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들이 대여섯명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들은 모두 허리춤에 긴 칼을 차고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들은 집안을 둘러보더니 리슈 언니를 바라봤다.
“남자는 없나? 여자들만...”
“무슨 일이죠?”
리슈 언니가 일어나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남자들중 맨앞에 있던 덩치가 큰 사람이 리슈 언니를 기분나쁜 표정으로 오랫동안 내려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동안은 남자들도 우리들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입을 움직여 목소릴 낸 사람은 그 남자였다. 남자의 표정은 매우 불쾌한듯 일그러졌다.
“남자가 하는 말을 끊다니...”
나와 스코비아는 그 남자의 낮고 거칠은 목소리에 위축되버렸다. 하지만 리슈 언니는 달랐다.
“남의 집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행패..”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언니의 뺨을 후려쳤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리슈 언니의 목이 순식간에 꺽이고 몸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언니는 고개를 들어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슨 표정이었을까. 남자의 얼굴이 더욱 더 일그러지더니 이번에는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 리슈 언니가 휘청거리면서 벽에 부딫혔다.
“뒤져봐!”란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남자들이 집안에 들어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조리 뒤업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엇을 찾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집안을 들쑤실수록 무언가가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리슈 언니가 처음에는 우리들에게도 숨겼고 우리가 알고나서도 항상 꼭꼭 숨겨두었것들...
“찾았다!”
그것은 책이었다. 책들은 어미 없게 물 항아리 바로 옆 항아리 옆에서 나왔다. 평소라면 절대 그런 곳에서 나오지 않을 책들이 이상하게 그 날은 그 곳에 있었다. 남자들은 그것들을 두 손에 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리슈 언니를 돌아봤다. 언니는 화를 내지도 체념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날 우리들은 남자들에게 잡혀 마을 중심에 있던 커다란 하얀 돌로 만들어진 건물로 끌려갔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돌로 만들어지고 가장 커서 언제나 들어가보고 싶어했지만 항상 입구에 경비들이 서있어 근처도 가지못했던 바로 그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이런식으로 들어가게되어 기분이 아주 착잡했다.
우리는 건물안에서 지하로 끌려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하얀 색이었던 벽이 사라지고 점점 공기가 차가워지더니 검은 벽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우리는 쇠를 일자로 여러개 엮어만든 문-중간중간 가로로 된 것도 있었다- 앞에 도착했다. 그 문 앞에는 책상하나를 덩그러니 놓고 앉아있는 살이 덕지덕지 붙은 뚱뚱한 남자가 있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소리없이 기분나쁘게 웃었다. 아까전 리슈 언니를 때렸던 남자가 그 남자에게 뭔가를 보여주더니 뚱뚱한 남자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일어나 쇠문을 열었다. 우리는 그 문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니 네갈래 길이 나타났다. 남자들이 리슈언니를 앞길로 끌고갔다. “리슈언니!” 스코비아가 소리치자마자 스코비아를 잡고있던 남자가 뺨을 후려쳤다. 스코비아가 놀란 눈으로 그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서슴없이 다시 한번 뺨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비아는 남자에게 꼬리를 내릴 기미를 보이지않았다. 남자는 계속 스코비아의 뺨을 쳤다. 앞길로 끌려가던 리슈언니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긴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않는다. 리슈 언니 제발 그러지마. 그러다가 또 맞으면 어떻해.
“그만하고 가자.”
나를 잡고있던 남자가 그 남자를 제지했다. 스코비아는 고개를 숙이고있었고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할수 있는게 없었다. 우리는 왼쪽길로 걸어갔다. 얼마쯤 걸어가니 복도 좌우에 나무로 만들어진 문들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빽빽하게 붙어있었다. 우리는 그 나무문들 중 하나에 밀쳐졌다. 문이 닫기자 얼마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축축하고 고약한 냄새가 방 안 전체에 풍기고 있었다. 바닥은 차갑고 딱딱한 것이 돌같았고, 미끌미끌하고 물기가 있어서 치마가 젖어 기분이 나빠졌다.
“스코비아, 괜찮아?”
“괜찮아...”
대답에 힘이 없었다. 하긴 그건 나도 다를게 하나 없었다. 아니. 나는 스코비아보다 더 힘이 없었다. 나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방안의 윤곽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방은 나와 스코비아가 서로 끝에 앉아있으면 발이 거의 닿을 만큼 좁았다. 게다가 벽과 바닥이 아주 차가워서 엉덩이와 등에 한기가 들 정도였다. 문 반대편 중앙에는 구멍이 나있었는데 그곳에서 지린내와 악취가 올라왔다. 그 구멍이 바로 변소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가 서로 몸을 붙였다. 그리고 그 추웠던 겨울 날 밤처럼 서로 꼭 껴안았다.
“리슈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스코비아가 힘없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동안 생각을 해야했다.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뭔가 큰 일이라도 당하고 있는게 아닐까? 이제 서로 영원히 보지못하는건 아닐까? 그 사람들이 언니를 또 때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런 대답도 찾아내지 못하고 나는 그저 스코비아를 더 세게 끌어안기만했다.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말한 나쁜 일이란 것이 대체 뭘까... 방안은 창문이 없어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었다. 완벽한 어둠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들리는것은 스코비아와 내 숨소리. 느껴지는것은 스코비아의 체온. 그리고 지독한 악취를 맡으며 우리 둘은 그 자리에 죽은듯이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무언가 안으로 던져지고 다시 닫혔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에 알 수 있었다. 리슈넬 언니였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언니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었다. 손에 닿는 느낌으로 언니 옷이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고 상처가 많이 나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언니 몸에서는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했다.
“얘들아...”
언니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작아 나는 얼굴을 언니 입에 가까이 댔다.
“미안해...”
그 한마디 말에 눈물이 터져나오더니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건지, 왜 언니가 이런 말을 해야하는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스코비아가 언니의 머리를 들어 무릎위에 올렸다. 언니는 손을 들어 스코비아의 얼굴을 쓰다듬고 내 얼굴도 쓰다듬어줬다.
“얘들아, 언니 말 잘 들어.”
리슈 언니는 숨을 고르고나서 말을 이었다.
“언니가 부탁 하나 할게.”
그제서야 눈치챈건지 그 순간 그것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느껴 오른쪽을 돌아봤고 그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온몸에서 푸르스름한 옅은 빛을 내는 거대한 동물이었다. 생긴것은 흡사 개와 비슷했지만 개보다 더 사나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온몸을 감싼 털에서는 윤기가 흘렸다. 그것은 하체를 내려 앉아있었는데 얼굴 높이가 내 얼굴 높이와 거의 일치했다. 내가 바라보자 그것이 나와 눈을 잠깐 마주치더니 리슈 언니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는 생전 처음보는 그 동물에게서 눈을 떼지못했다. 그리고 방이 넓어져있었다. 스코비아와 내가 끝에서 끝에 앉아있어도 서로 닿을 것만 같았던 방이 어느 사이엔가 그 전의 두배는 커져있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동물이 하체를 들어 네발로 서서 등을펴고 우리들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리슈 언니를 바라봤다. 동물의 몸에서 나는 약한 빛 덕분에 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언니는 얼굴에 멍이 심하게 들었고 여기저기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리고 왼쪽 눈을 감고있었는데 그 감은 자리가 심하게 붓고 피가 흘려내리고 있어서 보는 순간 머릿속이 텅비어버렸다.왜 저걸 이제 봤을까. 언니 눈은 괜찮은걸까? 하지만 그 상처 속에서도 리슈 언니는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언니... 눈이...”
스코비아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언니의 손이 스코비아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감정이 내 속안에서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언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언니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비틀거리며 한쪽 벽에 몸을 기댄채로 일어났다. 우리는 달리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리를 키워준 언니, 자주 품안에 안아주었던 언니, 우리에게 글을 가르쳐준 언니, 우리 고민을 들어주었던 언니, 요리를 해주던 언니, 같이 텃밭을 가꾸던 언니, 어머니 같았던 언니. 그 언니가 말하고 있었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들어줘.”
나와 스코비아는 동물의 등위에 올라탔다.
“몸을 낮추고 꽉 잡아.”
내가 앞에 올라타있어서 몸을 납작 업드려 동물의 목을 잡았고 스코비아는 내 허리를 잡았다. 치마가 거추장스러워 무릎 위까지 접어 올려야했다. 옆에 서있는 언니를 올려다봤다. 언니는 그 상처투성이 얼굴로 웃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언니의 양손이 나와 스코비아의 눈가를 스쳐지나갔다.
“잘 지내야된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어느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좌우로 스쳐지나갔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푸른 동물은 한참을 달리다가 겨우 멈춰섰다. 그 곳은 사방이 발목까지 오는 풀로 무성한 어느 산 중턱이었다. 동물의 등에서 내리니 산 아래에 보이는 커다란 마을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보아왔던 마을과는 크기에서 비교가 안되는 커다란 마을이었다. 마을은 커다란 원으로 된 벽에 둘러싸여 안으로는 집들이 빼곡하게 있었고, 밖으로는 마을에 이어진 길 주변으로 집들이 보였다. 나는 처음 본 몇초동안은 그 모습에 넋을 잃었지만 이내 내가 처한 상황이 떠올라 곧바로 우울해졌다.
그 때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옆에 무언가 떨어졌다. 옆에는 푸른 동물이 있었고 그 밑에는 주먹만한 주머니가 떨어져있었다. 동물과 눈을 마주치고 곧바로 주머니로 눈을 돌려 그것을 손에들고 열어보았다. 그 주머니 안에는 방금 전의 짤랑 소리를 증명해주듯 돈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것도 내가 여태까지 본 동전들 중에 가장 많은 수가, 아니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놀란 나머지 주머니를 놓칠뻔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푸른 동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채 스코비아를 찾았다. 스코비아는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대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퉁퉁불어버진 눈가를 문지르며 돈 주머니를들고 스코비아에게 다가갈려다 깜짝 놀랐다. 스코비아는 눈 앞에 보이는 커다란 마을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나이를 많이 먹은 어른이나 풍길법한 그런 분위기를 내고있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에서는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위엄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늘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갔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남자들, 좁은 감옥,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온 리슈 언니, 은빛 동물, 그리고 다른 사람같은 스코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