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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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판문점 선언과 북미 정상회담, 북한 비핵화와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

남북과 북미 정세 평화 축으로 급격히 전환,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꾸준히 들려오는 교류와 소통. 


통일 농구 대회에 이어 이번에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북한 영화가 상영되는 문화 교류의 물꼬가 틔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성급한 낙관론을 경계한다고 해도 성과는 성과, 진전은 진전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북한에 관련된 건 모두 금지되었던 시대, 평화로 이어질 일말의 가능성을 붙들기보다 팽팽한 대결 구도 극단에 있는 전쟁을 이야기하던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음이 오히려 생소하기만 하다. 


 "이렇게 쉬웠는가?"

남북 정상이 만나 손을 맞잡던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머릿 속으로 흘려낸 말이었을까.

모든 갈등의 이면에 이권과 속셈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음이 얼마나 또렷이 드러났던가.


시민의 삶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그 모든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북한 영화는 <불가사리>라고 한다. 

바다에 사는 별모양의 기묘하고 신기한 생물 불가사리 이야기는 아니다.

전설의 동물로 쇠를 먹고 자라며, 이 영화에서는 전쟁을 위해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는 왕을 무찌르는 활약을 한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사람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는 걸 택할만큼 마음씨까지 곱다는 소문이다. 생긴 건 안 곱

 참고로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는 죽여도 죽지 않는다는 '불가살'에서 그 이름이 생겼단다.


이번에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북한 영화는 9편으로 특별한 신청 절차 없이 영화제에서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체제 찬양이나 영웅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던 과거와 달라진 점은 디테일하게 개인의 삶을 들여다 본다는 점이라는데,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계속되어 영구적인 평화에 닿기를 바란다. 


다른 세계로 시선을 옮겨 보자.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다. 

이라크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이유, 평화 유지를 근거로 한 국제법상 합법적인 침공이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제거 후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이라크에서 철수한다. 

표면적으로는 승전 후 철수였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도망친 셈이었다. 

그 후 오늘까지 이라크는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폭탄을 실은 자동차가 달려들지 두려워하고, 어느 누가 인간 폭탄일지 알 수 없는 공포에서 경계를 늦추지 못한 채로. 

 세계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평화를 모르고 태어나 자란 이들이 평화를 꿈꿀 수 있는가? 

신이여, 과연 그들이 부르고 기도하는 신은 살아있는가? 

아니, 아니.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어디에도 없다.


 아흐메드 사다위는 그런 이라크, 바그다드의 절망을 소설에 옮겨 적었다. 

메리 셸리가 창조한 19세기의 괴물을 21세기에 되살려낸 거다. 

소설 제목은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시대와 비극이 창조해낸 괴물, 무명씨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전쟁에 동원된 후 돌아오지 않는 한 노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노파는 여전히 아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연이은 테러로 공포와 혼란이 계속되는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는다. 

그의 이웃 중 폐품업자 하디는 폭탄 테러에 희생된 이들의 사체들을 모아 하나의 시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영혼을 잃은 육체가 하나의 완성된 시체로 인정받아 온전히 장례가 치러지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하지만 제정신을 차렸을 때 하디는 두려워 한다. 

시체를 다시 분해해 원래 자리에 흩어놓을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실행되지 못했다. 또 다른 폭탄 테러에 휘말렸던 거다.

 이번 폭탄 테러는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워낙 가까이서 폭발했기에 시신을 찾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시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머물만한 시체를 찾아 다니다가 하디가 만들어 놓은 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빨려들 듯 시체 속으로 들어가, 죽어있던 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하디가 잃어버린 시체는 이웃집 노파의 집에 가 있었다. 

이 살아있는 시체를 보고 노파는 자신의 믿음대로 아들이 살아 돌아온 거라 생각한다. 

아들의 옷을 꺼내 주고(딱 맞는다), 요리를 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시체는 대답이 없다. 

하디의 시체가 사라진 후 바그다드에는 연속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물론 살아난 시체, 무명씨다(하디는 사라진 시체를 무명씨라 불렀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살점의 주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게 개인적 복수를 하고 다니는 시체와 그를 쫓는 군과 특수 부대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사다위의 프랑켄슈타인을 비교하면 두 괴물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르다. 

메리의 괴물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인정 받기를 바라지만 사다위의 무명씨는 인정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인 복수만을 추구할 뿐이다. 

두 괴물 다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 결도 다르다. 

메리의 괴물은 내면의 갈등, 자신의 창조자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마침내 자신의 창조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누구보다 슬퍼하는 게 바로 괴물인 이유다. 

영원히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 사랑해주기를 바랐던 단 한 사람마저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이 괴물의 죄의식의 근간이다. 

사다위의 무명씨는 변질된다. 

처음에는 순수한 복수, 정의의 응징이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서 점차 순수한 악에 가까워 진다.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한 이유들을 찾으며, 누군가의 인정을 구하기 보다 자신의 안위, 존재의 연장을 위해 살아간다. 


 아흐메드 사다위의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은 2018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작품의 하나다. 

번역되어 읽기 전에는 소재나, 소개된 소재만을 보고 몹시 흥미로울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번역된 작품을 읽은 후 실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대여섯 군데에 초보적인 오탈자가 있다. 단지 책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난이도의 오탈자라 편집, 번역에까지 의구심을 갖게 했다.


 책 소개에 '블랙 유머'라고 소개한 부분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점도 한 몫을 했다.

 웃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선한 복수를 통해 희생자를 위로하려던 처음의 의도가 악한 살인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로 변질되는 그 모든 과정들이 거대한 아이러니, 결코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필연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 모든 이야기들은 허구가 아닌 실제 현실이다. 누구보다 선하고 선량한 그 누군가가 희생자를 특정하지 않은 테러에 간단히 휘말려 목숨을 잃는 게 일상인 세계가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묻는다.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내놓으라 한다.

"정녕 살아가야 하는 사람,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할 시간도 없이 죽어버린 선량한 사람인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영혼을 짓누르는 살인의 괴로움을 참아내는 괴물인가.

 거대한 힘을 뒤에서 움직이는 진정한 적들을 거꾸러뜨릴 수 없으므로 손 닿는 곳에 있는 치졸한 방조자들을 살해하는 사사로운 복수가 부당한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 <데스 노트>가 떠올랐다. 자신의 절대적인 정의를 믿는 살인자와 살인자에게 살해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천재 탐정. 

 바그다드의 괴물 무명씨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사사로이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힘과 '살아남기'를 최선의 정으로 삼아 그것을 관철하려는 모습까지를.


 피, 테러, 전쟁의 뒤에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 있다. 

인간 개인이기도 하고, 인간 집단이기도 하며, 사회들이기도 한 힘들이. 

그들의 부추김이 없다면, 갈등을 더 깊은 갈등으로 풀어가려는 시도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조금씩 덜 욕심을 낸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은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북한은 지금 악의 축에서 평화의 핵으로 탈바꿈 중이다. 

그 변신이 완결될지 아니면 뒤틀리거나 틀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서로의 욕망을,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는다면 완결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커질 거라는 거다.


 세계는 선언해야만 한다. 

자기만의 평화와 안녕이 아닌 모두,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 선언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교류와 협력이 이어나가 궁극적으로 갈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게 이상론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상보다 몽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현재 진행형의 비극이 그 고리를 끊고, 마침내 종결되기를. 

과거로 흘려보내되 비극과 슬픔, 고통과 아픔을 잊지는 말기를.


 역사의 조각으로 흩어져 안식에 이르지 못한 모든 희생자들에게 이제는 평화라는 정당한 장례를 치러주기를.

피에는 피, 복수에는 복수라는 고리를 끊어낼, 마지막 장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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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봄출판 2018-07-17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더봄출판 대표 김덕문입니다.
먼저 좋은 서평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아울러 오탈자가 생긴 점에 대해서 깊이 사과드립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작은 출판사라서...
그래도 변명은 안 되겠지요?
외람되지만, 지적하신 오탈자에 대해서 알려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재쇄에서 수정을 하겠습니다.

이메일: 01052500647@hanmail.net / m.010-5250-0647

대장물방울 2018-07-18 11: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대표님, 좋은 책 출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일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큰 출판사들도 선뜻 내놓지 못하는 책을 이렇게 빨리 내셨으니, 충분히 대단합니다.

오탈자는 거창하지 않은 것들이라, 여기 댓글에 적어 두겠습니다.
오탈자가 아님에도 프로불편러인 제 눈에 어색하게 보인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주세요.

1. 41페이지 중간
방에 도착하자마자 하비는 매트리스 위에 -> 하비가 아니라 하디로 알고 있습니다.
2.117페이지 하단
마흐무드 알 사와디가 들어오지 않았다며 난감했을 것이다 -> 들어오지 않았다면
3. 137페이지 하단
호텔 경비원이 염감 때문에 죽었다 -> 영감
4. 177페이지 하단
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장이 정확한 표현인지 확인 필요(특수정보추적국 국장, 계급은 준장)

네 군데였네요.

앞으로도 좋은 책 출간 기대하겠습니다. 독자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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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야 늘 있지만 요즘들어 깊어진 고민이 하나 있다. 

새로운 사람, 사람들과 만남이 나날이 귀찮아만 간다는. 

처음 하는 고민도, 새삼스러울 깊어짐도 아니지만 '사회 생활'을 해야만 하는 나이, 그것도 원만히 해내야 하는 나이에 골몰하기엔 부담스런 고민이다. 


 숨을 쉬듯 허기가 지고, 허기를 달랠 밥을 먹고,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피로를 느끼고, 피로를 이유로 이런 저런 일을 모면하는 일상. 시간은 부쩍부쩍 큰 걸음을 걸어서 어제는 자꾸만 멀어지고, 내일은 오늘이 되고, 1년 2년을 간단히 살아낸다. 


 그 시간을 혼자 보내지는 않았겠으나, 남은 것도 기억도 거의 없으므로 혼자 보낸 것과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기적이 필요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쩌면 매순간이 기적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지금의 시간이 어쩌면 기적의 산물이었음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때로는 많은 시간을 흘려 보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게 우리 인간들이 공유하는 몹쓸 병은 아닐까.


 서커스 나이트. 

민음 북클럽 회원으로, 그 중에서도 첫 독자가 되기를 신청한 사람으로 이 책과 만났다.

 이 만남은 어떤 의미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 일어날 수 없었을 일이 일어난 경우, 그러니까 기적이다.

굳이 구질구질해지자면 새로 출간된 책을 홍보하고 알리려는 출판사의 욕심과 누구보다 빨리, 심지어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책을 읽어보려는 독자의 욕심이 상호충족됐을 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 게 기적이다. 일어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일어남으로써 그 다음의 무엇 혹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 기적이란 그렇게 일상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두께, 무려 400쪽이 넘는 책에 단 한 편의 이야기가 담겼다. 기억 속 바나나의 소설은 200쪽 안팎이었으며, 가까운 날에 읽은 <바다의 뚜껑>도 비슷했다. 그 두 배나 되는 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줄거리는, 이랬다.

 주인공 사야카는 사이코메트러다. 사물에 담긴 기억 혹은 감정을 읽는다. 몇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마당이 있는 2층짜리 주택, 아래 층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산다. 하루는 묘한 편지를 받는데, 마당에 심긴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에 뭔가를 묻었는데 파 갈 수 있느냐는 전에 살던 사람의 메시지다. 우연일까, 편지의 발신인은 오래 전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다. 기이한 모양으로 굳어버린 왼손의 상처와 연결된 과거의 주연이 편지 하나로 현재와 이어진다. 소설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서 파낸 건 어린 아이의 뼈였고, 그 뼈를 계기로 전 남자친구 이치로와 재회 하며, 이해심과 사랑이 많은 시어머니의 응원과 천진난만한 딸 미치루의 활약으로 오래 묵혀 두었던 아픔, 상처가 치유되어 간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다. 

여리고 따뜻하지만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들. 저마다의 상처로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상처를 늘리는 모난 행동보다 서로의 상처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가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쏟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에 '으응?/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면서도 '그렇게 되다니 다행이군'하고 안심하게 하는 편안한 이야기. 불행이 특별하지 않게 되는 묘한 위안을 담은 이상한 사람들의 일상.


  관계와 연결을 생각꺼리로 삼은 지는 오래다. 대부분이 이어갈 지, 끊어낼 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의 고민이었다. 관계의 문제는 누구나 하는 고민, 답을 얻고자 하는 문제다. 논리, 이성으로 접근하거나 관계의 기술로 풀어 보려는 사람 들을 위한 책도 많다. 지금까지 나온 책들에 다 담지 못했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쓰고 있을 거고, 누군가는 인쇄를 하고 있을 거며, 누군가는 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사람들은 자꾸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한다. 세상도 같은 말을 한다. 관계가 잘 안 풀리거나 안 되면 스스로를 탓하게 하고 돌아보라고 한다. 인연이니 운명이니 기적이니 하는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 기대려고 하면 미신이니 무책임이니 하며 혼내려 든다. 


 바나나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사회와 관계 속에서 망각하고 소홀히 여긴 인연의 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움직임, 인식을 초월한 기적을 긍정하는 거다.

 사람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알아가는 동안 달라진다. 새로 배우는 게 있지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또 변한다. 자신이 변했다는 걸 알아 차리거나 모르고 살거나와 무관하게 변해 간다. 

 

 "나는 변하지 않아!"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는 이 문장을 전하고 싶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 주위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나쁘지만,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틀린 거야." <서커스 나이트> 273P

10살 즈음의 딸 미치루에게 엄마 사야카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아이는 물론 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루는 조숙한 아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린 아이는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어른의 생각이 오히려 편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어릴 때 더 깊이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는 일도 흔하니까.


 가끔 이야기에서 나의 일부 혹은 과거의 나와 만난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자유로운 것은 좋지, 아주 좋은 일이야. 그러나 아무와도 이어져 있지 않거나 언제 끊길지 모르는 만남만 있는 인생은 자유롭다 할 수 없어.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혼자 살아온 네게는 그런 면이 좀 있어. 혼자 어둠 속에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함이. 그게 어쩌면 매력으로 이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매력은 버려도 괜찮다. 번거롭더라도 이어져 있으렴. <서커스 나이트> 189P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온 셈이다. 사람과 관계의 고민 말이다. 

어떤 특별한 불운이 아니더라도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은 혼자가 좋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혼자가 좋지 않더라도 관계의 번거로움을 견디는 일보다 수월하다는 의미도 된다. 관계를 잇고 유지한다는 말은 거기에 그만큼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관심과 노력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일말의 혹은 많은 책임을 느낀다는 의미다. 책임이 생기면 훌쩍 사라질 수 없다. 자유를 잃은 듯, 갇힌 듯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응지 식물이라도 햇빛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거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모든 외부 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 고립된 자유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관계 없이 살 수 없다. 관계에 질식할 지경까지 견뎌서는 안 되지만 메말라서도 안 된다는 거다. 안정 속의 불안정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하지만 불안정 속의 불안정은 인간을 극단으로 내몰기 쉽다. 


 <서커스 나이트>에는 초월적인 믿음이 담겨 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하고, 논리와 과학으로 증명하기 익숙한 세계 이면이 녹아있다. 

 이런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모든 걸 다 안다는 지금의 확신을 뒤집어 놓을 경험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고, 인연에는 적거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기적은 사람에게서 온다고.


책을 덮으며 떠올린 생각은 이런 거였다.

"다음에는 발리에 한 번 가봐야겠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착한 사람 꿈에 찾아온다는 성스러운 동물 바롱을 만날 수 있겠지. 
아, 그런데 안 오면 착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가? 
뭐,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겠군."


 서커스 나이트, 기적을 만나는 밤.

혹은 기적을 믿어보고 싶은 밤.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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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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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맨 부커상 수상작으로 이름이 제법 읽기도 쓰기도 어려운 생소한 작가 작품이다.


뭐, 책을 좀 읽으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독특한 작품이었다. 

문자 그대로인데, 서사 방식, 전개 구조, 장의 구성이 색달랐다. 


지난 번 필립 로스 <에브리 맨>은 마지막 장을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었었다. 이 작품도 본의 아니게 처음 부분을 다시 읽게 됐는데 계기는 전혀 달랐다.


왜 그랬는지는 책을 읽은 사람들은 저절로 알게 될테니 밝히지 않기로 하고,


대표 키워드를 몇 개 뽑고 싶은데, 첫째는 ‘부활’이다. 과연 유명 문학상 답게 모호한 부분이 많아서 콕 짚긴 어렵지만 이 작품은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종소리’다. 단순하게는 시작 종과 마치는 종이라는 열고 닫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고, 흥미를 돋우자면 죽은 자를 깨우는 종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 번째는 ‘감시’로 한다. 감시가 먼저인지 존재가 먼저인지 이 이야기만으로는 선뜻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배경이 궁금해지는 이야기인데 어떤 배경에서 쓴 건지 알게 된다면 억측이나마 추측을 시도해 볼 여지가 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거미’다. 이야기에 거미가 거듭 등장하는데(정확히는 ‘거미줄’)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이어진 줄을 남긴다고 한다. 해충이 되어 박멸 대상이 된 개미와 달리 해충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혐오하고 없애고 싶어할 곤충이 거미다. 거미는 날벌레들에게는 치명적인 적인데, 공중에 쳐진 거미줄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일단 걸리면 도망치려 발버둥 칠수록 감기는 성질이 있는 게 거미줄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거미줄에 얽히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동명의 영화가 있다는데, 그게 7시간이 넘는 단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빠른 드물게 존재하는 작품이지 싶다.


읽고 난 직후라 아직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인듯하다.

 무슨 메시지를 담은 건지 감 잡기가 힘들다. 줄거리는 알겠고, 등장인물들의 성향이나 상황, 심경도 추측할만 한데 그 모든 걸 아울러 담은 결과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게 뭔지 좀처럼 와닿지를 않는다.


독특하고, 수월히 읽히지만 다 읽고 나서도 뭔가 석연찮은 기분을 남기는 소설이다.


헝가리, 다뉴브 강, 폐허가 된 농장, 궂은 날씨, 불확실과 무지와 무력함, 부활이라는 기적.

난해했다.


표지가 두 가지다. 랜덤으로 발송된다는데, 검정이 왔다. 빨강이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 소설에 입각해 생각해보면, 정말 빨간 표지는 존재하는 걸까?하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악마에 홀려 탱고를 추는 꼴이 아닐지.

제목이 사탄 탱고인데, 솔직히 작품을 다 읽고도 제목의 의미조차 다 간파하지 못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언젠가 시간을 내어 영화를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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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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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검정이 왔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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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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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을 가진 귀족이 있다. 

그는 아내가 될 여자를 찾고, 어떤 여자들이 아내가 되기 위해 찾아온다. 

이제 아내가 된 여자에게 푸른 수염은 단 한 가지만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집 안에 있는 '어떤 방'에만 들어가지 마시오."

 여자는 그러겠다고 약속하지만 호기심이 여자의 약속을 이긴다. 어쩌면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약속을 어기고 '어떤 방'에 들어간 여자는 죽었으니까.

 푸른 수염의 귀족이 다시 아내가 될 여자를 찾는다.

아내가 되고, 약속하고, 약속을 어기고, 살해당하기를 반복한다.

 푸른 수염은 자꾸만 아내가 될 여자를 찾고, 여자들은 아내가 되려고 찾아온다. 

푸른 수염은 약속을 받아내고, 여자는 약속을 어기며, 죽는다.

 이쯤되면 포기할만 한데 푸른 수염은 한 번 더 아내가 될 여자를 찾는다. 

이번 여자는 만만치 않았다. 결국 오빠와 힘을 합친 여자는 푸른 수염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한다.

 이 이야기에는 사랑이 없다. 욕망, 어리석음, 어리석은 욕망, 욕망의 어리석음만 있을뿐.


<푸른 수염>은 동명의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해서 지어진 소설이다. 아멜리 노통브를 처음 읽었는데, 쉽고 빠르게 읽히는 속도에 깜짝 놀랐다. 


 소설에서는 동화 속 푸른 수염 대신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귀족이 자신의 집에 세 들 세입자를 구하고 있다. 이번에 앞서 이미 여덟 번의 세입자 구하기가 있었고, 여자들이 세입자로 뽑혔으며, 세입자로 들어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이라고 했다. 귀족의 집에서 사라진 이후 두 번 다시 그 여자들을 만난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죽었다거나 살해당했다고 하지 않고 '실종'됐다고만 했다.

 세입자로 들어간 여자들 중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지만 세입자를 모집할 때마다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아홉 번째인 이번에도 열여섯 명이나 되는 여자가 찾아왔다. 

 벨기에 여자 사튀르닌 퓌이상도 열여섯 명 중에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싼 월세로 호화로운 집에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다른 누구도 아닌 사튀르닌이 새로운 세입자로 선정된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에서도 귀족이 제시한 금지 사항은 하나다. 

'암실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 것.'

그 외에는 집안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뭘 하든 자유였다.

 

 귀족, 엘레미리오는 돈 많고, 요리에 능하며, 바느질은 물론 사진까지 잘 찍는 만능 재주꾼이다. 그런 그에게도 나쁜 버릇이 있는데 자꾸만 사랑에 빠진다는 거다. 상대가 자신을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고백하고, 구애하기를 멈추지 않을만큼 뻔뻔한 태도로 말이다.

 사튀르닌은 이 변태에 살인마임이 분명한 남자를 경계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경계심이 자꾸만 누그러진다. 경계심은 호기심으로 바뀌며 엘레미리오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진실은 암실 안에만 있고, 암실 안에는 죽음만이 있다.


 푸른 수염과 엘레미리오의 공통점은 들어가지 말라고 금지했을뿐 방문을 잠그거나 막아두지 않았다는 거다. 엘레미리오는 말하기를 잠그거나 막는 건 의미가 없었을 거라 한다. 잠겨 있거나 막혀있어도 호기심을 멈출 수는 없었을 거라고 말이다. 호기심이란 녀석은 분명 무모하고 참을성이 없다. 왠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에 내재된 고질병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다. 

엘레미리오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선물 공세와 요리 뽐내기를 그치지 않는다. 급기야는 최대의 호의라고 할 수 있는 암실의 비밀도 알려준다. 하지만 엘레미리오가 어떤 호의를 베풀고, 희생을 감수한다 해도 그런 게 사랑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만든 착각. 늘 이야기하지만 그런 착각은 둘 모두를 비극으로 끌고 가게 된다. 


 사튀르닌은 자유를 만끽한다. 자신을 시험하고 구속하려는 엘레미리오도 적절히 이용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 신처럼 무책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자유를 이용했다면 그 이용한 만큼 삶에 돌아오게 되는 거다.


 <푸른 수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튀르닌의 태도도, 엘레미리오의 비밀도 아닌 황금을 찬양하는 표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질이라는 황금. 좀처럼 변하지 않아서 왕의 관이나 신의 형상을 짓는데 쓰인 황금을 다양하고도 적절하게 묘사해서 그려 보여주는 거다. 그 사치스러운 묘사라니.


소설의 결말이야 어떻든 만약 나에게 단 하나의 열려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게 허락된다면 단 하나의 금지를 지키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을 얻은 다음에는 만족하게 될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 밖에 안 하게 된다고 한다. 그 방에만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절대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걸까. 


 이 절대 지키라고 하는 말을 절대 어기고자 하는 뒤틀림과 사랑을 엮어서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억지로 사랑에 빠질 수도, 억지로 사랑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논리가 떠오르고 마니까 말이다.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즐겁게 읽고, 읽고 싶을 때 읽고, 읽고 싶은 걸 읽어 나가면 계속 읽게 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어수선하니, 쓰는 일에도 드러난다. 어수선하고, 어지럽고, 어설프다.


엉뚱한 결론을 내려볼까.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런 게 아닐까.


"사랑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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