는 순간 옆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코비아는 저녁 때 열이나서 억지로 겨우 잠들었었는데 역시나 선잠이었는지 중간에 일어난 것 같다. 좀 있다가 다시 돌아올테니까 다시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이상하게 잠은 안오고 정신이 점점 또렷해져서 짜증을 내며 다시 일어났다.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한 아수씨가 황급히 들어왔다.

“아수씨?“

”빨리 나가자!“

뭔 말인지 알수없어서 잠시 생각하려는 사이 아수씨가 내 손을 낚아채서 끌어당겼다. 어정쩡하게 일어나면서 아수씨에게 끌려가면서 뛰다보니 저편에서 스코비아가 달려오고있는 것이 보였다. 스코비아는 손에 내 옷을 들고있었고 본인은 이미 자기 옷을 입고있었다. 스코비아는 나한테 시선을 잠시 마주치는가 싶더니 이내 아수씨에게로 옮긴다.

“아수 오빠. 놓고온게.”

말 은 제대로 끝마지치 않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스코비아는 내가 옷을 넘겨주고 곧바로 지금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스코비아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에 들려진 옷을 입었다. “가자.” 내가 옷을 입자마자 아수씨가 잡은 손을 당기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예요?!”

목소리를 높여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고했지만 아수씨는 아무 얘기도 해주지않았다. 뛰는것이 힘들어서 대답을 못 들은것이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아수씨와 내가 도착한 곳은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머금고있는 서고였다. 방금 잠에서 깨서 그런지 옷을 입고있었지만 꽤 추웠다. 아수씨가 벽쪽으로 가더니 뜬금없이 벽을 손등으로 툭툭 두들기고 다닌다.

“아수씨. 무슨 일이죠?”

아까 했던 말을 또 하는건 의외로 버겁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다. 아수씨는 계속 벽을 두들겼다.

“베젠트와 할아버지가 잡혔다.”
“잡혀? 무슨 말이예요?!”
“둘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아수씨가 말을 하다가 끊더니 근처에 있던 망치를 들고 있는 힘껏 벽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돌과 금속이 맞닿는 쩌렁쩌렁한 소리와 함께 벽에 금이 가면서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뭐하는거야, 지금?

“그러다 부숴지겠어요!”

“부수려고 이러는거야!”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져내렸다. 부숴진 벽의 뒤편에는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긴 통로가 있었다. 서고에 저런 비밀통로가 있었던거야? 아니, 도대체 왜 저런게 여기에 있는거지?

“꾸물거리면 잡혀. 스코비아가 빨리 와야할텐데...”

아 수씨가 들고있던 망치를 원래 자리에 갖다놓았다. 그런데 저 망치 원래 저기있었던 거였나? 잘 신경을 쓰지않아서 모르고있었는데.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아까 했던 말을 이으려고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코비아겠지?“여기요!”스코비아가 숨을 헐떡이면서 서고로 들어왔다. 이제 아까 말했던 놓고 온것이라는 것을 알수있었다. 옷장 밑 구멍에 있는 돈주머니가 틀림없었다.

“긴히야. 빨리가자.”“자, 잠깐. 왜 우리가 도망쳐야 되는데?”

“설명은 나중에 스코비아가 해줄거야. 빨리 가.”

하 지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채 그냥 하라면 하라는대로 움직이기에는 내 안의 반발심이 너무 컸다. 그냥 가만히 서있으니 스코비아가 다급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내 손을 힘껏 끌어당겼다. 어쩔수없이 스코비아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수씨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고 입구에 너지러져있는 돌들을 구석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잠깐! 아수씨는요!”
“난 안가.”
“왜요?!”
“할아버지하고 베젠트를 잡고 여기로 오고있는건 우리 집 놈들이야. 그 놈들이 날 어떻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너희는 빨리 가는게 날 돕는거야.”

어? 여기로 와?

“아수 오빠 집의...”

스코비아가 놀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까 전의 아수씨 얘기를 생각해보면 스코비아는 미리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지만 이건 처음들은 모양이다.

“내 생각에도 너희들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러려고하니까.”
“왜 저희를 도망치게 해주는거죠? 이런 비밀통로까지 억지로...”
“베젠트가 부탁했어. 자, 빨리가.”

나 는 멍청히 서있었지만 스코비아가 내 손을 잡아 당겼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다보니 입구가 무언가로 막히고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아수씨가 아까 돌을 치웠으니까 근처에 있던 책장으로 막고있는 것 같다. 뭐야 이거. 왜 잠다가 일어났다가 이런 일을 겪어야되는거야! 전에도 그랬고! 전에도... 지금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럼 다녀올게.”
“예. 잘 다녀오세요.”

베젠트와 할아버지가 당분간 서점을 비우게됐다. 책을 만들어줄 인쇄소를 찾기위해서다. 사실 브리크테나에도 인쇄소가 한곳 있기는 한데 베젠트가 쓴 책 내용이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오고가는 브리크테나에서는 인쇄를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책에 관련된 일을 젊어서부터해서 이쪽으로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있어 멀지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인쇄를 부탁하기로 한 것이다.

나 는 사실 베젠트가 쓴 글이 책이 될 수 있을지 안될지 모르겠다. 그런 내용의 글을 책으로 만들면 나중에 잘못되었을때 만들어준 사람도 화를 당할 거다. 그런것까지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긴해도. 혹시 모르지. 여자 입장을 잘 이해해주는 어느 멋진 인쇄공이 있을까?

두 사람이 떠나고 스코비아하고 나만 서점에 남았다. 베젠트는 우리가 글을 안다는걸 알지만 내가 알기론 할아버지는 모르고있다. 그래서 우리가 서점에 남아있다고해도 서점 문을 열지는 않았다. 내심 다행인게 나는 설마 서점 문을 열어야하는줄 알고 엄청나게 긴장하고있었다. 할아버지하고 같이 계산대를 봐도 몇몇 남자들은 나를 아주 못볼걸 본것처럼 본다. 할아버지가 있어도 그런데 나 혼자 계산대를 보면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이 된다. 우와, 이거 참 가관인걸.

“긴히야.  같이 나가서 놀 수 있겠어?”

머릿속으로 한참 상상을 펼치다가 갑자기 스코비아가 말을 걸어오자 몸이 움찔할 정도로 깜짝 놀라버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하러 했지만 내가 너무 지나치게 놀랐는지 스코비아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주 잠시동안 스코비아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서로 피식 웃었다.

“그런데 요즘 점점 추워지는데 나가기엔 조금 그렇지않아?”

“그래도 오랜만에 둘이만 있잖아.”

그러고보니 그런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따로 일을 했고 그 뒤에 스코비아는 베젠트와 계속 함께 있었다. 할아버지가 잠시 나갔을때도 항상 베젠트와 같이 있었으니까 서점에 우리 둘만 있는건 처음이었다.

“그렇네. 우리 둘만 있는거 처음이네.”
“처음이었나?”

스코비아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젖히며 예전일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흩어보기 시작했다. 아, 스코비아는 방금 오랜만이라고 했구나. 그럼 예전에도 우리 둘만 있을 때가 있었나? 으음... 기억이 안난다. 내가 알기론 이번이 처음인데.

“그런건 어떻든 상관없잖아?”
“하긴 그렇네.”

왠지 이 무의미한 대화에서 뭔가를 찾아내려 잠시지만 머리를 굴린 내가 미워진다.

“어쨌든 좀 나가서 돌아다녀보자아.”
“하지만 날...”
“이럴때 아니면 언제 할 일없이 돌아다니겠어?”

날씨탓 하려고하니까 재빨리 말을 막아버린 스코비아가 살짝 미워보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 서점에서 지내고부터 한가롭게 돌아다녀본적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리슈넬 언니 집에서 살 때는 심심하면 셋이서 돌아다니고 했었는데.

“응? 긴히야. 그래도 오늘은 별로 안 추우니까 나갔다오자. 응?”

앞뒤로 응을 붙이면서 조르니까 어째 거절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평소 잘 이러지 않던 애가 이러니까 갑자기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짦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여주자 스코비아는 방긋 웃으면서 내 손을 끌어당겼다.
막상 나와보자 아까 내가 했던 걱정만큼 춥지는 않았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기분좋게 느껴지는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우리끼리만 맛있는 것 좀 먹어보자.”

스코비아가 손에서 누런 동전 몇 개를 튕겼다.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돈주머니. 그 엄청 큰 은색 개가 나한테 줬던 그 돈주머니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생각나는거지.

“스코비아.”
“응? 추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돈주머니 아직도 거기에 있어?”
“아, 그거. 아직 거기있지.”

스코비아는 입술을 삐죽내밀며 싱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평소에는 잘 가지않았던 브리크테나의 여러거리들을 돌아다녔다. 시장거리는 항상 찬거리 사러 다녔었기 때문에 가지않았다. 그래서 시장을 제외하면 브리크테나에서 먹을 것을 살 곳이 그렇게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서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을 걷다보니 어느 사이 주변에 칼을차고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와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걷고있는 우리는 여름에 오는 눈처럼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스코비아도 나처럼 상당히 당황한 것 같다. 우리가 막 태어난 동물같이 당황한 것 처럼... 이 표현이 적절한가? 이상한 표현을 남발하지 말자. 어쨌든 그런 것같이 주변을 둘려보며 걸을 때 칼을 찬 험상궃은 남자들도 우리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다. 아니 그것보단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우리보다 키도 훨씬크고 몸도 좋은 사람들 속을 돌아다니자니 괜시리 주눅이 들고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겠다. 으, 저기 저 수염 아저씨는 왜 저렇게 째려보는 거야.

“여기 너무 무섭다. 빨리 나가자. 스코비아.”
“괜찮아. 저 사람들이 뭐 볼게 있다고 우리한테 신경쓰겠어?”

의외의 대답에 ‘응?’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스코비아는 보통 때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있었다. 이 날카롭고 차가운 거리에 벌써 익숙해졌다는 말인가? 얘는 아무래도 적응속도가 보통 사람보다 비정상적으로 빠른가봐.

나는 최대한 그곳에 있는 사람들하고 눈이 마주치지 않게 거의 바닥을 보고 걸었다. 짧은시간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남자들하고 얼굴을 마주한다는것은 나에게 불가능했다. 왜냐면 그 남자들은 몸에 근육도 많았고 나보다 키도컸고 여차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스코비아 말에 따르면 괜한 걱정이겠지만.

“그러고보니 방금 거기 남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도 있더라?”

막 그 거리를 빠져나오자 스코비아가 하늘에 대고 말했다. 여자도 있었구나. 그런데 그런 남자들 틈에 서있는 여자라 상상이 안간다.

“몇살로 보였어? 그 사람도 칼차고 있었어?”
“음... 베젠트 언니하고 비슷하던거 같던데. 칼은 남자들보다 작은거 가지고있더라.”
“그런데 그 사람들 칼은 어디다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거지?”

스코비아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연거같았는데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내가 착각한 건가? 느낌상으로는 분명 뭔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우 리는 한참을 걸어서 강 바로 옆에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은 사람이 몇백명은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였는데, 그 넓은 바닥은 모조리 네모난 우유빛 돌로 깔려있었다. 거기에 바닥 뿐만 아니라 외곽에 놓여있는 의자나 장식들까지도 모조리 우유빛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가한 점심 때라 그런지 광장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후아, 스코비아. 좀 앉아서 쉬자.”

스코비아도 오랫동안 걸어다니느라 지쳤는지 별말없이 ‘응’하며 수락했고 우리는 근처에 있던 우유빛 돌의자에 앉았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머금고있던 돌의자는 무례하게 얼굴에 엉덩이를 들이댄 우리들을 그 온기로 기분좋게해주는 관대함을 선사했다. 하릴없이 저 앞에 보이는 작은 강을 보고있자니 강가에 난 길다란 풀사이로 노다니는 몇 마리의 작은 강아지들이 보였다. 강아지, 개...

“그건 누가 준 돈이었을까?”
“응?”
“우리가 지금 가지고있는 아니 우리 방에 있는 돈 주머니. 그건 누가 준거지?”
“그 때 그 커다란 늑대가 줬다고 했지?”
“늑대?”
“응. 늑대.”
“늑대가 어떻게 생긴거더라?”
“개하고 비슷한데 더 무섭고 큰 게 늑대아니야?”

아, 그러고보니 그건 개라고하기에는 너무 컸었지. 보통 개처럼 같이 놀 수 있을 분위기도 아니었고. 늑대란건 책에서만 살짝 읽어본거라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설마 그게 늑대였을 줄이야. 늑대라, 그런데 늑대라도 그렇게 클리는 없을 거 같기도 한데.

“그런데 긴히야. 그 돈을 누가 줬는가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그 돈을 왜 줬는가가 중요한거 아닐까.”
“그냥 우릴 거기에 놔두고가기엔 양심에 찔려서 준거 아닐까?”

하지만 말하는 도중에 엄청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버렸다.

“늑대가? 얘는 농담도.”

으,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나는 왜 항상 실없는 얘기를 해서 이런 반응을 끄집어내는거지? 좀 더 생각하고 말해야겠는걸.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스코비아는 바로 말하지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순간 갑자기 스코비아가 할 것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얘라면 아마 이런 말을 할 것 같아라고 내 머리가 마음대로 상상해댔다.

“그 돈 나중에 큰 일하는데 쓰고싶은데 어때?”
“큰 일?”

스코비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책을 하나 쓸거야.”

들으면서 나름대로 충격 비슷한 것을 느낄것 같았는데 의외로 아무런 느낌도 나지않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오히려 나한테 조금 놀랐다. 아마도 예전에 베젠트가 책을 쓰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글을 알고있는 한 사람으로서 책을 쓰고싶다는 생각을 해봤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책?”

“어떻게든 좋은 책.”

스코비아는 여전히 하늘을 보면서 간단하게,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도 하늘을 올려봤다. 태양은 머리 뒤에 있었고 앞에는 작은 조각구름 하나가 바람에 실려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나도 간단하게 말했다.

“어렵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스코비아는 땅거미가 내릴 즈음에야 돌아왔다. 베젠트가 방에서 나온뒤에 할아버지는 외출했고 그 뒤 쭉 함께 계산대를 지키고있었다. 스코비아는 들어오자마자 눈을 동그랗게뜨며 “어?” 소리를 냈다. 베젠트는 그 모습을 보더니 왼손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아수 만나러 나갔었다며? 만났니?”
“아, 예.”
“뭔 얘기했어?”
“요근래 언니 얘기를 좀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정도를 물어봤어요.”
“그래... 미안해. 나땜에 네가 괜한 고생했네.”

베젠트가 짧게 작은 한숨을 내쉬며 쌉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스코비아가 당황해서 손을 막 내저었다.

“아, 아니예요. 그냥 제가 그러는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한거라서.”
“아니야. 고마워.”

베젠트는 싱긋 웃었다. 스코비아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채 어쩔줄 몰라했다.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는건 뭔 이유야?

“에... 아수씨가요.”
“아냐. 됐어.”
“예?”

스코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동시에 베젠트를 쳐다봤는데 똑같은 표정을 했을것같다.

“굳이 얘기한걸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스코비아.”
“예.”
“나 오늘은 서고에 있을테니까. 스코비아는 긴히랑 여기있어.”
“어? 오늘 벌써 밤이 다 됐는데요?”

잠자코 듣고만있기 뭐했는지 나도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말을 속으로 밀어넣는 연습을 좀 해야겠는데?

“그렇긴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이 개운해져서. 이런 날엔...”

베젠트는 말끝을 흩트리더니 그냥 씩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언니, 아수 오빠가 그날 일은 정말 미안하대요.”

베젠트는 들어가면서 조용히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의 듣지못했지만 의미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래?”
“누가 그런거 모르나... 라고 한거 같은데?”
“하긴... 모를 리가 없지.”

스코비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난 그 때 그 표정에서 왠지 모르게 할아버지같은 연륜을 느낀것 같았다. 하지만 곧바로 그 느낌은 사라졌다.

“그나저나 너 아수씨하고 뭔 얘기했어?”
“그냥 그 날 뭔 일이 있었는지하고 언니 어제까지 있었던 거 그대로.”

별로 특별한 얘기는 안한것 같다. 아니, 특별한데 내가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베젠트는 좀 불안하긴해도 예전처럼 돌아온것 같으니까 괜찮은건가? 아수씨는 서점에 언제 다시 올까?




아침에 베젠트가 방으로 들어오는데 얼굴이 심하게 초췌해서 놀랐다. 베젠트는 천천히 들어오더니 이불 위에 쓰러지듯 누우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 썼다...”
“예? 뭘요?”
“책...”

그러더니 순식간에 세상모르듯 잠에 빠져들었다. 흔들어볼려고했는데 스코비아가 소리 지르는 입모양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장난인데 너무 과잉반응하는거 아니야? 라고 속으로 투덜대려니 스코비아가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기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르켰다. 우리는 아무말없이 그대로 방에서 나와 서고로 들어갔다. 아침에 서고들어가는건 처음인것 같다. 평소보다 싸한 공기가 가슴을 파고드는게 색다른 기분이야. 평소 베젠트와 스코비아가 작업하는 책상으로 걸어가자 높게쌓인 반듯한 종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예전에 봤을때는 저 정도로 쌓여있지 않았는데?”
“쓴 건 보통 상자안에 보관했거든. 저렇게 놔둔걸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나봐.”
“엥? 뭐하러 읽어?”
“검토해야지. 검토.”

스코비아가 검지를 흔들면서 살짝웃으며 혀를 찼다. 이런 스코비아를 보고있으면 왠지 주눅이 든다.

“좋아. 나도 읽어볼까.”
“어? 너도?”

스코비아는 팔을 걷어붙이고 자기 책상에 앉아서 윗종이 한 장을 꺼내읽기 시작했다.

“이래뵈도 조수니까. 나도 봐야지?”
“그럼 나도 보자.”
“어? 너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 둘은 잠시 동안 정말 신나게 웃었다.




" 후우-"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위로 치켜드니 목에 뻐근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정신이 나갈정도의 아찔함을 느꼈다. 눈앞이 한순간 보이지않았다가 서서히 보이게되면서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는걸 깨달았다. 계산대를 봐야하는데 나가봐야 하는데 나가고싶지 않다. 그냥 잠시 이대로 앉아서 오랜만에 머릿속을 헤엄쳐보고 싶다. 아니 이미 그러고있다. 가만히 있기만하기 심심해서 콧노래를 불려보기 시작한다. 흐응~흠흠 흠흠흠~ 이런 기분 얼마만이지? 한참 그러고있다가 스코비아를 보려고하니까 자리에 없다. 언제부터 없었는지 알수없지만 지금 스코비아가 있고없고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건 음... 고마워, 베젠트.


그 날밤, 베젠트는 한번도 쉬지않고 그대로 글을 쭉 써내려가 마침내 완성시켰던 것 같다. 그 때 베젠트가 쓴 글은 잘못 쓴 글자도 꽤 있었고 가끔가다 줄이 틀려있기까지했지만 그 내용은 아주 잘 짜여져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왠지모르게 그 때 베젠트는 감정이 북받힌 상태에서 글을 쓴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것같다. 글은 놀랄정도로 객관적이었다. 양도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침에 일어나는데 내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스코비아가 아니란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느낌이 달랐다. 나한테 등을 돌리고 누워있었지만 입고있는 옷이 어제 저녁 베젠트가 입고있는 옷이라는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깨지않게 조심하면서 얼굴을 확인했더니 아니나다를까 베젠트였다. 스코비아는 이미 일어났는지 아니면 다른곳에서 잤는지 방안에 없었다. 방을 나와서 부엌에 들어가니 스코비아가 아침 준비를 하고있었다. 스코비아는 날 보자마자 “일어났어?”하며 말을 건넸다.

“베젠트가 왜 네 자리에서 잤어?”
"그게 술에 막 취해서 와가지고.“
”취해? 왜?“
”몰라. 아수 오빠가 데려왔는데 급한대로 눕혔지. 뭐.“
“아수씨가? 언제 왔는데?”

스코비아는 손가락 끝을 인중에 대고 잠시 생각했다.

“새벽 다 돼서 온 것 같은데.”
“다 큰 처녀가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왔어? 좀 어이없는데.”
“아수 오빠가 데리고 왔다니까.”
“아수씨는 돌아간거야?”

스코비아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결혼은 한 대?”“그건 안 물어봤는데.”스코비아는 손질이 다 끝난 야채들을 들고 부엌밖으로 나갔다. 나도 베젠트 일은 잠시 잊고 아침준비나 도와야겠다.

할아버지도 베젠트가 새벽에 들어온 걸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스코비아 혼자서 베젠트가 아수씨와 들어올때 나간것 같다. 베젠트는 점심이 지나 햇빛이 한창 강할 때가 돼서야 일어났다. 아직도 비몽사몽하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머리를 헝클어트린채로 계산대로 나왔다.

“할아버지. 어제...”
“일단 좀 씻고와라.”

베 젠트는 할아버지 말을 듣고 깨달았는지 나오다말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베젠트는 옷을 갈아입고 나름대로 얼굴을 정리하고 나와서 할아버지 옆에 쌓여있던 책더미 위에 앉았다. 저거 엄청 비쌀텐데 막 앉아도 되는거야? 베젠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애들이 뭐라더냐?”
“저같은 고아년이랑 지체높은 아드님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대요.”

고아년이라. 어째 남 얘기 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런 말을 하는데도 베젠트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것이 없었다.

“그 놈들. 여전히 그따위 생각으로 살고있는건가.”

“헤, 어쩔수 없죠. 저도 반쯤은 포기하고 가긴했지만...”

베젠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낄수있었다. 그 떨림은 점점 커져 이내 내 마음 깊숙이 닿았다. 할아버지도 그걸 알아채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베젠트가 평소와 다르지 않다고 느낀 것은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조그만 희망은... 가지고있었다고요. 아수가 고백하고....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까.... 계속 잘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고요... 으..흐윽...”

푹 숙인 베젠트의 얼굴 아래로 눈물이 떨어지고있는게 보였다. 언제부터 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을까.

“가자마자... 맞고 욕부터 들었...어요... 아수 부모님 얼굴도... 제대로 보지못했어요! 흐윽! 그냥! 그냥 내동댕이쳐졌다고요!”

할아버지는 별말없이 베젠트 말을 듣기만했다. 측은한 표정으로 베젠트를 보는 할아버지를 보니 왠지 처음부터 이렇게 될거란걸 알고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면 할아버지가 허락했으니 아들도 어쩔수없이 허락할 거라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수도 똑같아요! 제가 맞는걸 그냥 보고만 있고! 부모님 설득했다더니 전부 거짓말이었고! 할아버지도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그럼 이렇게 안됐을지도 모르잖아요!”

베젠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화를 막 내면서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정확히 날 꼬집어 얘기하지않았지만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걸 들으니 기분이 좋지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바로 자신에게 화내는 말을 들으면서도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초연하게 듣기만 하고있었다. 나는 밖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걸 보고 황급히 일어나 문을 닫았다. 그 사이 베젠트는 소리지르던 것을 멈추고 이번엔 입술을 깨물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난 내 자리로 돌아가지않고 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설사 할 수 있는게 있다하더라도 그런 기분이 들지않았을 것이다. 베젠트는 지멋대로야.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쓰지 않아. 하고싶은거 멋대로하고 멋대로 울어버리고. 뭐야 저게.

“그래, 울고싶으면 울어라.”

할아버지는 두손을 뻗어 베젠트를 품에 안아주었다. 베젠트는 그 상태로 한참동안 꺽꺽대면서 울었다. 저게 연륜에서 나올수있는 행동일거다. 나였다면 먼저 따귀를 때리고 욕했을걸.





베젠트는 그 날부터 방에 틀어박힌채로 지냈다. 잘 씻지도 않았고 밥먹을때도 나오지않아서 스코비아나 내가 직접 배달해줬지만 그 마저도 잘 먹지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끔씩 볼 때도 베젠트는 벽을 바라보고 누워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 동안 써오던 책은 말 그대로 중단되었다. 서고는 다시 스코비아 혼자서 지키게됐다.

“할아버지. 베젠트 언니 언제까지 저러고있을까요?”

할아버지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누운채로 눈도 뜨지않았다.

“글쎄, 내키고 싶을 때까지 저러고 있겠지.”

그 때 안쪽에서 스코비아가 걸어나오더니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아수오빠 보통 지금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 알수있을까요?”
“왜 그러냐?”

내 말에는 꼼짝도 하지않았던 할아버지가 눈을 뜨고 스코비아에게 시선을 줬다.

“얘기 좀 하고싶어서요.”
“아수씨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궂이 찾아갈 필요가 있나?
“그 날 언니가 나갔다왔을때부터 아수 오빠 서점에 안 오잖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릴려니까 답답하니까.”

아, 그러고보니까 벌써 꽤 오래됐는데 아수씨는 그 날부터 온적이 없지.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냐?”

스코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우물쭈물 서있기만 했다. 바보, 그냥 뭘할지 말하면 되잖아. 왜 저렇게 어정쩡하게 서있는거야.

“베젠트 언니 때문에요.”

좀 일찍 말하란 말이야. 할아버지는 잠시 아무말 없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광장 근처에 강있는 동네 알지? 거기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있으니까 가서 기다려봐라. 거긴 사람들이 많이 다니니까 운 나쁘면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네, 그럼 갔다올게요.”

스코비아는 할아버지와 내게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스코비아는 어린애가 놀러가는 것같은 표정을 짓고있었지만 나가는 모습이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그런데 베젠트 일인데 괜히 나섰다가 무슨 소리 듣는거 아닐까. 아니, 나보다 베젠트를 잘 아니까 내가 생각하진 말자.




서점 안이 좀 어질러져 있어서 정리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베젠트가 방에서 나왔다. 베젠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스코비안 어디갔어?”

보아하니 나오기전에 서고에 먼저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베젠트 얼굴이 생각보다 많이 야위어있었다. 하긴 그 동안 밥도 제대로 안 먹었으니...

“아수씨 만나러 나갔어요.”

느낌상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대는게 좋을 것 같지만 난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다. 베젠트가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빠르게 다가와서 깜짝놀라 넘어지고 말았다.

“아, 미안. 미안. 그런데 스코비아 언제 나갔어?”
“꽤 됐어요.”

바닥에 넘어지면서 맞은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

“나 때문에 스코비아가 귀찮은 일을 하게됐네.”

베젠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이상하게 여태까지 듣던 목소리보다 훨씬 또렷하게 들린것 같았다. 베젠트가 내 얼굴을 보더니 씩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할아버지가 누워있는 흔들의자로 걸어갔다. 내가 이상한 표정이라도 지었나?

“앙탈은 다 부렸냐?”
“하하...”베젠트가 힘없이 웃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