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슈 언니는 책을 언제나 숨겨났었다. 그 장소는 언제나 우리가 상상치 못한 곳이었다. 하루는 스코비아를 억지로 설득해서-얘는 이런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와 함께 기를 쓰고 찾아내려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리슈 언니는 우리가 책을 원할때면 항상 친절하게 꺼내주었다. 그 장소는 천장 위 일때도 있었고 주방 찬장일 때도 있었고 혹은 항아리 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장소는 항상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보통 낮에는 우리가 깨어있었고 언니도 우리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책을 옮기는 일 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밤에 책을 옮긴다고 생각하고 새벽까지 잠을 안자고 버텼던 적이 있었다. 그 날 난 아무런 소득도 없이 아침부터 머리만 어지럽다가 점심 쯤에 밥을 먹다 다음날까지 자버렸다.

 집 밖에서는 책을 읽지 못 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우리가 책 읽는 것을 보면 큰일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리슈 언니는 완벽한 이유를 원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긴히야. 세상에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일이 있어. 우리같은 여자들이 책 읽는 것도 그 중 하나야.”

“어, 그러면 전 나쁜 앤가요? 해서 안될일을 했으니까?”“아니, 긴히는 나쁜 애가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거야.”

“뭐예요. 그게. 세상은 참 이상하네요?”“

"그래, 세상은 참 이상해...”

그 렇게 말하는 리슈 언니의 얼굴은 왠지 쓸쓸해보였다. 내가 ‘어’하면서 언니를 바라보는 순간 따뜻한 두팔이 내 몸을 속에 품었다. 그 품 속은 어느 때와 다르게 미묘하게 뜨거웠다. 언제나 나를 기분좋게 해주던 따듯함이 그 순간만큼은 숨이 막힐 만큼 뜨거웠다.

 

   

집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은 상당히 주의를 기해야만 했다. 리슈 언니 집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있기는 했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 상인들도 지나가다 집을 가끔 방문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재빨리 책을 감추고 다른 일을 하는 척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해야하나 불평도 많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이 되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간이 걸려도 많은 책을 읽을수 있었다.

 “스코비아. 이거 봐라? 온 세상에 물만있는 곳이 있대.”

 “물만있어? 에이, 말도 안대.”“아니야. 여기 읽어봐. 여기 써 있잖아.”“헤에. 진짜네.”

“언제 한번 가보고 싶다아.”

 언젠가 한번 가볼 수 있겠지? 물만 있는 곳. 그 근처에 집을 옮기면 리슈 언니가 매일 물길러 다니지 않아도 되잖아.

 

 

 

몇 년이 지났다. 그 동안 나와 스코비아는 첫 생리를 경험했고 가슴도 조금 부풀어 올랐다.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올 정도로 자랐고, 키도 리슈 언니 목까지 올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우리 둘다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쓸수 있게 되었다.

집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 나는 이대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두려워졌다. 따지고보면 리슈 언니는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어릴적 추위에 떨고있는 우리가 불쌍해서 데려와 같이 살게해줬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식사나 빨래등 집안일을 셋이 놔눠서 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와 스코비아는 돈을 벌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마을에 가서 사오는 찬거리를 우리는 그냥 얻어먹기만 하는 셈이었다. 나는 몇날몇일동안 그 생각에 잠을 설치고 그래도 마음이 답답해서 하루는 텃밭을 정리한 다음 나무 그늘에서 쉴 때 리슈 언니가 자리를 비웠을 때 스코비아에게 이 얘기를 했다.

“스코비아, 우리 언제까지 리슈 언니랑 같이 살 수 있을까?”“뭔 소리야?”“우린 리슈 언니 가족이 아니잖아. 게다가 돈같은것도 한푼도 안 벌고 있고... ”무언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으음~ 그런데 긴히야. 리슈 언니도 가족이 없는 것 같잖아? 우리 여태까지 언니랑 살면서 언니 가족은 한번도 못 봤잖아. 얘기도 못 들었고.”“맞네. 그럼 우린 가족 대신인걸까?”

“그것까진 내가 알아낼 방법이 없고.”스코비아는 옆머리를 뒤로 쓸어내면서 등을 나무에 기댔다.

“그렇게 걱정되면 리슈 언니한테 한번 말해보는게 낫지않아?”

나는 딱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스코비아가 방금 한 말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잘못되서 리슈 언니와 살 수 없게되면 어떻게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난 결심했다. 괜히 말을 꺼내 언니와 함께 살 수 없을 바엔 그냥 나혼자 잠자코 있으면 계속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답이 보이지않는 혼자만의 근심이 풀리지않는채 가만히 있기란 참 어려웠다. 그럴때마다 차가운 물을 마시며 속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코비아에게 그 말을 한 뒤로 나는 스코비아가 내가 한 말에 신경을 쓰고있나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스코비아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않았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말하고 어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괜히 스코비아가 미워졌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 고민을 같이 공유하고 싶었지만 스코비아는 그럴수 없었다. 스코비아는 아무런 걱정도 없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해하려 들지않았다.

 

밤에 자다가 속이 쓰라려 잠에서 깨버렸다. 냉수를 한잔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는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잠은 안오고 쓰라림만 더 커져 참을 수 없다. 다시 냉수를 따라 마시고 스코비아와 리슈 언니가 깨지않게 조용히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검은 하늘 한켠에서 초승달이 희미한 빛을 냈고 주변으로 별들이 흩뿌러져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를 느끼면서 발목까지 올라오는 풀들을 스치며 집 주변을 크게 빙빙 돌았다.

처음에는 배가 쓰라려 인상을 쓰고 걸었는데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나중에는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달을 올려다봤다. 몽롱한 달빛을 눈에 한가득 채우면서 차가운 밤공기를 몸 깊숙이 들이삼켰다가 밖으로 내보냈다. 몸 속에 떠돌고 있던 잡스런 생각들이 몸밖으로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한참동안 달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머리 속이 완전 빌 때까지 몇십분이고 그렇게 서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춥다는 걸 느끼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서있었다. 그렇게하니 이전보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가 이불 안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침이 되고 점심이 되면 어김없이 그 생각들이 들어 계속 고민했다. 나는 잠이 안오는 밤이면 밖으로 나가 밤공기를 쐬고 돌아왔다. 그렇게하면 적어도 아침까지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않아도 되었다.

 


바람이 기분좋게 불던 날이었다. 리슈 언니가 평소에 잘 사오지않던 과일과 음식재료들을 한 무더기 사왔다. 근처 산책나간줄 알았던 언니가 밖에서 문을 쿵쿵 두드리며 부르길래 뭔일인가하면서 문을 열었더니 빵빵한 푸대자루를 가슴에 안고 서있는 것이었다. 나와 스코비아는 놀라면서 그 푸대자루를 옮겨 받았는데 무게가 정말 상당했다. 리슈 언니가 탁자옆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는 사이, 우리는 그 푸대자루 안에 있는 과일가 재료들을 주방 도구 옆에 꺼내놓았다.

“언니, 이게 다 뭐예요?”스코비아가 사과를 한아름 꺼내면서 물었다. 리슈 언니는 의자가 거의 넢어질 듯 뒤로 젖힌채 숨을 정리했다.

 "우리 동생들 생일 축하 해주려고.”

“예?”

우리 둘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억양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오히려 리슈 언니가 더 놀란듯 눈을 껌벅이더니 의자를 바로 세우고 몸을 돌려 두팔을 등받이 위에 올렸다.

“우리가 같이 산게 몇 년인데 아직까지 생일도 모르잖아? 그래서 오늘을 너희들 생일로 하려고. 가족끼리 이런것도 안하면 어떻게 하니.”나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리슈넬 언니는 우리를, 나를 이미 가족으로 받아줬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 동안 혼자서 속으로 끙끙앓던 것이 부끄럽고 속상했다. 내가 아무말 못하고 있을 때 스코비아가 재료를 계속 꺼내며 말했다.

“그럼 리슈 언니. 언니도 생일 축하 한 적 없으니까 같이해요.”“아니야. 난 생일 같은거 없어.” 리슈 언니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돼. 생일 없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하고 스코비아가 대꾸하자 언니는 그냥 살며시 웃기만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셋이 같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재료를 썰었고, 스코비아는 재료를 씼었고, 리슈언니는 실질적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수많은 음식을 만들어놓고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창가옆 탁자에 옮겼다. 자리가 부족해서 접시들을 겹쳐서 겨우 모든 음식들을 올릴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그 수많은 음식을 보면서 과연 다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무겁게 고개를 들었더니 스코비아와 리슈 언니도 나와 크게 다르지않은 고민을 하고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 우리가 정성스레 만든 요리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이 엄청 났던 지라 결국엔 다 먹지못하고 우리 셋은 뻗어버렸고-스코비아는 거의 토할 뻔 했다.- 그 음식들은 3일에 걸쳐 놔눠먹어야했다.

그 날부터 난 아무이유도 없이 리슈 언니가 어느 돈 많은 귀족집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서 돈을 계속 부쳐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이런 마을에서 떨어진 집에서 사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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