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비가 세차게 오기시작했다. 오늘은 마을에가서 먹을 것도 좀 사고 옷도 수선하기로 했던 날인데 비가 이렇게오면 마을 가는 길 중간의 강이 불어나서 가지못하게된다. 우리는 집에 남아있던 음식과 텃밭에서 딴 적은 수의 과일들로 얼마간 지냈지만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고민하던 리슈 언니가 옷을 챙겨입고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깜짝놀라 언니에게 달러갔다.

“리슈 언니, 이렇게 비가 오는데 나갈려고요?”

“이런 날씨 속에 나갔다오는것도 왠지 재미있을거 같지 않아?”

리슈 언니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지만 이렇게 비오는날 나갔다가 강에서 큰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언니는 내 표정을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마. 맨날 다니던 길이고 얕은 곳이 어디인지도 아니까.”“그래도...”

“리슈 언니. 저도 가면안되요?”

스코비아가 어느새 나갈 옷을 입고 리슈 언니 옆에 섰다. 언니는 스코비아를 보고 깜짝놀라더니 스코비아의 옷을 손수 벗겨주었다. 스코비아는 뚱한 표정으로 언니를 쳐다봤다.

“저도 이젠 다 컸는데...”

“그래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어요. 스코비아양!”

리슈 언니는 스코비아의 이마에 손가락을 살짝 튕기고 문 밖으로 나갔다. 언니가 나가고 스코비와 나 둘만 남게되자 내가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도 가슴도 나오고 키도 리슈 언니만큼 컸는데 왜 어른이 아니란 거지?”

스코비아는 아무말없이 그저 한숨만 쉬었다. 우리끼리 얘기해봤자 아무것도 되지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도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않고 못다 읽은 책을 펼쳤다.

저녁 늦게까지 리슈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도 스코비아도 불안해서 옷을 챙겨입고 강가로 나갔다. 강은 물이 불어나서 엄청난 기세로 흐르고 있었다. 저기에 잘못빠지면 그대로 떠내러갈꺼야. 우리는 그나마 강물이 얕은 곳을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물이 너무 불어나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머리 속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막 뛰기 시작한다.

나는 강 주변을 막 돌아다니면서 어디엔가 리슈언니 흔적이 남아있기를 빌었다. 하지만 조그만 흔적이 남아있기엔 강물이 거셌고 비도 너무 많이 왔다. 스코비아는 그저 멍하니 강을 쳐다보기만하고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도와줄 생각은 안하고 저게 뭐하는거야? 혼자서 강 이곳저것을 돌아다니다 그나마 물이 얕은 곳을 발견했다. 침을 넘기고 발을 조금 넣자마자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해서 곧바로 빼냈지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진흙이 옷에 덕지덕지 묻어 더려워졌다. 이젠 나도 아무것도 하기싫었다.

“마중나왔어?”

리슈 언니 목소리가 들려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는 강 건너편에서가 아니라 강 윗편-내 쪽에서 보기에는-에서 양손에 짐을 든채 걸어오고 있었다. 안도와 함께 눈물이 나오려는걸 애써 참아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돌아오느라고. 너무 늦어서 미안해. 그런데 너 옷이 왜 이러니?”리슈 언니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하자 나도 어쩔수 없이 언니의 표정을 따라지었다. 스코비아는 아까 서있던 그 곳에 그대로 서있었다가 우리가 걸어가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바람이 차가워져 밖에 나가기 껄끄러워 지던 날이었다. 더운 날에 입었던 얇은 옷들을 정리하고 점점 서늘해지는 날씨에 맞춰 모두 옷을 새로 갈아입었다. 어느 때부턴가 나와 스코비아만 마을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 날도 나와 스코비아 둘이서 리슈 언니에게 얘기하고 마을로 놀러 나왔었다. 우리는 마을에 사는 또래들은 가끔씩봐서 얼굴만 겨우 기억할 정도였으며 더욱이 그 애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그냥 구경하면서 시간 때우기다. 어느 때는 시장에 가서 음식재료만 보고오기도 했고 새로운 상점이 생기면 그 근처에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을 파는 서점이었다. 작은 서점이 여러 상점들의 중심 쯤에 있었기에 우리는 왔다갔다 하면서 서점에 쌓여있는 책들의 제목을 훔쳐보았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리슈 언니가 항상 ‘밖에서 글을 모르는 것처럼 해.’라고 말해뒀기 때문이다.

스코비아는 리슈 언니의 말을 아주 잘 들었지만 나는 그게 좀 마음에 들지않았다. 때문에 항상 스코비아가 뭐라 할 때까지 책 제목이나 벽에 붙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않았다. 그 날은 눈에 띄는 단어가 적인 전단지를 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의 한 쪽벽에 붙어있던 종이였는데 맨 위에 적힌 글이 [여자와 다른 점]이었다. 그 아래에 있는 글은 스쳐지나가느라 보지못했다. 스코비아는 그 종이를 아예 못본건지 무시하는건지 관심을 보이지않았지만 나는 그 글 내용이 궁금해서 머리 속이 온통 그 종이로 가득찼다.

마을에서 뭘 한건지도 모른채 스코비아에게 끌려다닌 것 같았다. 땅거미가 지기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난 그 종이를 잊을 수 없었다. 난 걸음을 멈췄다.

“스코비아, 나 잠깐 마을에 다시 갔다올게.”“어? 아까까지 계속 있었잖아.”

“그냥 갑자기 생각난게 있어가지고.” 그 말만 툭 던지고 바로 뒤돌아서 마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스코비아의 목소리가 바람에 떠밀려 날아갔다. 치마가 펄럭거려서 두 손으로 움켜잡아야했다. 벌써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종이를 보려고했지만 이미 어두워져가는 태양 아래서 보기란 무리였다. 결국 나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고 결국엔 종이 바로 앞까지 가버렸다.

난 아직도 그 종이에 써있는 내용을 잊지못하고 있다. 여자를 동물과 동급으로 여기며 여자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그 글의 내용을 난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글을 자기들끼리 돌려보면서 여자들을 비웃고 있을 남자들에 대해 미칠듯이 화가 났다. 화를 참으며 끝까지 다 읽었을 때야 나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그 종이를 보고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가려고 종이에서 시선을 떼니 그제서야 나를 보고있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되었다. 서둘러 길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이 너무 불어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 틈새를 겨우 비집고 나와 집을 향해 달렸다.

“긴히야, 너 뛰어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리슈 언니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마을에서 집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그대로 달려왔기 때문에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은 거칠대로 거칠어져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괜찮다고 표현한 다음에 항아리에서 물을 한컵 떠서 마셨다. 물은 미지근했다.

며칠 뒤 리슈 언니가 마을에 가면서 우리들을 불렸을 때 나는 가지않았다. 때문에 리슈 언니와 스코비아 둘이서 마을을 다녔다. 둘이 마을에 갔을 때 나는 집 뒤 나무 밑 그늘에서 쉬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 잘못도 없었다. 리슈 언니가 맨날 밖에서는 글을 아는척하지 말라고 해서 그걸 어긴 것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자 속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훨훨 날아가 몸이 아주 가뿐해졌다. 리슈 언니 말을 어긴 건 미안했지만 그래도 내가 죽을 죄를 지은건 아니었다. 나는 집 안에들어가서 이불밑에 숨겨두었던 예전에 읽었던 왕자의 모험 얘기 책을 들고 그 자리에 앉아서 한번에 끝까지 독파했다.





그날 밤 잠을 다가 깨보니 집안이 몰래 들어온 달빛 때문에 낮처럼 밝게보였다. 잠을 잘못 잤는지 오른쪽 어깨가 결려서 잠을 청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집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나를 환영했다. 집 주변을 한 번 돌기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공기를 몸 속 깊숙이 한번 밀어넣었을 때 큰 나무 밑에 누군가가 있는 걸 발견했다. 주변이 환해서 그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슈 언니였다. 긴 나뭇가지를 하나들고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내가 다가갈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리슈 언니?”

언니가 ‘어’ 소리를 내면서 뒤돌아 보더니 이내 평소의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언니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가갔다.

“리슈 언니, 여기서 뭐해요?”

“그냥 잠이 안와서 나와 봤더니 나뭇가지가 떨어져있네?”

리슈 언니는 손목만 움직여 나뭇가지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서 되물었다.

“그게 어쨌는데요? 그냥 떨어진 거잖아요.”

“아니야. 여길 봐.”리슈 언니는 나뭇가지를 한바퀴 돌려잡아 방금 전까지 손으로 잡고있던 부분을 내게 보여줬다. 그 부분은 가지가 줄기에 붙는 부분이었는데 아주 매끈한 모양을 하고있었고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냥 그렇다보다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충격을 받은것 같이 뭔가를 깨달았다. 그 나뭇가지는 그냥 보기에 멀쩡히 살아있는 나뭇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멀쩡한 나뭇가지가 무언가에 뜯기거나 부러져 떨어진 게 아니고 멀쩡한 모습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이건 나무가 말을 하는 거야.”

리슈 언니는 검지와 엄지로 내 쪽의 가지 끝부분을 문지르면서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이제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거지.”

“무슨 뜻이예요?”

“곧 죽는다는 거야.”

죽는다는 말에 내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지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 잠시동안 침묵이 우리 사이에 펼쳐졌다.

“그런데 이 나무 멀쩡하잖아요. 겨우 가지 하나 떨어진 것 때문에 죽거나하진 않으니까...”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이 가지는 그런게 아니야.”

리슈 언니는 다시 몸을 돌려 나무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지하나 떨어졌다고 나무가 죽는 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비록 저 나뭇가지가 아직 생생하긴 해도 언제 마를지 모를 것이고, 저 큰 나무 중에 여러개 달러있는 가지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리슈 언니가 아는게 많기는 하지만 이번 만큼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갑자기 언니가 또 다시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그런데 안자니? 이런 추운밤에 오래있으면 감기 걸려.”

“저보다 오래 나와있는 불량 어른에게 그런 말 듣긴 싫네요~”

팔장을 끼고 장난스럽게 비꼬듯 대꾸하자 리슈 언니가 피식 웃으면서 나뭇가지로 내 머리를 살짝 때렸다. 물론 하나도 아프지않았고 나도 언니도 기분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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