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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판문점 선언과 북미 정상회담, 북한 비핵화와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
남북과 북미 정세 평화 축으로 급격히 전환,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꾸준히 들려오는 교류와 소통.
통일 농구 대회에 이어 이번에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북한 영화가 상영되는 문화 교류의 물꼬가 틔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성급한 낙관론을 경계한다고 해도 성과는 성과, 진전은 진전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북한에 관련된 건 모두 금지되었던 시대, 평화로 이어질 일말의 가능성을 붙들기보다 팽팽한 대결 구도 극단에 있는 전쟁을 이야기하던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음이 오히려 생소하기만 하다.
"이렇게 쉬웠는가?"
남북 정상이 만나 손을 맞잡던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머릿 속으로 흘려낸 말이었을까.
모든 갈등의 이면에 이권과 속셈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음이 얼마나 또렷이 드러났던가.
시민의 삶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그 모든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북한 영화는 <불가사리>라고 한다.
바다에 사는 별모양의 기묘하고 신기한 생물 불가사리 이야기는 아니다.
전설의 동물로 쇠를 먹고 자라며, 이 영화에서는 전쟁을 위해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는 왕을 무찌르는 활약을 한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사람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는 걸 택할만큼 마음씨까지 곱다는 소문이다. 생긴 건 안 곱
참고로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는 죽여도 죽지 않는다는 '불가살'에서 그 이름이 생겼단다.
이번에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북한 영화는 9편으로 특별한 신청 절차 없이 영화제에서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체제 찬양이나 영웅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던 과거와 달라진 점은 디테일하게 개인의 삶을 들여다 본다는 점이라는데,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계속되어 영구적인 평화에 닿기를 바란다.
다른 세계로 시선을 옮겨 보자.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다.
이라크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이유, 평화 유지를 근거로 한 국제법상 합법적인 침공이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제거 후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이라크에서 철수한다.
표면적으로는 승전 후 철수였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도망친 셈이었다.
그 후 오늘까지 이라크는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폭탄을 실은 자동차가 달려들지 두려워하고, 어느 누가 인간 폭탄일지 알 수 없는 공포에서 경계를 늦추지 못한 채로.
세계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평화를 모르고 태어나 자란 이들이 평화를 꿈꿀 수 있는가?
신이여, 과연 그들이 부르고 기도하는 신은 살아있는가?
아니, 아니.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어디에도 없다.
아흐메드 사다위는 그런 이라크, 바그다드의 절망을 소설에 옮겨 적었다.
메리 셸리가 창조한 19세기의 괴물을 21세기에 되살려낸 거다.
소설 제목은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시대와 비극이 창조해낸 괴물, 무명씨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전쟁에 동원된 후 돌아오지 않는 한 노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노파는 여전히 아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연이은 테러로 공포와 혼란이 계속되는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는다.
그의 이웃 중 폐품업자 하디는 폭탄 테러에 희생된 이들의 사체들을 모아 하나의 시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영혼을 잃은 육체가 하나의 완성된 시체로 인정받아 온전히 장례가 치러지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하지만 제정신을 차렸을 때 하디는 두려워 한다.
시체를 다시 분해해 원래 자리에 흩어놓을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실행되지 못했다. 또 다른 폭탄 테러에 휘말렸던 거다.
이번 폭탄 테러는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워낙 가까이서 폭발했기에 시신을 찾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시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머물만한 시체를 찾아 다니다가 하디가 만들어 놓은 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빨려들 듯 시체 속으로 들어가, 죽어있던 몸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하디가 잃어버린 시체는 이웃집 노파의 집에 가 있었다.
이 살아있는 시체를 보고 노파는 자신의 믿음대로 아들이 살아 돌아온 거라 생각한다.
아들의 옷을 꺼내 주고(딱 맞는다), 요리를 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시체는 대답이 없다.
하디의 시체가 사라진 후 바그다드에는 연속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물론 살아난 시체, 무명씨다(하디는 사라진 시체를 무명씨라 불렀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살점의 주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게 개인적 복수를 하고 다니는 시체와 그를 쫓는 군과 특수 부대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사다위의 프랑켄슈타인을 비교하면 두 괴물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르다.
메리의 괴물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인정 받기를 바라지만 사다위의 무명씨는 인정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인 복수만을 추구할 뿐이다.
두 괴물 다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 결도 다르다.
메리의 괴물은 내면의 갈등, 자신의 창조자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마침내 자신의 창조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누구보다 슬퍼하는 게 바로 괴물인 이유다.
영원히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 사랑해주기를 바랐던 단 한 사람마저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이 괴물의 죄의식의 근간이다.
사다위의 무명씨는 변질된다.
처음에는 순수한 복수, 정의의 응징이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서 점차 순수한 악에 가까워 진다.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한 이유들을 찾으며, 누군가의 인정을 구하기 보다 자신의 안위, 존재의 연장을 위해 살아간다.
아흐메드 사다위의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은 2018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작품의 하나다.
번역되어 읽기 전에는 소재나, 소개된 소재만을 보고 몹시 흥미로울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번역된 작품을 읽은 후 실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대여섯 군데에 초보적인 오탈자가 있다. 단지 책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난이도의 오탈자라 편집, 번역에까지 의구심을 갖게 했다.
책 소개에 '블랙 유머'라고 소개한 부분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점도 한 몫을 했다.
웃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선한 복수를 통해 희생자를 위로하려던 처음의 의도가 악한 살인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로 변질되는 그 모든 과정들이 거대한 아이러니, 결코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필연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 모든 이야기들은 허구가 아닌 실제 현실이다. 누구보다 선하고 선량한 그 누군가가 희생자를 특정하지 않은 테러에 간단히 휘말려 목숨을 잃는 게 일상인 세계가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묻는다.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내놓으라 한다.
"정녕 살아가야 하는 사람,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할 시간도 없이 죽어버린 선량한 사람인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영혼을 짓누르는 살인의 괴로움을 참아내는 괴물인가.
거대한 힘을 뒤에서 움직이는 진정한 적들을 거꾸러뜨릴 수 없으므로 손 닿는 곳에 있는 치졸한 방조자들을 살해하는 사사로운 복수가 부당한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 <데스 노트>가 떠올랐다. 자신의 절대적인 정의를 믿는 살인자와 살인자에게 살해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천재 탐정.
바그다드의 괴물 무명씨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사사로이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힘과 '살아남기'를 최선의 정으로 삼아 그것을 관철하려는 모습까지를.
피, 테러, 전쟁의 뒤에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 있다.
인간 개인이기도 하고, 인간 집단이기도 하며, 사회들이기도 한 힘들이.
그들의 부추김이 없다면, 갈등을 더 깊은 갈등으로 풀어가려는 시도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조금씩 덜 욕심을 낸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은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북한은 지금 악의 축에서 평화의 핵으로 탈바꿈 중이다.
그 변신이 완결될지 아니면 뒤틀리거나 틀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서로의 욕망을,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는다면 완결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커질 거라는 거다.
세계는 선언해야만 한다.
자기만의 평화와 안녕이 아닌 모두,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 선언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교류와 협력이 이어나가 궁극적으로 갈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게 이상론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상보다 몽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현재 진행형의 비극이 그 고리를 끊고, 마침내 종결되기를.
과거로 흘려보내되 비극과 슬픔, 고통과 아픔을 잊지는 말기를.
역사의 조각으로 흩어져 안식에 이르지 못한 모든 희생자들에게 이제는 평화라는 정당한 장례를 치러주기를.
피에는 피, 복수에는 복수라는 고리를 끊어낼, 마지막 장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