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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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수학의 유용함을 체감해본 경험이 있는지? 산수 수준의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사칙연산 정도면 일상에 큰 지장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계산을 카드로 하다보니 거스름돈을 헤아릴 필요도 없고, 좀 복잡한 건 스마트폰 계산기가 해결해 주니까요.

아이러니한 건 수학이 우리 일상 무척 가까운 곳,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기본 원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도의 물리, 화학, 전자, 전기 등등. 지금 이 짤막한 감상을 적고 있는 스마트 폰에도요.

이토록 가까이에, 흔하게 존재하는 수학적 원리들. 편리한 기계와 제품을 만드는 공학적 기술들. 이 모든 걸 만든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그들은 어쩌다, 왜, 어떻게 그 일을 해냈을까요? 무엇보다, 그들은 누구인 걸까요?

입시에 찌들 수밖에 없는 환경, 억지로 공부한 시험 과목들, 이해 이전에 암기하고 반복해서 정답을 찾던 수학과 과학 문제들. 결국 수포자와 과알못을 대량 생산해내는 데 성공한 교육 제도의 부작용. 수학, 물리가 좀 재밌으면 안 되는 걸까?

아마도 탄생 배경도 목적도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건, 그렇게 많은 선생님이 있었건만 왜 과학이 재밌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거였습니다. 어떤 과정으로 공대생 만화가 그려지고,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읽는 동안 과학이 재밌었다는 겁니다. 도무지 인간의 언어, 문자처럼 보이지 않는 수학적 증명이나, 공식이 등장해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눈이 세 개 달린 것도 아닌데 다른 세계 사람 같던 천재 물리, 수학자들이 보통의 사람처럼(두뇌, 천재성은 도무지 보통이라고 할 수 없지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 공대생이 그린 공학과 수학과 과학, 그걸 연구하고 고안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하철에서 내리는 역을 깜빡 지나칠 뻔 하게 만들만큼 재밌습니다.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나 과학, 물리가 진저리나게 어려웠던 사람도 편안히 볼 수 있습니다.

익숙한 이름의 과학자, 수학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하고,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학자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학이 웃길 수 있음을 분명히 증명합니다.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 ˝앗! 이런 모습 처음이야!˝ 시간이랄까요.

만화가를 꿈꾸던 공대생이 그린 수학, 과학 이야기. 한 번 웃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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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쓸모 있는 인간 - 오늘도 살아가는 당신에게 『토지』가 건네는 말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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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은 말이 '몸에 힘 좀 빼세요.'였다. 처음 물에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공감할텐데 힘을 빼면 가라앉을 듯한 두려움이 일지 않던가? 당연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 반대보다 크기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배겨낼까.

몸에 힘을 빼면 가라앉는 게 아니라 뜬다는 걸 알게된 후에도 여전히 매번 힘을 빼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그도 그럴게 팔을 젓는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수영인데 힘을 빼라니 수영을 하라는 건지 제자리에 떠 있으라는 건지? 싶었던 거다.
 
물론 나중에 익숙해지고 나니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팔을 젓고 발차기와 호흡을 맞춰야 수영이 수월하다는 걸 실감하게 되긴 했다. 오히려 괜히 힘을 주다보니 쉽게 지치고 다리에 쥐가 나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걸 알게된 거다.
 
수영 다음으로 힘을 빼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게 글쓰기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배운 적이 없으니 정확히는 읽은 말인데, 힘을 빼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거였다.
 
어려웠고 지금도 터무니 없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차라리 생각이 없던 때는 겉멋 든 글이나마 끄적일 수 있었고, 한 번 끄적이고 나서는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마음 편했구나 싶다.
 
 뭔가를 쓴다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데 하고 싶은 중요한 말에 힘을 주지 않으면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인지 아닌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까 싶었다. 소설에는 줄거리가 있어야 하고, 주인공이 있어야 하며, 사건의 기승전결이 분명해야 읽는 재미가 있는 거 아니냔 말이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하지만 자꾸 생각하게 된다. 정말, 그것 뿐일까?
 
 이 책은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 속 인물들의 삶과 생각,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행동의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4년 전 인가에 읽기 시작해서 이제 5권을 읽고 6개월은 잊고 지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완독에의 의지가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타오르는 걸 느꼈다.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잔혹하다. 그 소설을 내가 읽기 전에는 어떤 매력적인 주인공도 환상적인 스토리도 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토지>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배경이 되는 시간이 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설 속 배경으로부터 7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 마음을 끌리게 할 인물이 얼마나 되겠어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의 빈천도 없고, 자유니 독립이니 싸워야할 외적도 없는 평화로운 이 때에 말이다. 

그런데, 있었다. 
70년 전 보다 세상이 복잡해진 만큼 더 강렬하게, 당시 세상이 앓았던 병적인 문제들이 모습만 바꿔 퍼져 있었던 거다. 그 문제들을 끌어 안고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다.

이 책은 나에게 일종의 백신처럼 느껴졌다. 세상과 사람의 맛을 보여주는, 목숨이 오갈 질병을 열이 조금 나고, 살이 얼마쯤 따끔한 정도로 그치게 하는 백신 말이다.
 
 토지에는 기구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같은 상황에 놓였어도 다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한계를 이기고 구속을 넘어 성장하는가 하면 높은 데서 떨어져 더러운 시궁창을 구르듯한 인물도 있다. 

그런 인물들의 삶을 이 책은 힘빼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건네듯 전해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고, 당신이 깨닫길 바라는 건 저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토지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고 환대하지 않고 토지를 읽고도 잊어 버렸다고 박대하지도 않는다. 

이렇게까지 읽으면서 좋은 책이구나 하게 된 건 오랜만이다. 덜 읽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헤아림이 얕은 탓도 있겠지만 얼마쯤 마음 편하게 '한 번 읽어봐요'할만한 책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외국 작가 누구,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고전 무엇이 아니고는 말이다. 그래서 반가웠다. 이 만남이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몇 년 간 책을 잔뜩 힘을 주고 대했다. 아마 그래서겠지 싶은데 제법 지치기도 했고. 새로운 시작에 앞서 토지를 읽고 싶게 만든 책을 만나서 참 좋았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의 작가님 정도는 아니라도 나에게 매력적이었던, 몹시 미웠던, 가장 사랑했던 인물을 고르고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구나 한다.
그럼, 당장 내일부터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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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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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기준은 작고 사소한 차이라고 한다.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야기들을 놀랍고 새롭다며 환호하는 일을 접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잃고는 한다. 그래서 시도해 보기로 한다. 비판 없이 수용하던 습관을 버리고 낯설게 읽고 돌아보기.

 건축가이자 교수 유현준의 저서가 시작이 된 건 단지 우연일 뿐.

비난은 쉬워도 비판은 어렵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비난이고 어디부터가 비판인지 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때도 많다.

모두가 '예'라고 한다고 해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무도 '아니오'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예'라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권위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바로 잡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돌아보기를 잊을 수 있다. 스스로는 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바로 보지 않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다양한 견해와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다.

많이 배운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올바른 판단을 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냈듯, 나는 나의 자리에서 나의 목소리를 내는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 글은 그런 사소하고, 주관적인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그 나중을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비판의 범위는 유현준 작가의 서술과 도서 전체의 만듦새(편집 등)를 포함한다.

시작하는 문장은 본문 28페이지. /오탈자/
"필자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교복 자율화 시대였다."

서술어가 제대로 호응되지 않은 문장이다.

"필자가 학교 다니던 시절은 교복 자율화 시대였다." 정도로 고치거나 문장 전체를 다시 쓰는 게 더 정확하겠다.


이런 형식으로 본문을 발췌하고 본문에 대한 견해, 의견을 적어 보기로 하자.

 

29페이지
우리의 아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체주의적인 공간에서 지내게 된다.

저자가 '전체주의'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앞뒤 문맥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문장은 저자가 전체주의를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전체주의가 가장 먼저 상기시키는 건 히틀러의 나치 정권일 거다. 전체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 파시즘과 같은 형태로 구현됐다. 개인의 존재가 부정당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획일성과 몰개성으로 치닫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듯 보이나 그런 의도를 헤아린다고 해도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쓴 건 경솔하지 않았나 한다. 앞으로도 여러 차례 짚어보겠지만 저자는 인기 있는, 방송에 출연할 정도의 인지도에 교수라는 권위까지 지닌 사람이다. 모든 독자를 배려하고 염두에 두라고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오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단서, 설명 정도는 덧붙여야 하지 않았을까?


33페이지
"지식은 책에서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자연을 만날 기회가 없다. 지혜를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삶에 필요한 것은 자연이다.

성급하게 일반화, 단순화한 결론이다. 이 문장 역시 어떤 의도로 썼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저자가 '자연'의 개념을 자신의 세대, 자신의 경험에 국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 물, 계절의 변화 등 인위와 대비되는 개념에서 얻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인류가 접하는 자연의 개념은 시간이 흐르며 계속 변해 왔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20세기에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19세기 산골에서 태어난 사람과 비교해봤을 때 자연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지혜를 배울 수 없어야 한다(물론, 이 결론에 억지가 다분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자연을 접할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면 절망적 결론을 내놓기보다 현재 환경에서 자연과 만날 수 있는 작은 기회, 가능성을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콘크리트 건물의 풍화, 보도블록 틈새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자연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거대한 자연을 접한다고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41페이지 
1학년 때는 삼각형 모양의 마당에서 놀다가, 2학년이 되면 연못 있는 마당에서 놀고, 3학년이 되면 빨간색 경사 지붕이 있는 교실 앞마당에서 놀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아이들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정상적인 인격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획일화되고 커다란 아파트 건물에서 산다.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그런 전체주의적 '시설' 같은 건물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정상을 규정하는 순간 비정상이 생겨난다. 정상을 규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위 표현은 심한 비약을 포함한다. 전제가 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인격'으로 크지 못한다고 읽힌다.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테지만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전체주의'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그 쓰임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겠다. 도시, 아파트라는 건물은 그 선택의 여지, 기회가 적더라도 결국 자발적 선택의 결과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애초에 적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관계로 잘못된 견해를 제시했다면 누구든 꼭 가르쳐 주시길). 저자에게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학교 건물의 모델, 이상형이 있는 듯한데,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해서 가능성 자체를 봉쇄해서는 안 된다.


50페이지 
이처럼 다양성은 행복의 가능성을 높인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학교 건물에서 공부한다고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 그런 세상은 북한 같은 전체주의 세상이다.

저자가 '전체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있다.


58페이지 
지난 30년을 돌이켜 보면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세르게이 브린, 일론 머스크에 조지 호츠까지, 여섯 명의 천재가 배출되었으니 줄잡아 5년에 한 명 꼴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천재는 왜 유독 미국에서 잘 나타나는 것일까?

3류 자기계발서에나 등장할 법한 비논리적인 부분이다. 성공한 인물, 새로운 아이디어, 발상 등으로 막대한 부를 일궈낸 사람들을 천재라고 한 거라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빼놓을 수 없을 텐데 빠져 있다. 미국의 '다양성'이 이러한 천재들을 배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논지인데, 성장 배경과 그들이 거친 교육, 가정환경이라는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미국 사회의 다양성'이 결정적이었다고 결론짓는 건 성급해 보인다. 미국의 좋은 점을 보고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미국은 전 세계에서도 빈부격차가 크기로 유명하다. 과연 그들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올바른 소통을 하고 있다고만 볼 수 있는 것인가?


88페이지 
인구 감소 현상은 앞에서 언급한 쥐의 실험과 양상이 똑같다. 제한된 공간 내에서 인구 폭증으로 인한 환경문제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체 수 증가가 멈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결혼이 늦어지고 아이를 낳지 않는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문제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하나는 지구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구를 줄이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비논리적이다. '자연스러운'이라는 표현이 반어적 표현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쥐의 개체수 증감과 인구 증감을 동일 선상에서 해석하는 건 억지스럽다. 인간의 경우 환경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결혼이 늦어지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환경이 열악한 집단에서만 발생한다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 현상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시대와 의식의 변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러운'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없다. 해결할 필요도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두 가지 모두 실행 불가능한 방안이다. 해결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지구의 크기를 키우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구를 인위적으로 줄이는 것 역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느 쪽도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여길 수 없다.


91페이지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선진국 중에는 아마도 단위 면적당 부동산이 가장 비싼 뉴욕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뉴요커'들의 라이프를 살펴보면 그렇게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간 소비의 측면에서 뉴요커들은 아주 넓은 면적을 영유하며 살기 때문이다.

한쪽 방향에서 바라본 일방적이고 성급한 결론이다. 물론 저자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유가 적절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앞서도 적었듯 미국은 빈부격차가 특히 심한 나라다. '뉴요커'라 하면 뉴욕 주에 사는 사람들을 두루 일컫는 말일 터, 주변의 공원 등 넓은 공간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뿐 아니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도 있을 터다. 그들의 존재를 간과하고, 미국은 선진국이고, 뉴요커는 좁은 집에 살아도 주변에 공원 등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 넓기에 덜 비참할 거라는 건 성급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결론이 아닐까.


159페이지 /오탈자/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가는 백 년 전에 지어진 기차역의 구조에 덧대어 아름다운 미술관을 건축했다. 기찻길이 다니던 곳은 조각품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기찻길이 다니던 곳'이 아니라 ''기차가 다니던 길'이 올바른 표현 아닐까.


186쪽 
필자는 이 공식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계산 당일 두 그룹의 주가 총액을 구해 봤다. 롯데 그룹은 29.42조 원이었고 현대차 그룹은 100.21조 원이었다. 이 둘은 3.4배의 차이가 난다. 위치에너지 값과 주가 총액이 소수점 첫 번째 자리까지 동일하게 3.4배 차이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비교 공식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옥의 위치에너지와 주가 총액 사이에 상호 적용이 가능한 공식이 있다는 논리인데 지나치게 단순화한 결과이자 결론이다. 어떤 이론, 공식을 적용하고 그 관계를 확인하는데 단 하나의 사례밖에 제시하지 않은 건 둘째다. 첫째로 사옥의 위치에너지는 변하지 않는 수치지만, 주가 총액은 변화한다는 게 간과됐다. 롯데 그룹과 현대차 그룹의 주가 총액이 항상 동일한 비율로 변하지 않는 한 이 공식이 근거를 가질 가능성은 없다. 정말 근거를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국내외 그룹 3곳 이상을 비교 확인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189페이지 
청나라 시대의 변발은 정수리까지 모두 삭발하고 뒷머리만 남겨 놓는 헤어스타일이다. 아마도 권력자가 대머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자신이 머리가 빠지고 위치에너지가 낮아지니 어린아이부터 시작해 온 국민을 대머리로 만드는 헤어스타일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 헤어스타일 권력의 '하향 평준화'라고 할 수 있다.

농담이라고 해도 질이 나쁘다. 추측은 자유다.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지나친 비약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겠다. 우선 변발의 핵심은 삭발에 있는 게 아니라 땋은 머리에 있다. 청나라만의 특징이 아니라 만주족, 일본 사무라이의 촌마게도 유사하다. 논리의 비약을 조금 흉내내면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모두 대머리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이번에도 역시 의도는 추측할 수 있다. 권력의 위치에너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학술, 연구로 증명된 사실 관계없이 무턱대고 내놓은 추측을 그럴듯한 설명을 더해 적는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197페이지 /오탈자/ 
대한민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 쇄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건축적 배경을 살펴보자.

쇄락이 아니라 쇠락이 옳은 표현이다.

글을 쓰다 보면 초보적인 오탈자를 쓰기도 한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적지 않기에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편집 과정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오자를 바로 잡지 못한 건 독자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208페이지 
우리는 정치 집회를 할 때 주로 광화문 광장에 모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적 중심축은 '이순신 동상 - 세종대왕 동상 -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축선상의 중심 공간이 광화문 광장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억지 논리다. 역사적 중심축이 '이순신 동상 - 세종대왕 동상 - 광화문'이라는 논리가 어떻게 생겼을까? 참고로 세종대왕 동상이 현재의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건 2009년 10월이다. 2018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 중 광화문 광장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적 중심축'이 광화문 축선상이라는 결론은 지나치다. 그 이전의 정치 집회와 장소, 민주화의 성지들을 간과하고 수도 서울이라는 요소를 확대해서 해석한 결론을 마치 사실처럼 적는 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책임이 있는 대표 지성인의 자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19 페이지 
우리에게 권력의 상징인 높은 건물이 없는 데는 산악 지형이 많기 때문에 건축물의 구축술이 크게 발전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성을 보더라도 대부분이 '산성'이다. 힘들게 평지에 해자를 파고 성을 짓기보다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악 지형을 이용해 대충 토성만 쌓아도 방어가 되니 굳이 평지에 성곽을 짓지 않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권위를 나타내는 건축물을 만들지 않다 보니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창출될 가능성도 적었다. 높은 산이 많은 지리적 환경 때문에 한반도에 대형 제국이 형성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화가 나기도 하는 견해다. 역사를 재단하는 절대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지역이 더 우수했다거나 열등했다는 견해는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가장 자주 이용되기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 이 부분 역시 저자가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 왜곡이나 다름없는 논리를 용납하기는 어렵다. 지역과 환경의 차이로 인해 건축 양식이나 재료가 달라졌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저자일 것이다. 건축물과 권력, 제국의 형성 사이에는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국이 없는 이유로 높은 산이 많은 지리적 환경을 꼽은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 역사 속에도 제국이라 존재할 만한 중앙집권적 국가는 무수히 등장했다. 제정일치 사회였음이 밝혀진 방대한 영역을 지닌 고대국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와 백제 역시 제국이라 할만한 발자취를 남긴 바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지구라트,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건축물이 지니는 위용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산성이 '대충 쌓은 토성'의 의미에 그치는 것은 아니며,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창출될 가능성이 적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봤던 서양과 달리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추구했던 차이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263페이지 
3차선 이하의 도로가 블록 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3차선 도로는 무단 횡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단 횡단이 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길 건너편을 그냥 건너갈 만큼 가깝게 느낀다는 것을 뜻한다. 교통법규상으로는 문제가 되지만 보행자 중심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단 횡단이 가능한 폭의 길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보행 친화적 도시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 책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의 문제 대부분은 저자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하는 의도로 썼는지는 알만 한 내용들이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 주장과 근거가 과연 적절하고 옳은가 하는 의문이 생겼기에 스스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되묻고 있는 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무단횡단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종종 무단횡단을 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무단횡단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통법규상 문제가 돼'기 때문이 아니다.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가해자로 만드는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보행자 중심의 도시'가 만들어졌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그 전제가 무단횡단이 가능한 구조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모든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언제든 사람이 무단횡단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게 되는 세상이 열린다면 그때는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의향이 있기는 하다. '심리적으로 길 건너편을 가깝게 느'끼는 것도 좋고, '보행 친화적 도시'도 좋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단횡단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84~5페이지 
강북과 강남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뿐 아니라 강북의 서울숲과 강남의 로데오 거리를 연결하는 보행자 다리가 건설된다면 양쪽에 다 좋은 커다란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런던시는 새 천년을 구상하면서 구도심에 있는 성바울 성당과 새로운 문화 지구로 떠오르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연결하는 보행자 다리를 건설했다. 이 다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지구를 보행자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게 하면서 이 지역 일대를 런던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만들었다. 한강은 템즈강보다 폭이 넓기 때문에 다리 길이도 꽤 길 테니 중간중간 쉴 수 있는 공간과 이벤트를 반들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리를 건너 다다른 목적지에 전시나 공연 또는 자연 등 매력적인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밀레니엄 다리를 건너면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을 적은 이유는 앞서 저자가 비판한 프로젝트 때문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도 해외의 성공 사례를 보고 배우고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세계 첫 시도를 해볼 수 있음에도 여전히 따라 하기만 한다며 비판한다. 그 예로 든 프로젝트가 ‘서울로 7017’과 ‘을지로 세종로 지하공원’이다. 그런데 몇 페이지 뒤에서 저자가 지적한 성공 사례를 보고 배워 따라 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건 자기모순처럼 보인다. 저자의 지적처럼 한강에는 보행자를 위한 다리가 없는 게 사실이다. 저자가 말한 '한강르네상스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세상에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왜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는지 알만 하다.


360페이지 
19세기 조선 한양의 사진을 보면 아직까지도 단층 건물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도시가 아직 고밀화되지 못한 상태였고 상인을 중심으로 한 신흥 계급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농민 중심으로 진행된 1894년 '동학혁명'은 실패한다. 하지만 1970년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우리도 보일러 덕분에 12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었고 1980년대에는 많은 국민이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고밀화된 도시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1987년 6월 항쟁은 성공한다. 이런 내용의 사회학 논물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건축적으로 유추해보면 도시 고밀화와 사회 진화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도시의 고밀화는 신흥 계급을 만들고 사회의 민주화와 진화를 이루어 낸다.

앞서 우리에게 제국이 없는 이유에 이어 몹시 실망한 대목이다. 이 부분 역시 저자의 의도, 메시지는 알 수 있다. 주장하는 바가 있고, 그 주장을 지지하기 위한 근거로 '동학혁명'과 '고밀화된 도시'와 '1987년 6월 항쟁'을 가져온 거다. 하지만 이 논리의 전개는 말도 안 되는 억지다. 일단 동학혁명이 실패한 원인이 '농민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라는 것부터 터무니없다. 내부와 외부에 적을 맞아 중과부적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성공을 아무리 건축적으로 유추한다고 해도 고밀화된 도시가 결정적인 기여라고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혁명 속에 피 흘리는 건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다.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가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도시의 고밀화와 신흥 계급의 출현이 사회 민주화와 진화를 이루었다는 논리의 전개는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으로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는 용납했으나 '민주화와 진화를 이루어 낸다'는 결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361페이지 
건축적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이유는 우리나라의 '온돌' 난방 시스템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도시의 고밀화는 신흥 계급을 만들고 근대화로 이어진다. 온돌을 사용한 우리나라는 단층짜리 주거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고밀화 도시를 만들 수 없었다. 아마 일본도 우리의 온돌 시스템을 수입하였을 테지만 잦은 지진으로 구들장이 내려앉아서 무거운 온돌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가벼운 다다미방에 '화로'를 놓는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덕분에 일본인들은 우리보다 수백 년 앞서서 2층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몇 백 년 전에 지어진 교토의 주거에 이미 2층짜리 주거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지막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저자의 생각, 주장, 추측과 그 생각, 주장, 추측을 지지하기 위한 또 다른 생각, 주장, 추측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의 연구에 의하면 이라거나, 다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라거나, 무엇을 보면이라는 식의 독자 누구든 본문을 읽어 보기만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반대로 논리적 비약은 무수히 발견된다. 이 부분 역시 다르지 않다. 일본이 먼저 근대화를 한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에 수백 년이나 앞서 2층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는 증거는 대지 않았다. 조금만 검색을 해봐도 알게 되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에 이미 중층 건물이 흔했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온돌을 쓰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클 거라고 한다. 오히려 조선 시대에 들어 다층 건물이 줄어들고 단층 건물이 늘었다고 하니 저자의 말은 반만 맞은 셈이다.


비판적 읽기를 마치며, 4시간에 걸쳐 적은 이 생각들이 비틀리고 잘못되었을 수 있음을 생각한다. 누군가 읽고 바로 잡아준다면 말하지 않고, 쓰지 않아 바로 잡을 기회를 잃는 것보다는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후회는 없다. 비판하려는 자는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하는데, 비판하고 싶을 때는 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검열이 비판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어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경우를 여러 번 당해봤기 때문이다. 비판은 오히려 반가운 일이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배운 것이 있다. 주장이나 이론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는 때에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거다. 사실 나는 누구의 말을 인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권위를 가진 사람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조사와 연구는 다른 문제라는 걸 알았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논리적 증명과 설득이 필요한 문제에서는 그 근거와 출처가 확실히 제시될 때 설득력을 지닌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는 그러한 출처와 근거가 거의 없다. 저자의 고민과 주장은 있지만 주장을 받칠 기둥이 허술한 셈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건물을 지을 때 토대와 기둥만큼 중요한 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종의 사상누각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만약 저자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면 저자를 지금보다 더 오해했을 것이다. 저자의 솔직함, 유머 코드를 몰랐다면 더 격한 비판, 비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을 거라는 이야기다. 나는 건축을 잘 모른다. 그러나 건축을 알고 모르고가 결정적이었다면 그 책은 인문학 책이라는 이름을 떼고 팔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비판할 수 있는 여지, 기회를 만들어 주는 책과의 만남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제법 오랜 시간 정체된 시간을 보냈던 나를 깨우는 하나의 계기로 작동한다.


 저자는 '세상을 더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 건축을 한다'라고 한다. 그 목표를 꼭 이루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다툼이 없다고 화목한 게 아니다. 모든 것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을 피해가거나 유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다투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갈라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화목에 닿을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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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2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2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물방울 2018-09-19 14:28   좋아요 1 | URL
다시 읽어봐도 syo님 댓글은 흥미롭네요. :)
이건 농담 반 섞은 진담인데 겸손이 지나치면 무례가 된다고 하더라고요(저도 들은 말입니다만). 잘은 모르지만 단순한 열정과 치밀한 두뇌 모두를 소유하신 분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아침 저녁 일교차가 제법이네요. 건강히 즐거운 독서 이어가시길.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판문점 선언과 북미 정상회담, 북한 비핵화와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

남북과 북미 정세 평화 축으로 급격히 전환,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꾸준히 들려오는 교류와 소통. 


통일 농구 대회에 이어 이번에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북한 영화가 상영되는 문화 교류의 물꼬가 틔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성급한 낙관론을 경계한다고 해도 성과는 성과, 진전은 진전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북한에 관련된 건 모두 금지되었던 시대, 평화로 이어질 일말의 가능성을 붙들기보다 팽팽한 대결 구도 극단에 있는 전쟁을 이야기하던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음이 오히려 생소하기만 하다. 


 "이렇게 쉬웠는가?"

남북 정상이 만나 손을 맞잡던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머릿 속으로 흘려낸 말이었을까.

모든 갈등의 이면에 이권과 속셈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음이 얼마나 또렷이 드러났던가.


시민의 삶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그 모든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북한 영화는 <불가사리>라고 한다. 

바다에 사는 별모양의 기묘하고 신기한 생물 불가사리 이야기는 아니다.

전설의 동물로 쇠를 먹고 자라며, 이 영화에서는 전쟁을 위해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는 왕을 무찌르는 활약을 한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사람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는 걸 택할만큼 마음씨까지 곱다는 소문이다. 생긴 건 안 곱

 참고로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는 죽여도 죽지 않는다는 '불가살'에서 그 이름이 생겼단다.


이번에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북한 영화는 9편으로 특별한 신청 절차 없이 영화제에서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체제 찬양이나 영웅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던 과거와 달라진 점은 디테일하게 개인의 삶을 들여다 본다는 점이라는데,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계속되어 영구적인 평화에 닿기를 바란다. 


다른 세계로 시선을 옮겨 보자.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다. 

이라크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이유, 평화 유지를 근거로 한 국제법상 합법적인 침공이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제거 후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이라크에서 철수한다. 

표면적으로는 승전 후 철수였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도망친 셈이었다. 

그 후 오늘까지 이라크는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폭탄을 실은 자동차가 달려들지 두려워하고, 어느 누가 인간 폭탄일지 알 수 없는 공포에서 경계를 늦추지 못한 채로. 

 세계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평화를 모르고 태어나 자란 이들이 평화를 꿈꿀 수 있는가? 

신이여, 과연 그들이 부르고 기도하는 신은 살아있는가? 

아니, 아니.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어디에도 없다.


 아흐메드 사다위는 그런 이라크, 바그다드의 절망을 소설에 옮겨 적었다. 

메리 셸리가 창조한 19세기의 괴물을 21세기에 되살려낸 거다. 

소설 제목은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시대와 비극이 창조해낸 괴물, 무명씨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전쟁에 동원된 후 돌아오지 않는 한 노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노파는 여전히 아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연이은 테러로 공포와 혼란이 계속되는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는다. 

그의 이웃 중 폐품업자 하디는 폭탄 테러에 희생된 이들의 사체들을 모아 하나의 시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영혼을 잃은 육체가 하나의 완성된 시체로 인정받아 온전히 장례가 치러지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하지만 제정신을 차렸을 때 하디는 두려워 한다. 

시체를 다시 분해해 원래 자리에 흩어놓을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실행되지 못했다. 또 다른 폭탄 테러에 휘말렸던 거다.

 이번 폭탄 테러는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워낙 가까이서 폭발했기에 시신을 찾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시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머물만한 시체를 찾아 다니다가 하디가 만들어 놓은 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빨려들 듯 시체 속으로 들어가, 죽어있던 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하디가 잃어버린 시체는 이웃집 노파의 집에 가 있었다. 

이 살아있는 시체를 보고 노파는 자신의 믿음대로 아들이 살아 돌아온 거라 생각한다. 

아들의 옷을 꺼내 주고(딱 맞는다), 요리를 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시체는 대답이 없다. 

하디의 시체가 사라진 후 바그다드에는 연속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물론 살아난 시체, 무명씨다(하디는 사라진 시체를 무명씨라 불렀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살점의 주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게 개인적 복수를 하고 다니는 시체와 그를 쫓는 군과 특수 부대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사다위의 프랑켄슈타인을 비교하면 두 괴물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르다. 

메리의 괴물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인정 받기를 바라지만 사다위의 무명씨는 인정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인 복수만을 추구할 뿐이다. 

두 괴물 다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 결도 다르다. 

메리의 괴물은 내면의 갈등, 자신의 창조자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마침내 자신의 창조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누구보다 슬퍼하는 게 바로 괴물인 이유다. 

영원히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 사랑해주기를 바랐던 단 한 사람마저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이 괴물의 죄의식의 근간이다. 

사다위의 무명씨는 변질된다. 

처음에는 순수한 복수, 정의의 응징이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서 점차 순수한 악에 가까워 진다.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한 이유들을 찾으며, 누군가의 인정을 구하기 보다 자신의 안위, 존재의 연장을 위해 살아간다. 


 아흐메드 사다위의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은 2018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작품의 하나다. 

번역되어 읽기 전에는 소재나, 소개된 소재만을 보고 몹시 흥미로울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번역된 작품을 읽은 후 실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대여섯 군데에 초보적인 오탈자가 있다. 단지 책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난이도의 오탈자라 편집, 번역에까지 의구심을 갖게 했다.


 책 소개에 '블랙 유머'라고 소개한 부분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점도 한 몫을 했다.

 웃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선한 복수를 통해 희생자를 위로하려던 처음의 의도가 악한 살인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로 변질되는 그 모든 과정들이 거대한 아이러니, 결코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필연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 모든 이야기들은 허구가 아닌 실제 현실이다. 누구보다 선하고 선량한 그 누군가가 희생자를 특정하지 않은 테러에 간단히 휘말려 목숨을 잃는 게 일상인 세계가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묻는다.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내놓으라 한다.

"정녕 살아가야 하는 사람,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할 시간도 없이 죽어버린 선량한 사람인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영혼을 짓누르는 살인의 괴로움을 참아내는 괴물인가.

 거대한 힘을 뒤에서 움직이는 진정한 적들을 거꾸러뜨릴 수 없으므로 손 닿는 곳에 있는 치졸한 방조자들을 살해하는 사사로운 복수가 부당한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 <데스 노트>가 떠올랐다. 자신의 절대적인 정의를 믿는 살인자와 살인자에게 살해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천재 탐정. 

 바그다드의 괴물 무명씨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사사로이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힘과 '살아남기'를 최선의 정으로 삼아 그것을 관철하려는 모습까지를.


 피, 테러, 전쟁의 뒤에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 있다. 

인간 개인이기도 하고, 인간 집단이기도 하며, 사회들이기도 한 힘들이. 

그들의 부추김이 없다면, 갈등을 더 깊은 갈등으로 풀어가려는 시도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조금씩 덜 욕심을 낸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은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북한은 지금 악의 축에서 평화의 핵으로 탈바꿈 중이다. 

그 변신이 완결될지 아니면 뒤틀리거나 틀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서로의 욕망을,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는다면 완결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커질 거라는 거다.


 세계는 선언해야만 한다. 

자기만의 평화와 안녕이 아닌 모두,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 선언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교류와 협력이 이어나가 궁극적으로 갈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게 이상론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상보다 몽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현재 진행형의 비극이 그 고리를 끊고, 마침내 종결되기를. 

과거로 흘려보내되 비극과 슬픔, 고통과 아픔을 잊지는 말기를.


 역사의 조각으로 흩어져 안식에 이르지 못한 모든 희생자들에게 이제는 평화라는 정당한 장례를 치러주기를.

피에는 피, 복수에는 복수라는 고리를 끊어낼, 마지막 장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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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봄출판 2018-07-17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더봄출판 대표 김덕문입니다.
먼저 좋은 서평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아울러 오탈자가 생긴 점에 대해서 깊이 사과드립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작은 출판사라서...
그래도 변명은 안 되겠지요?
외람되지만, 지적하신 오탈자에 대해서 알려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재쇄에서 수정을 하겠습니다.

이메일: 01052500647@hanmail.net / m.010-5250-0647

대장물방울 2018-07-18 11: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대표님, 좋은 책 출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일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큰 출판사들도 선뜻 내놓지 못하는 책을 이렇게 빨리 내셨으니, 충분히 대단합니다.

오탈자는 거창하지 않은 것들이라, 여기 댓글에 적어 두겠습니다.
오탈자가 아님에도 프로불편러인 제 눈에 어색하게 보인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주세요.

1. 41페이지 중간
방에 도착하자마자 하비는 매트리스 위에 -> 하비가 아니라 하디로 알고 있습니다.
2.117페이지 하단
마흐무드 알 사와디가 들어오지 않았다며 난감했을 것이다 -> 들어오지 않았다면
3. 137페이지 하단
호텔 경비원이 염감 때문에 죽었다 -> 영감
4. 177페이지 하단
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장이 정확한 표현인지 확인 필요(특수정보추적국 국장, 계급은 준장)

네 군데였네요.

앞으로도 좋은 책 출간 기대하겠습니다. 독자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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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야 늘 있지만 요즘들어 깊어진 고민이 하나 있다. 

새로운 사람, 사람들과 만남이 나날이 귀찮아만 간다는. 

처음 하는 고민도, 새삼스러울 깊어짐도 아니지만 '사회 생활'을 해야만 하는 나이, 그것도 원만히 해내야 하는 나이에 골몰하기엔 부담스런 고민이다. 


 숨을 쉬듯 허기가 지고, 허기를 달랠 밥을 먹고,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피로를 느끼고, 피로를 이유로 이런 저런 일을 모면하는 일상. 시간은 부쩍부쩍 큰 걸음을 걸어서 어제는 자꾸만 멀어지고, 내일은 오늘이 되고, 1년 2년을 간단히 살아낸다. 


 그 시간을 혼자 보내지는 않았겠으나, 남은 것도 기억도 거의 없으므로 혼자 보낸 것과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기적이 필요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쩌면 매순간이 기적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지금의 시간이 어쩌면 기적의 산물이었음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때로는 많은 시간을 흘려 보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게 우리 인간들이 공유하는 몹쓸 병은 아닐까.


 서커스 나이트. 

민음 북클럽 회원으로, 그 중에서도 첫 독자가 되기를 신청한 사람으로 이 책과 만났다.

 이 만남은 어떤 의미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 일어날 수 없었을 일이 일어난 경우, 그러니까 기적이다.

굳이 구질구질해지자면 새로 출간된 책을 홍보하고 알리려는 출판사의 욕심과 누구보다 빨리, 심지어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책을 읽어보려는 독자의 욕심이 상호충족됐을 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 게 기적이다. 일어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일어남으로써 그 다음의 무엇 혹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 기적이란 그렇게 일상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두께, 무려 400쪽이 넘는 책에 단 한 편의 이야기가 담겼다. 기억 속 바나나의 소설은 200쪽 안팎이었으며, 가까운 날에 읽은 <바다의 뚜껑>도 비슷했다. 그 두 배나 되는 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줄거리는, 이랬다.

 주인공 사야카는 사이코메트러다. 사물에 담긴 기억 혹은 감정을 읽는다. 몇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마당이 있는 2층짜리 주택, 아래 층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산다. 하루는 묘한 편지를 받는데, 마당에 심긴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에 뭔가를 묻었는데 파 갈 수 있느냐는 전에 살던 사람의 메시지다. 우연일까, 편지의 발신인은 오래 전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다. 기이한 모양으로 굳어버린 왼손의 상처와 연결된 과거의 주연이 편지 하나로 현재와 이어진다. 소설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서 파낸 건 어린 아이의 뼈였고, 그 뼈를 계기로 전 남자친구 이치로와 재회 하며, 이해심과 사랑이 많은 시어머니의 응원과 천진난만한 딸 미치루의 활약으로 오래 묵혀 두었던 아픔, 상처가 치유되어 간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다. 

여리고 따뜻하지만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들. 저마다의 상처로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상처를 늘리는 모난 행동보다 서로의 상처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가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쏟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에 '으응?/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면서도 '그렇게 되다니 다행이군'하고 안심하게 하는 편안한 이야기. 불행이 특별하지 않게 되는 묘한 위안을 담은 이상한 사람들의 일상.


  관계와 연결을 생각꺼리로 삼은 지는 오래다. 대부분이 이어갈 지, 끊어낼 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의 고민이었다. 관계의 문제는 누구나 하는 고민, 답을 얻고자 하는 문제다. 논리, 이성으로 접근하거나 관계의 기술로 풀어 보려는 사람 들을 위한 책도 많다. 지금까지 나온 책들에 다 담지 못했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쓰고 있을 거고, 누군가는 인쇄를 하고 있을 거며, 누군가는 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사람들은 자꾸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한다. 세상도 같은 말을 한다. 관계가 잘 안 풀리거나 안 되면 스스로를 탓하게 하고 돌아보라고 한다. 인연이니 운명이니 기적이니 하는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 기대려고 하면 미신이니 무책임이니 하며 혼내려 든다. 


 바나나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사회와 관계 속에서 망각하고 소홀히 여긴 인연의 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움직임, 인식을 초월한 기적을 긍정하는 거다.

 사람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알아가는 동안 달라진다. 새로 배우는 게 있지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또 변한다. 자신이 변했다는 걸 알아 차리거나 모르고 살거나와 무관하게 변해 간다. 

 

 "나는 변하지 않아!"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는 이 문장을 전하고 싶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 주위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나쁘지만,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틀린 거야." <서커스 나이트> 273P

10살 즈음의 딸 미치루에게 엄마 사야카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아이는 물론 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루는 조숙한 아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린 아이는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어른의 생각이 오히려 편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어릴 때 더 깊이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는 일도 흔하니까.


 가끔 이야기에서 나의 일부 혹은 과거의 나와 만난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자유로운 것은 좋지, 아주 좋은 일이야. 그러나 아무와도 이어져 있지 않거나 언제 끊길지 모르는 만남만 있는 인생은 자유롭다 할 수 없어.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혼자 살아온 네게는 그런 면이 좀 있어. 혼자 어둠 속에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함이. 그게 어쩌면 매력으로 이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매력은 버려도 괜찮다. 번거롭더라도 이어져 있으렴. <서커스 나이트> 189P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온 셈이다. 사람과 관계의 고민 말이다. 

어떤 특별한 불운이 아니더라도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은 혼자가 좋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혼자가 좋지 않더라도 관계의 번거로움을 견디는 일보다 수월하다는 의미도 된다. 관계를 잇고 유지한다는 말은 거기에 그만큼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관심과 노력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일말의 혹은 많은 책임을 느낀다는 의미다. 책임이 생기면 훌쩍 사라질 수 없다. 자유를 잃은 듯, 갇힌 듯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응지 식물이라도 햇빛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거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모든 외부 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 고립된 자유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관계 없이 살 수 없다. 관계에 질식할 지경까지 견뎌서는 안 되지만 메말라서도 안 된다는 거다. 안정 속의 불안정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하지만 불안정 속의 불안정은 인간을 극단으로 내몰기 쉽다. 


 <서커스 나이트>에는 초월적인 믿음이 담겨 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하고, 논리와 과학으로 증명하기 익숙한 세계 이면이 녹아있다. 

 이런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모든 걸 다 안다는 지금의 확신을 뒤집어 놓을 경험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고, 인연에는 적거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기적은 사람에게서 온다고.


책을 덮으며 떠올린 생각은 이런 거였다.

"다음에는 발리에 한 번 가봐야겠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착한 사람 꿈에 찾아온다는 성스러운 동물 바롱을 만날 수 있겠지. 
아, 그런데 안 오면 착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가? 
뭐,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겠군."


 서커스 나이트, 기적을 만나는 밤.

혹은 기적을 믿어보고 싶은 밤.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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