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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평점 :

1. 13년 만에 세상에 나온 책
작가나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첫 몇 페이지를 보는 동안 벌써 대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마지막에 작가의 말을 보고서야 그 내공의 실체가 이해되었다. 이 소설은 구상단계부터 13년 만에 나왔고 집필하는 4년 동안 35번 개고 했다고 한다. 한 작품에 투자한 시간만큼 완성도와 몰입력이 높은 소설이 된 것이다.
이 책은 약 10년 전 우리나라에서 우주인 선발에 참여했던 고산, 이소연 두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훈련과정과 우주인 후보들의 생생한 심리묘사, 숨 막히는 경쟁사회에서 최초만을 기억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 탄탄한 서사구조에 얹혀진 감성적 문체, 영화를 보는 듯한 편집 구성,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아래는 스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주인 선발과정의 쫀쫀한 긴장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은 책을 먼저 읽고 리뷰를 읽어주세요 :)
2.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은 이유
2000년, 대한민국 과학기술부는 러시아와 공동으로 우주비행사 양성계획을 세우고 2006년 4월에 모집공고를 한다. 지원자가 3만 명이 넘은 가운데, 고산과 이소연이 최종후보 2인으로 선발된다. 최종 한명을 선발하기위해 러시아의 유리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에서 1년여 동안 우주적응과 실험수행을 위한 훈련과 평가를 받은 후, 2007년에 고산이 최종 탑승자로 정해진다. 이소연은 고산의 백업이었는데, 2008년에 고산이 규정을 위반하면서 백업이었던 이소연이 최종 탑승자로 바뀌게 된다. 마지막까지 어떻게 될지 몰랐던 한국의 최초 우주인이라는 타이틀은 결국 이소연이 거머쥔 것이었다.
이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드라마틱했던 이소연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 우주인인 이소연 말고, 고산을 떠올리게 하는 이진우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작가는 왜 최초의 우주인이 아닌, 우주인이 될 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일까?
찾아보니 NASA의 입장은 우주비행사로 불리기 위해서는 NASA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소연의 소유즈호 탑승은 한국과 러시아 우주 연방청의 상업계약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이소연을 “우주비행사”astronaut가 아닌 “우주비행 참가자”spaceflight participant로 분류한다. 이때,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백홍열 원장이 단순한 우주비행 참가자가 아니라 논란의 여지없는 우주비행사라고 반박했지만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었다. 이소연이 비판을 받는 지점도 있다. 국가예산 260억원을 투입한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연구원의무복무기간인 2년을 채우자마자 항공우주분야와 관련이 없는 경영학을 공부하러 미국에 간점,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 후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점등이 그것인데, 이는 이소연 개인을 넘어 후속사업을 계획하지 않았던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참고:위키백과) 그러나 이런 논란마저 소설의 소재로서는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이기에 이런 이유로 최초의 우주인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책을 보다보면 인간미가 배제된 초경쟁 사회에 대한 일관된 작가의 관점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경쟁을 통해 주변의 동료를 무자비하게 낙오시켜야만 성공하는 이 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료도 없다. 최초라는 타이틀에 목을 매고 최초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가가린을 기억하지만 티토프는 기억하지 않는다. 당시 유리가가린의 백업이었던 티토프는 가가린의 후임으로서 우주에 나가서 유리가가린보다 더 유의미한 임무를 수행해 냈다고 평가되지만 실제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달에 최초로 발자국을 남긴 암스트롱은 기억하지만 함께 간 버즈 올드린은 기억하지 않는다.
결국 작가는 우리나라 우주비행사의 최초가 될 뻔한 고산을 인간미 넘치는 이진우라는 인물로 재창조해 우리에게 다시 보여준다. 이것이 작가에게 이진우가 주인공이어야만 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최초를 위해 인간성을 내버리는 현시대에, 과연 최초가 최고의 가치인가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3. 제목이 왜 <중력>일까
<중력>이라는 제목, 우주인 헬멧을 쓰고 양복을 입은 표지의 일러스트에서, 막연하게 중력을 상징으로한 회사원의 삶을 묘사하는 이야기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철저하게 우주인 이야기였다. 1점으로 최초의 우주인이 되느냐 마느냐 긴장의 시간을 보내는 4명의 후보들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인간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질투, 좌절, 불안한 감정들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4인의 후보 중 누가 탑승자로 최종 선발 될 것인가가 핵심 서사인 것이다. 그러나 우주인 이야기로서 <중력>이라는 제목이라면 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우주인이라면 오히려 제목이 <무중력> 이었어야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작가는 왜 <중력>이라는 제목을 썼을까. 자신이 인정받고자하는 위원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비로소 중력의 의미를 깨달은 이진우의 말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은 무거운 물체의 주변 공간은 중력 때문에 휘어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의 근처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나의 마음은 실내에 쳐진 그물 위에 선 것처럼 그가 움직이는 곳으로 기우뚱하게 쏠리곤 했다. 301
실제로 생물학연구원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지극히 결과지상주의자였다. 연구원팀장이 자신의 완벽한 실험결과보고서에 부당한 평가를 내리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다. 이진우는 속으로 팀장이 대학원장의 제자라는 이유로 부족한 실력에도 팀장이 되어서 자기 등에 업혀 우수등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팀장이 배정한 기본기가 부족한 후배도 이진우 자신이 그 실수들을 메꿔 왔기에 성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한 생각으로 팀장에게 반박하며 자신에게 내려진 미달평가에 승복하지 못하고 대립한다. 그리고는 이 부조리한 구조에서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완벽한 성과보고서를 내야한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보고서를 더 깊고 예리하게 써내면 다시 기회도 만나고 보상도 생길거라며, 오직 결과로서 승부하려고 다짐하는 그의 모습이 묘사된다.
그러나 매일 빚을 지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의 힘을 우주인 선발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각한 이진우는 변화한다. 실력으로 당당하게 선발된 우주인 기회가 동료의 잘못 때문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동료를 고발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만 소신을 밝히던 과거의 그는, 이제 모두를 감싸 안는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힘이 나타나요. 끌어안거나 품어주는 힘이요. 중력 같은 힘 말이에요. 늘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차츰차츰 강해졌어요. 우리는 그런 힘이 너무 없는 곳에서 살고 있잖아요. 밀치는 힘, 내쫓는 힘, 책임지지 않는 힘... 그런 게 많잖아요. (...) 우리는 무중력에서 오래 살 수가 없어요. 지상으로 돌아와야 해요. (...) 우리는 평범했지만 앞날로 나아가는 이런 팀워크를 통해서 비범한 데까지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한때 대단한 것처럼 주목받을 수는 있지만 비범한 듯이 오래 남을 수는 없어요. 때가 되면 평범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러려면 연민을 지녀야 해요. 간발의 차이로 저의 뒤에 서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운이 없어서 뒤에 섰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것이 제가 이진우라는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에요. 424-425
작가는 이진우라는 사람이 끌어당기는 힘이 바로 ‘중력’ 같은 것이라고, 인간성을 회복한 삶을 살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쟁에서의 승리로 무중력의 상태에 올라가더라도 언젠가는 중력의 힘이 이끄는 대지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에, 경쟁이나 목표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신념과 사람다움으로 대지에 발붙이자고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인이 되지 못한 이진우의 입을 빌어 작가는 말한다. “나는 그다지 멀리 떠나가거나 그다지 먼 곳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었구나,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결같이 생각하며 살아오고 있었구나,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라고.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하는 중력을 등에 업고 다시 일어나 힘내라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고 삶이라고 말이다.
이 책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마치 그가 말하고자했던 ‘중력’처럼 말이다.
태양의 그 모든 불꽃들을 뭉쳐서 둥근 공으로 빛나게 하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태양처럼 행성들을 데리고 홀로 사는 별도 있지만 별 두 개나 세 개가 중력으로 묶여서 쌍둥이나 남매들처럼 사는 경우도 있다. 서로 늘 힘을 미치면서. 이 모두에게는 중력이 삶의 조건이고 운명이다. 별들이 생겨나고 자라나고 무너지는 생로병사를 중력이 다 맡아서 다루는 것이다. 사람도 너와 나, 우리는 무게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무게가 있는 곳에는 중력이 있다. 중력은 바람과 강, 밀물을 당길 때는 공평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갈 때는 오로지 개별적일 뿐이다. 버릴 과거는 없다. 아무도 모르니까. 피할 미래도 없다. 씨앗이 움트고 있으니까. 운명을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성을 시험해봐라. 나아간 만큼 너의 인생이 된다. 다시 일어난 만큼 너는 강해진다. 그러니 반드시 생각해라.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너는 더 멀리 날아가야 한다고.440