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얘들 이유는 몰라도 떠돌아다니는 것 같으니까 옛날 저라고 생각하고 일 좀 시키고 보살펴줘요. 저는 잠시 돌아다니다 올테니 걱정말고 밥은 제 때 드세요.. - 베젠트]
“베젠트... 글을 아네?”
“그렇네.”
우리는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나무문-나무가 대부분이었지만 중간중간 철도 있었다-의 옆에 있는 삐쭉 튀어나온 벽 뒤에 숨어서 베젠트가 준 종이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옛날 저’라니? 이건 무슨 뜻이지?”
“글쎄. 뭐,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않을까?”
스코비아는 역시 사소한 것은 신경쓰지않는 성격이랄까 그런 느낌이다. 내가 작은 것을 보면 스코비아는 큰 것을 보고있는 것 같다. 그런것이 우리 둘의 차이일까...
“하긴 글을 알고있는 여자가 세상에 리슈넬 언니만 있는건 아닐테니까.”
말을 하고 난 직후에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본 리슈넬 언니의 얼굴이 떠올라 우울해졌다. 스코비아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베젠트의 종이를 뺏어 자기 주머니에 넣은 다음 내 손을 잡고 “가자”하며 마을로 이끌었다.
마을은 정말이지 한마디로 엄청나게컸다. 산 중턱에서 봤을 때도 상당한 크기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안으로 들어오니 그 크기가 주는 위압감이 실로 엄청났다. 게다가 이 곳은 모든 집들이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지붕이나 문 같은건 나무였다- 심지어 바닥까지 돌이 깔려있었다. 흙이 보이는 곳은 처마 밑의 꽃이 자라고있는 곳같은 작은 공간같은 작은곳 뿐이었다. 우리는 회색 돌길을 따라 베젠트가 말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책이 쌓여있는 곳을 단 한군데 보았다. 하지만 그 가게의 크기가 생각보다커서 우리는 마을을 빙 둘려보았지만 다른 곳은 책을 쌓아둔 곳이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길에서 적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때 가게로 들어갔다.
“여긴 여자가 올 곳이 아니야. 얼른 꺼져.”
할아버지의 첫마디였다. 할아버지는 어두컴컴한 가게안에서 촛불을 하나 밝히고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촛불의 엷은 빛으로 할아버지는 붉으스름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얼굴에 자욱한 주름과 가슴까지 오는 긴 수염 때문에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어두운 가게 모습과 사방을 꽉 채운 건조한 종이냄새 때문인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들은 할아버지의 말에 아량곳않고 가게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할아버지는 이내 얼굴을 찡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할 때, 스코비아가 앞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베젠트 언니가 보내서 왔어요.”
할아버지의 얼굴에 한순간 놀라움이 떠오르더니 곧바로 가라앉았다. 스코비아는 주머니에서 베젠트가 줬던 종이를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종이와 우리들을 번갈아보고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 써있는 내용이 그리 길지않았기 때문에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가 글을 읽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눈의 움직임이 수차례 처음부터 읽고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뭐가 의심스러워서 저렇게 꼼꼼히 살피는걸까. 하긴 나라도 처음보는 사람이 우리처럼 행동하면 저럴 것 같지만.
"집을 나왔느냐?"
"아니요."
베젠트가 자꾸 가출소녀 가출소녀 노래를 부르던것이 생각나서 말을 듣자마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수염을 쓰다듬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따라오거라."
우리들은 말없이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춘 곳은 가게 깊은 곳의 작은 방이었다. 방은 여관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는데 한쪽에 옷장과 탁자가 갖춰져있었다.
“베젠트 방이지. 베젠트가 올 때까지 너희들이 써라.”
할아버지는 탁자 서랍을 열더니 가슴을 다 덮을 만한 두꺼운 종이를 한 장 꺼내서 스코비아에게 줬다.
“일을 하려면 이걸 써야해. 보면서 일해도되지만 외워두는게 편할 거다.”
말투한번 대게 무뚝뚝하네... 나는 스코비아가 든 종이를 흘쩍 살펴봤다. 종이에는 책 이름으로 생각되는 여러 단어들이 빼곡이 적혀있었다. 스코비아가 그 종이를 넓게펴서 훨씬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개중에는 우리가 봤던 책 이름도 적혀있었다. 우리가 그 단어들을 눈으로 흩고있으려니 할아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일단 너희 치마부터 갈아입어라. 베젠트 옛날 옷이 있을거다.”
그제서야 우리들은 서로의 치마를 내려봤다. 새빨간 산딸기 물이 아직까지 그대로 베어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옷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닌 거였네? 이거 참...
우리는 다음 날부터 서점의 보이지않는 곳에서 일을 했다. 우리는 일단 서점 뒤편에 있다가 할아버지가 와서 종이에서 어느 책의 이름을 찍어주면 그 책을 서고에서 찾아오는 역할을 맡았다. 서고에는 책들이 글자순으로 배치되어있어서 책을 찾기는 아주 쉬웠다. 하지만 스코비아와 의논한 끝에 우리는 글자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고, 그 때문에 책을 일찍 찾았으면서도 잠시동안 서고에서 시간을 죽이다 할아버지에게 책을 갖다주었다. 책을 갖다주지 않을 때는 서점 구석에서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청소를 했다. 하지만 청소는 우리가 사람들 눈에 띄인다고해서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책을 가져오라고 시킬 때 일부러 글자를 기억하는 척하면서 오랫동안 들여다보거나 서고에서 빈손으로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책을 가져오기등 나는 내가 글자를 안다는 것을 숨기기위해 노력했다. 물론 스코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가져오는 시간동안 서고의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는 수도없이 많았다. 하지만 읽어보려해도 머리 속에 자꾸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리슈넬 언니가 떠올라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리슈넬 언니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이렇게 편안히 있는것도 위태위태 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서고에서 멍하니 있다가 나오기만을 반복했다. 조용한 서고 안에 있으면 어디선가 들리는 바람소리가 무료함을 달래줬다.
할아버지가 저녁밥을 먹다가-밥은 따로 있는 할아버지 방에서 먹었다- 말했다.
“책 가져오는건 한 사람이 해도 될것같으니 내일부터 한명은 나랑 같이 밖에서 장사를 하는건 어떠냐?"
그 말에 나와 스코비아는 먹던 것을 멈추고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숟가락으로 할아버지를 가르치며 물었다.
“할아버지, 여자는 서점에 있으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질문하자마자 나온 간결한 대답에 그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한테 책을 팔 수 있어요?”
“둘 다 하라는게 아니야. 한명만 하면 돼.”
“엉뚱한 대답은 하지마세요.”
말투는 무뚝뚝해도 할아버지의 행동으로보아 정이 많은 사람이란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 며칠동안 서점에서 일해오면서 우리들과 할아버지는 나름대로 친해질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밥을 입속에 집어넣은 다음에 방금 전보다 훨씬 느긋하게 반찬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느 순간에 스코비아도 느긋하게 밥을 씹고있었다. 두 사람이 이러면 내 마음속에선 불이 일어나지!
“할-아-버-지이-!”
내가 이를 바득바득갈며 노려봐도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음식을 씹더니 드디어 목구멍 아래로 내려보냈다.
“여자가 서점에 오는 건 안되도 서점에서 일하는건 상관없어.”
이게 왠 해괴망측한 논리? 할아버지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덧붙였다.“왜냐면 내 서점이기 때문이지. 할아버지는 그 울창한 수염 사이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면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때 스코비아가 수저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으응. 뭐냐.”
“그거 긴히가 하는 게 나을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스코비아 쪽으로 손을 마구 흔들어 강한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스코비아는 내 손을 바라보면서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구맙구나. 실은 나도 긴히가 하는게 나을거라 생각했어.”
곧바로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 얼굴에 갖다댔다. 할아버지 눈과 잠시동안 일대일로 대치했는데 이상하게도 눈싸움에 진건 나였다. 얼굴이 뜨거워지는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눈을 제대로 보지못하고 밑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다. 베젠트도 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